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이를 키운다는 건 행복하려 애쓰는 일
그러니까 재이가 이름도 없이, 겨우 ‘행복이’라 불리던 시절의 일이다. 그때부터 나는 알았다. 운명에 미리 새겨진 듯 당연히 재이에 대해 쓰게 될 것이라고. 그 안엔 매일 우리가 만들어 낼 행복의 여러 단면이 담길 것이라고. 언젠가 그 글이 모이고 또 모여 얇은 책 한 권이 탄생하게 된다면 나는 훌쩍 커버린 너에게 오래 준비한 선물처럼 그 책을 건넬 것이다. 그러면 너는 그 책을 손에 꼭 쥐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겠지. 놀랄 땐 동그랗게 커지는 너의 눈에 가득 담길 미래의 어떤 순간을 상상하면, 아직 네가 태어나지도 않았단 사실도 잊은 채 마음부터 벅차올랐다.
전부 설레발이고 꿈이었던 걸까. 그런 내 마음이 무색하게 나는 쓰지 못했다. 재이가 태어난 뒤, 일과 아내, 그 밖의 작은 것들에 대해서라면 간혹 쓰곤 했지만 유독 재이에 관해서라면 말을 아꼈다. 재이의 첫 생일, 선물 대신 고작 편지 글 하나 몰래 적었을 뿐이다. 사랑한단 말 뒤에 미안하단 말을 깊숙이 숨겨 놓은 편지였다.
처음 1년은 정신이, 그 뒤엔 자신이 없었다. 너에 대해 쓰려면 우리에게 일어난 말도 안 되는 슬픔을 설명해야 했으니까. 견디고 감당해야 했던 우리의 지난 시간을 건너뛰고선 한 글자도 적을 수 없었다. 뭐라도 적으려면 아무도 몰래 감춰놓았던 내 슬픔 전부를 꺼내 놓아야 할 텐데,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끝을 살짝 뜯으면 빈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는 ‘거북알’ 아이스크림처럼, 살짝 스치듯 떠올리기만 해도 그날의 기억을 통째로 불러 일으키는 슬픔이다. 떠올리면 가슴이 불에 덴 듯 뜨겁고 칼에 베인 듯 아려와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앞에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자꾸 도망쳤다. 그때 그 시간을 마주 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같은 슬픔을 겪어 보지 않은 이라면 절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게는 재이가 태어나고서의 1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대부분을 나는 울고, 걱정하고, 미안해하며 보냈다. 좋아하는 소설가 최은영의 말을 빌리자면, 그 시기의 나는 사람이 아닌 누가 툭 치면 쏟아져 내릴 물주머니 같은 것이었어서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얇은 막 안에 갇힌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출렁거리고 흔들렸다. 그러다 툭 하고 터지면 속 깊은 곳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
재이가 아프게 태어난 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이 간단한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 뒤엔 울며 지샌 많은 밤이 있었다. 억울했다. 매일 밤 희망을 앓았고 무너지지 않으려 이를 꽉 물었다. 그러다 ‘그저 어떤 불운이 우리에게 일어났을 뿐이’란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현실의 어떤 문제도 해결되진 않더라도 마음만큼은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아이는 잘 크냐는 질문에 나는 여전히 설명할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헤맨다. 아이가 아파서요. 그렇게 말하고 나면 항상 어디가 허전해서 뭔가 더 얘기하고 싶지만 참곤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제야 쓸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지난 2년, 나는 충분히 울며 괴로워했고, 덕분에 많이 단단해졌으니까. 적어도 말하는 동안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이진 않으니까. 아픈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 또 동정받고 위로받아 마땅한 일인지를 쓰고 싶진 않다. 스스로를 슬픔의 늪으로 밀어 버리는 그런 종류의 서사를 떠올리면 구역질이 난다. 그건 마치 ‘당신들은 다시는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다’ 고 말하는 사형선고와도 같다. 내 슬픔이 그저 ‘불쌍해서 불행해진, 그래서 다시는 행복하지 못했던 어느 가족의 이야기’로 요약되길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내 마음에 닿았던 여러 위로의 말 중, 나의 쌍둥이 형 이기종이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아픈 아이를 키워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 너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그 말이 나를 바닥에서 구했다. 그래 우리도 행복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아픈 재이와 함께 헤쳐나갈 우리의 삶은 분명 불편한 구석이 있어, 아마 행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조금 더 애써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애쓴다’는 말이 주는 어감을 좋아한다. 애쓴다는 말은 온 마음으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힘을 낸다는 의미니까. 좋은 대학에 가려고, 돈을 더 많이 벌려고, 더 좋은 삶을 살려고 끝도 없이 노력하는 세상에서 행복 역시 어쩌면 애초부터 애써서 성취해 내야 할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행복에도 노력이 필요하단 말이 조금 슬플 수는 있어도 그 안엔 적어도 힘쓰면 분명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내가 매일 밤 앓던 그 희망 말이다. 게다가 자꾸 들여다보면 좀 귀엽게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다. 행복하기 위해 애쓴다니. 재이가 하루하루 더 크려고 애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처럼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니 아직 쓰이지 않은 나의 책 제목은 ‘애쓰는 행복’으로 하려 한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책의 서문이 될 것이다. 언젠가 만약에 나의 책이 완성된다면 모든 종류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행복하기 위해 조금 더 애쓰는 사람들이 내 책을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세상엔 조금 불공평하긴 해도 더 애써야 하는 행복도 있다고.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것이 당신이 행복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그런 말을 재이와 유현이,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일상을 통해 보여주고 증명하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내 작은 바람이다.
부디, 우리의 소중한 일상과 그 사이사이에 놓인 작지만 빈틈없는 행복을 알아차려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