음악은 계속된다.
잘 모르는 사이일수록 음악을 왜 그만두고 전공을 바꾸었냐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는다. 나는 그 질문에 보통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를 제대로 하려다가는 길이와 깊이를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고 구구절절 내 이야기를 늘어놓게 될까 봐. 민망한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대답 자체를 피하고 적당히 둘러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브런치는 나의 공간이니까 조금 더 구구절절해져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천천히 다시 말해보려 한다.
처음 기타를 쳤던 것은 14살인가 15살인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즈음이었다. 티비에서 우연히 보았던 일렉기타가 너무 멋있어서 하고 싶었다. 집안 사정이 넉넉한 편은 아니어서 부모님이 그런 취미생활을 시켜줄 여건이 되지는 못했다. 철없이 기타를 사달라는 말이나 기타 학원에 보내달라는 말은 했지만 모두 묵살되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용돈을 모았다. 당시 용돈은 한 달에 5천 원이었고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면 세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어른들에게 인사 좀 하면 대충 10만 원쯤이 생겼다. 기타를 하고 싶다고 마음먹고 대략 1년 후에 스쿨뮤직이라는 사이트에서 저렴하게 판매하는 일렉기타와 앰프 세트를 살 수 있었다. 2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의 초보자용 세트였으니 좋은 제품은 아니었겠지만 누구보다도 그 기타를 사랑했고, 오랫동안 애지중지했다. 그 기타로 밴드부에 들어가 공연도 해보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깨작대면서 오후 여가시간을 보내곤 했다.
내 돈으로 기타는 어찌어찌 구했지만 학원비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다행히도 인터넷이 있었고, 지금처럼 보편화되어있진 않지만 어쨌든 유튜브가 존재했으므로 인터넷과 기타 교본을 넘나들며 스스로를 가르쳤다. 특별히 치고 싶은 곡이 있으면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공책에 악보를 따라 그렸다. 우리 집에는 프린터기가 없었다.
그냥 기타를 계속 치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훌륭한 음악가가 된다던가, 오디션프로에 나가 유명해지겠다거나 그런 야망은 없었다. 그저 기타가 좋았고 계속 치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관두지 않고 계속했으니 돌이켜보면 재능이 없진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세계를 놀라게 할 만큼의 재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책과 인터넷에서 본 것을 이리저리 연구하며 흉내 낼 수 있었고, 이런저런 정보를 주워섬기며 공부했다. 코드를 자유자재로 칠 수 있을 즈음부터는 자작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배운 적은 없었고, 그저 흥얼거리며 튀어나오는 음악이 공책에 박제되는 과정이었다. 코드를 배열하고 그에 어울리는 멜로디를 입으로 찾고 가사를 붙이면서 한때는 공장처럼 곡을 찍어댔다. 그중에 딱히 성공할 만한 곡은 없었던 것 같지만.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고등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고 싶어 했지만 역시나 형편상 그러기 어려워 일반 인문계에 진학했다.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온 세상이 갑자기 내게 진로를 정하라고,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에 가고 싶은지 알아야 한다고 압박을 주었다. 예술고등학교 진학은 실패했지만 대학교에서는 음악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부모님과의 전쟁과 투쟁 사이 무엇인가가 한동안 진행되었다. 그 결과,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실용음악학원 입시반에 다닐 수 있었다.
입시의 과정은 짧게 말하고 싶다. 초반에는 그저 기타를 배운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행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루 종일 좁은 연습실에서 몇 시간이고 크로매틱만 해도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행복은 압박감 속에 서서히 잦아들었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 행복을 쉽게도 눌렀다. 지겨운 입시를 끝내고 재수 끝에 실용음악과에 합격했다. 그다지 원하던 학교는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자취를 시작했고, 대학을 다니면서 현실의 풍파를 많이 맞아 몸이 무거워졌다. 예를 들면 전액 학자금대출. 장학금을 전혀 못 받는다고 가정하면 졸업 후 약 4천만 원의 빚이 생기는데, 내가 4천만 원을 갚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컸다. 머리가 크고 나서 보니 집안의 사정이 더욱 속속들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래서 입시 때처럼 어느 하나를 목표에 두고 연습에 미쳐 살지 못했다. 입시가 끝나자 압박감은 사라지기는커녕 몸집을 불려 갔다.
학교를 다니며 즐거운 순간도 많았지만 그만큼 괴로운 순간도 많았다. 괴로운 이유는 많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나를 가장 괴롭게 한다는 점이 가장 괴로웠다. 좋아하는 것을 잃었다고 느꼈다. 현실적인 고민도 많았다. 졸업해서 먹고 살 구멍이 보이지 않았고, 학자금 대출을 갚지 못하는 거 아닐까 상상했다. 집안 형편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내가 고꾸라지면 다 같이 고꾸라진다는 것을 느꼈다. 솟아날 구멍이 없었다. 그런 것들을 모두 포함해서 음악은 나를 더욱 크게 압박했다. 성공해야 해. 음악을 기깔나게 잘해서 이름을 떨쳐야 해. 그런데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비싼 돈 내고 음악을 계속 공부해야 하나? 알 수 없었다.
2년간 학교를 다니고 휴학했다. 친하게 지내던 동기가 군대를 가기도 했고, 2년간 축축해진 삶을 건져내 바싹 말리고 싶었다. 처음 휴학할 때에는 아직 음악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휴학하면 기타를 많이 쳐야지. 내가 하고 싶은 곡을 잔뜩 연습하고 연주하고 공연도 많이 보러 다녀야지,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타를 치지 않았고 공연을 보러 다니지도 않았다. 나중에는 음악도 듣지 않았다. 음악을 듣기만 해도 코드 진행이나 스케일을 분석하며 공부 모드로 듣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이후로는 음악을 듣는 것조차 즐겁지 못했다. 휴학하며 음악을 멀리하고 살아보니 음악이 없어도 살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악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런 시절이 지나갔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다.
음악을 그만두겠다 마음먹고 다른 미래를 위해 편입 공부를 하던 그동안 나는 음악을 정말로 멀리했다. 악기 연주는 당연히 하지 않았고, 대중교통에서도 음악을 듣지 않았다. 귀가 휴식을 취하는 그 감각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아보니 앞으로도 계속 쭉 그렇게 살 것만 같았다. 물론 아니었다. 편입에 합격한 해에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내가 사이버대학에 편입했나 착각이 들 지경이라 알찬 학교생활을 위해 동아리 홍보 게시판을 살펴보았다. 흥미로운 동아리가 많아서 이것저것 스크랩을 반복하던 차에 오케스트라동아리를 보았다. 너무 생소했다. 살면서 오케스트라라는 단어를 열 번도 안 말해본 것 같았다. 그 생소함에 끌렸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 중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세컨바이올린 파트는 초보자도 환영, 이라는 문구를 읽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해야 하나? 그날 새벽 내내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내 인생에 음악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음악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나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할까 말까 할 때는 하라는 명언에 따라 가입신청을 질렀다. 그렇게 다시 음악이 삶에 들어왔다.
남들은 보통 미취학아동 때 시작하는 이 악기를 다 커서 처음 해보게 되었다. 너무 어려웠다. 바이올린을 처음 해본다는 나 같은 사람들이 대여섯 명쯤은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둘만 남았다. 못해도 괜찮은 음악. 그냥 재밌게 하면 그만인 음악. 나는 이걸로 돈을 벌거나 빚을 갚거나 집안에 보탬이 될 필요가 전혀 없다. 압박감이 걷힌 자리에 다시 음악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즐겁게 연습하다 보니 연주회도 할 수 있었고, 졸업하고서도 간혹 혼자 연습하다가 지루해져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다시 찾아 들어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또 어떤 시절이 흘러갔음을 알았다. 마침표인 줄 알았던 것이 도돌이표였다는 것을 지나고 나서 알았다. 이제는 음악을 가장 잘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가장 오래 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내가 이걸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기를.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도 무언가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기를. 꼭 연주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맘껏 좋아하고 계속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