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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담 Jun 26. 2016

홍상수와 김민희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다음 날 출근하는 친구를 술자리에 불러 낼 비책(祕策)을 열 가지쯤 알고 있다. 내가 이 비책들을 익히게 된 것은, 한 잔 기울이다 보면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오늘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라 할 수 있겠다.


술 먹자


일요일 밤 11시쯤 메시지를 보내면 돌아오는 첫마디는 대개 “나 내일 출근.


바로 이럴 때 이 비책 중 두어 가지를 쓰면 머지않아 그 친구는 내 건너편에 와 앉아있게 된다. 그러다 다음 날 친구를 회사에 지각시킨 일도 있다. 심지어 당일 월차를 쓰게 한 경우도 있었는데, 뭐 잘했다는 건 아니다.


일요일 밤 11시


자, 어쨌든 그래서 다음 날 친구가 정시에 출근하지 못했을 때, 내 입장에서 드는 감정은 극심한 미안함이다. 미안한 동시에 고맙고 고마운 동시에 죄스럽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친구가 결코 내 탓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술자리에 와 앉아 있던 게 스스로의 선택이었음을 내 친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물며 친구 회사의 사장님이 비난의 화살을 내 친구가 아닌 나에게 돌리는 경우? 그런 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될 일이다.


정시에 출근하기로 되어 있는 약속은 내 친구와 친구의 사장님 그 두 사람의 것. 내가 그 약속이 깨어진 데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갖는 것과는 별개로, 그 두 사람이 나를 직접적으로 원망하고 나설 명분 같은 건 없다. 그런데 이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누군가의 연애사와 결부되면 이상하리만치 일그러지곤 한다.



집돌이와 요부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의 스캔들을 보자. (그래, 바로 이 얘기를 꺼낼 셈이었다.) 자극적인 언론의 보도를 전부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홍 감독의 아내는 남편보다 외도 상대인 여성에게 훨씬 더 큰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걸로 보인다. 언론과 여론도 마찬가지. 십자포화는 온통 외도의 당사자가 아닌, 외도의 상대 여성에게 향해 있다. ‘딸 바보’에 ‘집돌이’였던 홍상수와 ‘요부(妖婦)’ 김민희. 참으로 기이한 풍경이 아닌가.


나는 홍상수 감독의 얼굴을 이번에 처음 보았다.


혼인이란 두 사람의 계약 관계다. 이런 표현이 다소 비정하게 들릴 지라도, 매우 철저하게 그렇다. 그 계약이 깨어진 데 대한 책임을 갖는 건 오직 부부 두 사람뿐. 외부에서 어떤 요인을 제공했든, 결국 혼인 파탄의 책임을 가지는 건 (한쪽이든 양쪽이든) 그 혼인의 당사자다.


남자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게 아니다. 바람이 났는데, 가정을 지키는 것이 본능을 따르는 것보다 덜 중요했기 때문에 집을 나간 것이다. 여기에 ‘그 여자가 무슨 요술(妖術)을 부리지 않았으면 그 착한 남자가 그럴 리 없었을 것’이라는 괴랄한 논리가 끼어들 여지가 어디에 있나.


물론 도의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외도 행위는 비판받을 여지를 가지고 있으나, 그런 경우에도 ‘외도의 상대방인 이’가 ‘혼인 관계를 깨고 나간 이’보다 더 큰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이 이상한 장면은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연예인이 얽힌 외도 스캔들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네이트 판’이랄지 ‘다음 미즈넷’이랄지 여성 중심의 커뮤니티에서 남편 혹은 연인의 외도에 관해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비난의 화살은 대개 상대 여성을 향해 있다.


그들 중 다수는 바람 난 남자를 꼬박꼬박 ‘남편’ 혹은 ‘남친’으로 칭하면서 상대 여성을 주로 ‘상간녀’나 ‘그 년’으로 칭한다. 그 사연들에는, 그 나쁜 년이 무슨 요술을 부리지 않았으면 내 남자가 이렇게 홱 미칠 일도 없었을 것이요, 내가 이 불행을 겪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라는 사고방식이 팽배히 깔려 있다. 댓글 반응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시 커뮤니티의 주적은 '상간녀'다.


상대 여성에게 불균형하게 쏠린 이 거센 비난의 장을 보고 있을 때, 내 목구멍에 차오르는 한 마디는 이렇다.


“언니들, 이거 정말 나만 불편해?” 


남자가 바람났을 때, 비난의 화살이 주로 상대 여성에게 꽂히는 건 여성인권의 참혹한 현주소를 보여준다. 상대 여성이 '남자 꼬여낸 년'으로 비하되어 여성인권이 낮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른 년이 꼬여내지만 않았으면, 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여인들 스스로의 인권이 참혹한 수준인 것이다.


‘어떤 여성이 내 남자를 유혹했다는 사실’은 ‘내 남자가 기꺼이 그 유혹에 넘어갔다는 사실’보다 더 중한 것인가? 당신 진심으로, 유혹에 넘어간 내 남자보다 유혹한 그 년이 더 미운 것인가? 당신은 남자에게 나와의 신뢰를 깨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디 어떤 요부가 내 남자를 꼬여내지 않기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이런 사고의 바탕에는 ‘남자는 유혹에 약하’든지 ‘여자가 꼬시면 남자는 당해 낼 재간이 없다’든지 하는 식의 그 똥내 나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옛날 옛적의 어르신들 가라사대,


바람 안 피는 남자 없단다, 용서해주어라, 참고 살아라.


그 사고방식을 있게 한 바로 그 전제인 것이다. 이네들에게 인권은 너무나 멀리 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나는 2016년을 사는 여인들이 부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참혹하게 대접하며 살지 않기를 바란다.


별은 아스라이 멀리 있다.

 

더 나아가 공직자도 아닌 그저 한 영화감독과 여배우의 스캔들이 며칠 째 나라를 떠들썩하게 뒤덮고 있는 상황 자체도 촌극은 촌극이다. 다시 말하지만, 두 사람의 외도에 분노할 ‘이유’가 있는 건 그 감독의 아내와 가족들 뿐이다.


도 사실을 숨긴 채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면 비판할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결혼 생활을 종결하지 않은 채 살림을 차렸다면 그 역시 비판할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새로운 사람이 좋아져 종전의 혼인을 종결하기로 한 개인의 결정이, 공히 모두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인 걸까. 그렇다면 애초에 우리에겐 이별할 자유 같은 것도 없어야 할 터인데, 그런 사회야말로 정말 무시무시한 사회인 게 아닌 걸까.


간통죄는 폐지되었으나 이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 옛날 누군가 “남자의 아랫도리에 대해선 언급하지 말라”고 했다지? ‘아랫도리 노터치’ 원칙이 ‘남자’에게만 해당된다는 듯한 발상은 좀 우습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 타인의 아랫도리에 관해 적당히 관심을 꺼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찬성이다.



내가 오지랖 부릴 자유는

내 아랫도리에서 시작해
타인의 아랫도리 앞에서 멈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디 잊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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