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 지 오래라

by 데미안

글을 쓴 지 오래라 한참을 망설였다. 나는 어떤 말부터 적어야 할까. 놓아 버린 시간 앞에서는 항상 이렇듯 머뭇거리게 된다. 나는 개학 첫날, 어색한 복도 공기를 마시고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른 탓에 차마 교실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학생이 되어 버린다. 문을 열면 반가운 얼굴의 친구들이 나를 바라볼 텐데 나는 그 눈길을 받을 자신이 없다. 주춤거린다.


그러다 예전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인생 최고 몸무게를 연일 경신중인 고등학생이었다. 모든 고3이 그렇듯 나 역시 먹는 것에 진심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한가한 점심을 즐기며 현실을 도피 중이었다. 메뉴는 칼국수. 인원수를 훌쩍 넘는 칼국수와 볶음밥까지 야무지게 먹었는데도 양이 모자라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을까. 뜨거운 것을 잔뜩 먹은 뒤에 입에 털어 넣었던 차가운 얼음과자 덕분에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얼음을 얼려 만든 듯한 재질의 '고드름' 같은 아이스크림이었다.) 나는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복통을 느끼며 위아래로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거의 1주일을 넘게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물이 아닌 음식이 배에 들어가면 위가 아파, 식욕이 있음에도 굶어야 했다. 정말이지 힘든 나날이었다. 나는 그렇게 골골댄 덕분에 몸에서 살을 6kg이나 덜어냈다. 한층 가벼워진 내게 엄마는 묽은 죽 한 그릇을 건넸다. 그것이 오래 굶은 뒤의 나의 첫 식사였다. 그 묽은 죽 덕분에 나는 서서히 다시 예전처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묽은 죽은 간이 약한 국이 되고, 또 건더기가 듬뿍 담긴 찌개가 되고 결국에는 밀가루와 고기가 되었다.


오래 굶다가 무언가 처음 먹게 되면 우리는 음식인지 물인지 알 수 없는 미음부터 먹는다. 갑작스러운 음식에 놀란 속이 또다시 뒤집어지지 않게 말이다. 그간 나는 지독한, 불행이라 여겨질 만한 슬픔을 오래 앓았다. 울다 무너지고, 무너져서 울고,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허우적 대며 깊이 잠들지 못한 밤이 여럿 있었다. 어떤 날은 언제 잠든지도 모르게 지쳐 쓰러져 잠에 들었다. 눈을 뜨면 혼자만의 새벽이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맞서 다시 하루를 버텼다. 결혼하고 찐 살 5kg이 빠졌다. 왜 요새는 글을 쓰지 않냐는 말에 나는 도저히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아주 가끔씩 찾아오는 쓰고 싶은 순간에는 조금씩 무언가를 적었다. 하지만 이내 너무 무서운 말들만 쏟아져 나와 결국 아무것도 적지 못한 것과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래 절필한 나는, 그런 솔직한 내용들은 뒤로 두고 글인지 무언지 알 수 없는 것부터 편히 적어야겠다 생각했다. 마침 글 쓰는 친구들 덕분에 좋은 책을 한 권 읽게 된 터라 그에 대해 써보자고.

요조가 쓴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읽으며 나는 몇 개의 문장에 줄을 그었다. 이전의 나라면 절대 책에 줄을 긋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책에는 유달리 마음을 할퀴는 문장들이 많았다. 잊지 않기 위해 줄을 긋고, 기억하기 위해 몇 마디를 메모했다. 그렇게 밑줄 그어진 문장들은 모두 하나같이 멋지기보단 서글프도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그 문장 사이사이에 나만 알고 있는 슬픔을 꼭꼭 숨겨 적어 놓았다. 언젠가는 모두 다시 글이 되어 나올 것이다. 그전까지는 생각나는 대로 적고, 또 꺼내어 놓고 싶으면 꺼내 놓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쓰고, 말하며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밑줄 쳤던 문장 중 하나를 옮겨 적는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으면 늘 엄청난 속도로 슬퍼지는 것 같다. 손해 보는 걸 싫어하는 내 약삭빠른 마음이 슬퍼하지 말고 그저 이 순간을 신나게 만끽해야 한다는 뜻을 전해온다. 만끽이라는 건 언제나 약간 울고 싶은 걸 참으면서 하는 것일까."

- 요조,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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