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닿는 대로 걸으며 흘러가는 대로 생각하기
글을 쓰는 기간에는 다른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지금 쓰고 있는 작품만 생각한다. 대충, 다른 모든 일은 대충 한다. 옷도 대충, 밥도 대충, 샤워는 필요할 때만. 개업한지 두 달이 넘도록 친구의 가게에도 가보지 못했다.
코로나 19가 한창일 때도 그런 기간이어서 어차피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거리두기에 지친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난 맨날 그렇게 있었는데, 내 심정을 이해하실 수 있나요?
보통 작품을 쓰고 나면 한 달 정도는 멍하게 있게 된다.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여행을 간다. 친구가 있는 베트남을 가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갈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방역에 성공했다고 판단한 정부 지침이 생활 속 거리두기로 변경되었을 때 짧은 국내 여행을 떠났다. 외부에서 온 내가 혹시 모를 잠재적 감염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마스크는 절대 벗지 않고, 사람이 없는 시간에만 식당을 가고 카페를 갔다.
4월 말에서 5월초로 달이 바뀌는 날짜에 떠난 여행이어서 4월 마지막 날에는 세월호에 다녀오고, 5월 첫 날에는 5.18 기념공원에 갔다. 잔디밭에서는 강아지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무선조종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아지는 자동차가 다가오면 왕왕 짖었고, 멀어지면 뒤쫓아갔다. 사람을 지키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자동차를 조종하는 사람도, 강아지를 데리고 온 사람도, 모두 즐겁게 놀았다. 공원 지하에는 추모자들을 기리는 공간이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서늘한 기운이 확 끼쳐왔다.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읽어보았다. 빈 칸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추웠다. 부러 에어컨을 틀어도 이렇게까지 서늘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여전히 강아지와 자동차가 뛰어놀고 있었다.
구례에서는 아무도 찾지 않는 가장 뜨거운 시간에 둘레길을 걸었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4시간을 걸을 수 있었다. 남원을 거쳐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한 승객이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 운전사님이 약간 언성을 높였다. 요즘에는 이거 써야해요, 꼭 써요.
서울에 돌아와서도 산책은 계속 된다. 생각이 너무 많거나 생각이 잘 안 날 때마다 뛰쳐나가는 장충단 공원,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그 앞의 재개발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동네의 골목골목길, 그 사이를 샅샅이 누비는 것이 나에게는 글을 쓰는 일 외에 또다른 직업인 것 같다. 어느 집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비눗방울이 잘 불어지지 않는 여자아이를 보고, 태권도 학원 차량에 올라타는 형제를 보고, 손님이 아무도 없는 카페 앞을 지나가고, 지나가는 여자의 손에 들린 쥬스를 보고 나도 따라 쥬스를 사마신다. 있던 건물은 허물어지고, 새로운 건물엔 새로운 가게가 생기고, 거대한 이삿짐 트럭이 골목을 막고 있다.
걷는 산책에 지쳐서 자전거를 타고 싶어졌다. 서울로 이사를 온지 일 년 반만에 처음으로 따릉이를 빌려보았다. 앱을 깔고 결제를 하고, 대여소를 찾아서 남아있던 마지막 한 대의 QR코드를 찍고, 잠금장치를 풀고, 그러고도 삼 년 만에 타는 자전거가 무서워서 십 분 정도를 끌고 넓은 공터가 나오고 나서야 자전거에 올라탔다.
따릉이는 무겁다. 이전에 탔던 자전거는 20인치 접이식 벨로 자전거여서 15kg밖에 나가지 않았는데, 따릉이는 체감으로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천천히 페달을 밟아본 후에야 용기가 생겨 다시 한강으로 따릉이를 끌고 갔다.
코로나 19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한강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잔디에 텐트를 치고, 작은 식탁과 작은 의자를 차려놓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덤블링을 하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버스킹을 하는 사람과 그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있었고, 가끔 쓰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둔치에는 서핑 클럽이 있어서, 그 주변의 강물은 색색깔의 윈드서핑보드가 떠다녔다.
서핑보드를 타는 사람들을 보며 친구를 떠올린다. 저건 내 친구 ㅇㅇ이와 잘 어울리는 스포츠겠구나, 물도 있고 바람도 있고, 패션도 있으니. 텐트 앞에서 치킨을 먹는 사람들을 보며 또다른 친구를 떠올린다. 저기서 ㅇㅇ이와 맛있는 것을 시켜 먹고 앉아 있으면 참 좋겠다. 그럼 서핑보드를 타는 ㅇㅇ이를 구경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곁엔 아무도 없고, 난 홀로 따릉이를 탄다.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는 허벅지에 강한 자극을 준다.
천천히 자전거를 타면 수많은 자전거들이 나를 스쳐지나간다. 일렬로 줄지어 일정한 속도로 헬멧과 복장을 갖춰입은 무리가 몇 번이고 추월해간다. 나는 익숙하지 않은 무거운 자전거에 높이가 맞지 않는 안장에 앉아서 슬슬 페달을 돌린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를 할아버지가 밀며 벤치에 앉는다. 나도 옆에 앉아 땀을 닦고 물을 마신다. 오르막길이 끝나고 내리막길이 남아있었다.
반 년동안 쓴 책이 무엇이었는지 그제서야 생각한다. 반 년동안 내가 써낸 것은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모든 원고를 끝내고 한 달이 지나서야 생각한다. 쓸 때는 모른다. 모든 것이 내 손을 떠나고 나서야, 반 년동안 나를 지배해온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성곽길을 따라 산책을 하다가 고양이를 만났다.
두 마리 고양이는 나란히 성벽의 구멍에 앉아 있었다. 고양이들은 도망가지 않고 멋진 장면을 찍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벤치가 나와서 가방을 내려놓고 스트레칭을 했다. 이것이 나의 또다른 직업임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