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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Jun 13. 2022

애쓰는 행복

아픈 아이를 키운다는 건 행복하려 애쓰는 일

  그러니까 재이가 이름도 없이, 겨우 ‘행복이 불리던 시절의 일이다. 그때부터 나는 알았다. 운명에 미리 새겨진  당연히 재이에 대해 쓰게  것이라고.  안엔 매일 우리가 만들어  행복의 여러 단면이 담길 것이라고. 언젠가  글이 모이고  모여 얇은   권이 탄생하게 된다면 나는 훌쩍 커버린 너에게 오래 준비한 선물처럼  책을 건넬 것이다. 그러면 너는  책을 손에  쥐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겠지. 놀랄  동그랗게 커지는 너의 눈에 가득 담길 미래의 어떤 순간을 상상하면, 아직 네가 태어나지도 않았단 사실도 잊은  마음부터 벅차올랐다.


  전부 설레발이고 꿈이었던 걸까. 그런 내 마음이 무색하게 나는 쓰지 못했다. 재이가 태어난 뒤, 일과 아내, 그 밖의 작은 것들에 대해서라면 간혹 쓰곤 했지만 유독 재이에 관해서라면 말을 아꼈다. 재이의 첫 생일, 선물 대신 고작 편지 글 하나 몰래 적었을 뿐이다. 사랑한단 말 뒤에 미안하단 말을 깊숙이 숨겨 놓은 편지였다.

  처음 1년은 정신이, 그 뒤엔 자신이 없었다. 너에 대해 쓰려면 우리에게 일어난 말도 안 되는 슬픔을 설명해야 했으니까. 견디고 감당해야 했던 우리의 지난 시간을 건너뛰고선 한 글자도 적을 수 없었다. 뭐라도 적으려면 아무도 몰래 감춰놓았던 내 슬픔 전부를 꺼내 놓아야 할 텐데,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끝을 살짝 뜯으면 빈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는 ‘거북알’  아이스크림처럼, 살짝 스치듯 떠올리기만 해도 그날의 기억을 통째로 불러 일으키는 슬픔이다. 떠올리면 가슴이 불에 덴 듯 뜨겁고 칼에 베인 듯 아려와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앞에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자꾸 도망쳤다. 그때 그 시간을 마주 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같은 슬픔을 겪어 보지 않은 이라면 절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게는 재이가 태어나고서의 1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대부분을 나는 울고, 걱정하고, 미안해하며 보냈다. 좋아하는 소설가 최은영의 말을 빌리자면, 그 시기의 나는 사람이 아닌 누가 툭 치면 쏟아져 내릴 물주머니 같은 것이었어서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얇은 막 안에 갇힌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출렁거리고 흔들렸다. 그러다 툭 하고 터지면 속 깊은 곳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

 

  재이가 아프게 태어난 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이 간단한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 뒤엔 울며 지샌 많은 밤이 있었다. 억울했다. 매일 밤 희망을 앓았고 무너지지 않으려 이를 꽉 물었다. 그러다 ‘그저 어떤 불운이 우리에게 일어났을 뿐이’란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현실의 어떤 문제도 해결되진 않더라도 마음만큼은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아이는 잘 크냐는 질문에 나는 여전히 설명할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헤맨다. 아이가 아파서요. 그렇게 말하고 나면 항상 어디가 허전해서 뭔가 더 얘기하고 싶지만 참곤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제야 쓸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지난 2년, 나는 충분히 울며 괴로워했고, 덕분에 많이 단단해졌으니까. 적어도 말하는 동안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이진 않으니까. 아픈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 또 동정받고 위로받아 마땅한 일인지를 쓰고 싶진 않다. 스스로를 슬픔의 늪으로 밀어 버리는 그런 종류의 서사를 떠올리면 구역질이 난다. 그건 마치 ‘당신들은 다시는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다’ 고 말하는 사형선고와도 같다. 내 슬픔이 그저 ‘불쌍해서 불행해진, 그래서 다시는 행복하지 못했던 어느 가족의 이야기’로 요약되길 나는 바라지 않는다.


  마음에 닿았던 여러 위로의  , 나의 쌍둥이  이기종이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아픈 아이를 키워도 행복할  있다는 . 너도 충분히 행복할  있다는  말이 나를 바닥에서 구했다. 그래 우리도 행복할  있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아픈 재이와 함께 헤쳐나갈 우리의 삶은 분명 불편한 구석이 있어, 아마 행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조금 더 애써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애쓴다’는 말이 주는 어감을 좋아한다. 애쓴다는 말은 온 마음으로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힘을 낸다는 의미니까. 좋은 대학에 가려고, 돈을 더 많이 벌려고, 더 좋은 삶을 살려고 끝도 없이 노력하는 세상에서 행복 역시 어쩌면 애초부터 애써서 성취해 내야 할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행복에도 노력이 필요하단 말이 조금 슬플 수는 있어도 그 안엔 적어도 힘쓰면 분명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내가 매일 밤 앓던 그 희망 말이다. 게다가 자꾸 들여다보면 좀 귀엽게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다. 행복하기 위해 애쓴다니. 재이가 하루하루 더 크려고 애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처럼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니 아직 쓰이지 않은 나의  제목은 ‘애쓰는 행복으로 하려 한다. 그리고  글은  책의 서문이  것이다. 언젠가 만약에 나의 책이 완성된다면 모든 종류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행복하기 위해 조금  애쓰는 사람들이  책을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세상엔 조금 불공평하긴 해도  애써야 하는 행복도 있다고.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것이 당신이 행복할  없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그런 말을 재이와 유현이,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일상을 통해 보여주고 증명하고 싶은 것이 지금의  작은 바람이다.


 부디, 우리의 소중한 일상과 그 사이사이에 놓인 작지만 빈틈없는 행복을 알아차려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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