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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담 Jul 17. 2016

희롱이들에게 띄우는 편지

사회생활에서 희롱이가 되지 않는 방법

얼마 전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 놈으로부터 술 마시자는 연락이 왔다. 휘적휘적 나가 만났더니 얼굴에 수심이 그득하다. 회사일이 많이 힘드냐고 묻자 대뜸 회사에서 자기 별명이 뭔지 아냐고 되묻기에, 뭔데? 하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황망한 음성.


"희롱이래, 희롱이..."


친구가 '희롱이'가 된 사연은 이랬다. 여자 직원 중 한 명이 '썸남'에게 들은 발언이 희롱으로 느껴져 불쾌하다고 말했는데, 거기에 대고 "음, 저 같으면 더 야하게 말했을텐데 그 정도면 수위가 약한데요?" 했다는 거다. 그랬더니 그 여직원이 친구더러 “지금 그 말도 성희롱”이라고 했단다. 그게 어떻게 성희롱이 되느냐고 따지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직장 내 성희롱은 여성이 수치심을 느끼면 성립된다는 거 못 들으셨냐"는 말이 돌아왔다고 한다. 본인은 농담이었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항변했지만, 이미 친구는 회사 내에서 성희롱 발언을 일삼는 신입사원 '희롱이'가 된 후였다.


참으로 전형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성희롱이라는 지적을 받으면 ‘농담이었다’는 대꾸가 나온 뒤 ‘그게 왜 성희롱이냐’는 항변으로 이어지는 풍경을 우리는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사회에 나와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희롱을 고의로 하는 이들보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게 희롱인 줄도 모르는 이들이 훨씬 더 많더라. 나는 누군가 성희롱 발언을 할 때마다 “그거 성희롱에 해당합니다” 자주 지적하며 살아왔는데, 그럴 때 열에 아홉은 펄쩍 뛰는 반응을 보인다. 아저씨들은 특히 그렇다. 그런 반응이 놀라운 건 오히려 내 쪽이다. 이들은 정녕 이게 희롱인 줄도 모른다는 것인가?


그런 한편 생각해보면 그렇다. 원래 세상은 묘하게 기울어져 있다. 저울에 잰 듯 반듯한 사회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말 중에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문제가 되는, 그러나 무엇이 문제인 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런 발언들이 매우 많다. 그렇다면 희롱이 희롱인 줄도 모르고 희롱을 하는 사람들도, 어쩌면 이 불균형 세상의 공범인 동시에 피해자인 게 아닐까?


원래 ‘무지’란 용서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잘못인 줄 모르고 저지른 언행들로 자신도 모르는 새 사회생활에서 기피 대상이 되어버린 ‘희롱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한 것도 사실이다.


자신의 고추를 훌렁 꺼내 보이고 거기에 놀란 여자들의 반응을 즐기는 바바리맨마냥, 희롱에 괴로워하는 여성들의 반응을 즐기려고 그러는 이들이라면 그런 이들을 개도할 방법 같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정말 몰라서 그러는 이들이라면,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성희롱범으로 모는 것보다는 어떤 말이 어떤 이유에서 희롱이 되는지 설명해 주고 ‘다신 그러지 말거라’ 타이르는 편이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아름답게 만드는 길이 아닐까.


그래서 일러주려 한다. 이름하여 ‘사회생활에서 희롱이가 되지 않는 방법’. 누군가를 희롱할 마음일랑 추호도 없는 당신이라면, 이 글이 분명 좋은 지침이 될 것이다.




외모에 대해 평가하지 마라.


희롱이가 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지침은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외모나 인상 등에 대해 한두 마디 을 건네는 건 괜찮다. 오고 가는 칭찬 속에 따스한 정도 싹트는 법 아닌가. 미인이세요, 아름다우세요,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오랜만에 봤는데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따위의 말도 일절 건네면 안 된다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 한두 마디 너머에 있다.


인사말 정도에 그치지 않고 오버하는 부류가 꼭 있는데, 대표적인 건 칭찬을 넘어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려 드는 이들과, 외모에 대한 언급이 등장할 여지가 없는 곳에서도 끊임없이 외모에 대한 언급을 끌어들이는 이들이다.


일단 타인의 외모를 습관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주로 하는 말은 “예쁘다는 것도 문제가 되나요?”인데, 예쁘다는 것도 당연히 문제가 된다. 넌 어디는 예쁜데 어디는 아쉽다든지, 살만 빼면 참 예쁘겠다든지, 이런 걸 조금 손보면 완벽하겠다든지. 심지어 업무적인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때, 보고서를 제출했을 때, 출장을 다녀왔을 때에도 “예쁜 사람이 일까지 잘한다”는 식으로 맥락 없는 외모 발언을 끌어들이는 경우마저 있다.


당신 앞에 있는 그 여성은 일을 하러 일터에 나온 사회인이지 당신에게 외모 평점을 받기 위해 무대에 오른 미인대회 출전자가 아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사회생활하는 그녀가 당신에게 이런 같잖은 평가를 들어야 하나.


누군 어디가 예쁘고 누군 가슴이 크고 누군 엉덩이가 작고, 이런 걸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거야 어떻게 막겠냐마는, 이런 소릴 공공연히 입 밖으로 내는 건 무척 저열한 일이다. 무엇보다 크고 작은 걸 따질 겨를도 없이 바지만 입으면 보이지도 않는 물건을 가진 이들에게 여성들이 이런 평가를 일상적으로 들어야 하는 건가 생각하면, 진심으로 개탄스러운 마음이 되곤 한다.


한 번은 금융권에 근무하는 남자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일도 있다. 자신의 회사에 얼굴이 못생긴 여직원이 있는데, 그녀는 가슴이 몹시 커 여름이 되면 뭇 남성 사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 여직원에게 ‘계절주(특정 계절에 주가가 급변하는 주식들을 일컬음)’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말하며 그 남자는 낄낄 웃었다. 그 남자를 생각하면, 사시사철 내보일 것도 없는 고추를 가진 놈이 대체 뭐라는 거냐고 꾸짖어주지 못했던 게 지금도 못내 아쉽다.



사생활에 관심 갖지 말라

 

내 사생활에 관한 모든 걸 털어놓는 상대가 있다. 우리는 그걸 친구라 부른다. 당신은 아마 그녀의 친구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먼저 털어놓지 않는 그녀의 프라이빗한 부분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궁금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궁금하더라도 부디 속으로만 생각하라. 어제 뭐했는지, 주말에 뭐했는지, 놀러 갔다면 누구랑 놀러 갔는지, 남자친구는 있는지, 있다면 둘이 뽀뽀는 했는지 제발 묻지 마라. 피곤해 보여도 어젯밤에 잘 못 잤냐고 묻지 마라. 그냥 아무 의도 없이 혹은 선의로 묻기도 한다는 거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발화에서 말한 이의 의도보다 중요한 건 듣는 이의 감정이다. 그러니 당신에게 대답해주기 싫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질문이라면, 그냥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얘길 하면 남자들이 털어놓는 단골 고충이 있다. “주말 어떻게 보냈냐”는 정도의 질문도 안 되는 것이라니, 대체 어떤 걸 물으면 안 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것이다. 자, 방법을 알려주겠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 된다. 업무 외에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부모는 구존하신지, 형제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이런 질문들은 성희롱과의 관련성은 없지만 상대가 당신에게 별로 대답해주고 싶지 않은 질문이라는 측면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어떤 질문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할지 판별할 수 있는 능력, 우린 그걸 센스라고 부른다. 애석하게도 그런 센스를 가지지 못한 당신이라면 그냥 타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뉘앙스와 질문자에 따라 같은 질문이 기분좋게 들리기도 불쾌하게 들리기도 한다. "피곤해보이는데 어젯밤에 뭐하느라 늦게 잤어요?" 하는 질문도, 젠틀한 김과장이 하면 날 걱정해주는구나 싶지만 저속한 윤과장 놈이 하면 뭔 생각으로 이딴 걸 묻지? 싶은 법이다. 요컨대 김과장은 맞고 너는 틀리다. 그러니 왜 김과장이 할 땐 가만히 있고 내가 하니 성질내는 거냐고 억울해 할 필요도 없다. 본인 평소의 언행이 반듯했다면, 가벼운 질문을 두고 성희롱이라고 치부당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펄쩍 뛰지 마라 


실제 법정에서 내려지는 형량을 떠나, 어떤 사회에서나 가장 가혹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 게 바로 성 관련 범죄다. 같은 희롱도 앞에 ‘’ 한 글자가 붙으면 느낌이 달라진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이 자신의 발언이 ‘성희롱’이라고 지적받았을 때 그토록 펄펄 뛰는 것도 영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성희롱으로 지적받은 발언 앞에 펄쩍 뛰는 당신의 반응은, 사과 한 마디면 끝 일에서 당신을 영영 벗어나지 못하도록 옭아매는 늪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당신이 펄쩍 뛸수록 늪은 당신을 더 깊이 빠져들도록 한다.


성추행이나 성폭력과 달리 성희롱은 언어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충분히 사죄한다면 용서받을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여성이 성희롱을 겪었을 때 상대에게 1차적으로 요구하는 건 처벌이 아닌 사과다. 그러나 사과는커녕 상대가 되려 더 큰 소리를 치고 나올 때, 여성은 공식적인 대응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많은 남성들이 이에 대해 ‘그러면 성희롱을 안 했는데도 사과해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다시 말하지만 성희롱은 성추행이나 성폭력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강간의 경우 했느냐 안 했느냐 당신이 명백히 알고 있지만, 성희롱의 경우는 당신의 의도를 떠나 발생하기도 한다.


성희롱이 아니라 불쾌감이라고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당신은 살면서 당신이 의도치 않았음에도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는 발언을 한 일이 없었나? 상대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당신이 상대의 발언에 불쾌감을 느낀 일이 없었나? 있었을 것이다. 성희롱은 ‘성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발언이다. 당신의 의도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희롱 의도는 없었어”라고 말할 순 있겠으나, “난 성희롱 안 했어”라고 우기는 것은 그 자체로 몹시 미련한 일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신의 말에 상대가 기분 나빠한다면, 일단은 사과부터 하는 게 옳다. 희롱이니 아니니 따지기 전에 당신의 말본새가 상대를 불쾌하게 했다면, 우선은 그에 대해 사죄하는 것이 성숙한 인간의 대응이다. 학창 시절 가벼운 주먹다짐을 한 번이라도 해본 당신이라면, 말이든 주먹이든 그 펀치의 강도는 날린 쪽이 아닌 받은 쪽을 기준으로 측정되는 게 맞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너의 상식과 나의 상식은 다르다


지금 일본 오키나와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곳에서는 운전석이 오른쪽, 조수석이 왼쪽에 놓여있고 좌측통행이 기본이다. 와이퍼가 왼쪽, 깜빡이가 오른쪽이다.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이 좌우반전의 도로 체계가, 사흘 정도 운전했더니 놀랍게도 원래 해왔던 양 적응이 되더라. 인간은 10년 가까이 해오던 습관의 정반대에 놓인 것들도 사나흘이면 너끈히 적응해낼 수 있는 그런 동물인 모양이다.


운전석은 당연히 왼편에 놓여야 하고, 깜박이는 당연히 오른편에 있어야 하고.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기도 하고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걸 누군가는 삶의 규칙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는 그 당연한 진리를, 이곳 오키나와에서 다시금 깨닫는다.


어렸을 때는 '상식'이라는 게 형형히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언젠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인 걸 남에게 강요할 때 '상식'이라는 말을 즐겨 쓰곤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의 상식과 나의 상식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너의 것과 나의 것이 다를 수 있다는 지점에서 '상식'은 이미 상식이 아닌 것이 된다.


나는 오키나와의 푸른 바다에 '상식'이라는 그 낡은 것을 조금은 버리고 갈 생각이다. 내가 상식이라고 믿는 게 상식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앞으로는 더 열심히 의심하며 살아갈 작정이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얼마나 잘 비난하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얼마나 노력했는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국 땅에서 고국의 가련한 희롱이들에게 이 편지를 띄운다.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제 스노클링을 하러 가야 하니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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