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by 담마

실장의 가슴에는 명찰이 달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무실에 서 있는 15명 중에 실장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지수는 확신했다. 그의 뒤에 있는 벽에는 15명의 이름 순서대로 쓰인 커다란 화이트보드가 있었다.
“전국의 우리 회사 콜센터가 몇 개나 있는지 아십니까?” 그가 화이트보드를 팡팡 치면서 물었다.
지수는 물론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원들도 침묵하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15개입니다. 그중에서 우리는 2등을 했어요.” 실장이 사원들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뒤에서 2등이요. 뒤에서! 이게 말이 됩니까?”
지수는 재빨리 화이트보드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다행히 맨 아래는 아니었지만, 바닥에서 두 번째였다.
“김지영 씨?” 실장이 사원들 가슴에 붙은 명찰을 보면서 물었다. “김지영 씨!” 그는 인상을 잔뜩 쓰면서 다시 한번 물었다.
사원들은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맨 아래에 쓰인 ‘김지영’ 뒤에 ‘B’가 적혀 있었다.
“김지영 B!!”
마침내 ‘김지영 B가 손을 들었다. 거의 울기 직전의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다, 싶으면 빨리빨리 대답합시다, 좀!!”
“죄송합니다.”
“김지영 씨, 이게 뭡니까?” 실장이 다시 한번 화이트보드를 보고 말했다. “5년 차 아니에요? 2년 차, 3년 차보다 아래인 건 좀 쪽팔리지 않나? 그리고 한지수 씨.”
실장이 지수를 정확히 검지로 가리켰다. 그녀는 실장이 자기 얼굴은 기억한다는 것에 놀랐다. 하긴 달마다 자기 이름을 부르고, 면전에 대고 화를 내는데 그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병신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젠 화내기도 지겹다. 그래도 이번에 꼴찌는 면했네. 그게 그거지만.”
지수는 속으로 욕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욕은 팀장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욕이었다. 4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고작 ‘그게 그거’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된 자신에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지영을 봤다. 긴 콧날은 바닥을 항해 더 늘어난 것 같았다. 하얀 얼굴은 더욱 생기 없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지영의 방구석에 있던 수많은 약봉지를 떠올렸다.
“언니, 무슨 약이 이렇게 많아?”
“요즘에 지불량이 계속 꿈에 나와서 막 욕해. 그래서 잘 못 자. 자도 가끔씩 깨. 항우울제나 수면제, 뭐 그런 거.”
지불량. 지영은 둘이 있을 때 항상 실장이라는 호칭 대신 그의 별명을 불렀다. 본명은 지양호였지만, 양호한 구석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녀가 붙인 별명이다. 지수는 저 많은 알약이 지영의 가느다란 목을 통과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하지만 실장에게 그녀의 약봉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의 불면증도, 우울증도 다 핑계일 뿐이었다. 5년째 지영이 동명이인이라는 것도, 지영의 얼굴 생김새도 모르는 것처럼.
어느새 사무실의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를 본 실장은 뒷목을 긁으며 한숨을 깊게 쉬었다.
“오늘은 그냥 퇴근들 하고, 진짜, 좀, 열심히 합시다. 여러분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야. 나도, 뭐, 할 맛이라는 게 나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좀비처럼 축 처진 어깨로 퇴근하는 사람들을 스쳐 지나며 골목에 들어섰다. 주위에는 담배꽁초로 뒤덮인 아스팔트와 식당 환기구에서 나오는 연기밖에 없었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호흡기를 꺼내 물고 한숨을 내뱉었다. 고였던 숨이 터져 나오며 눈이 뜨거워졌다.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양파의 목소리가 그녀의 눈물을 막아 주고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온 그녀는 담배꽁초가 무성한 골목길을 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속으로 삼켰던 욕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냥 틀어진 수도꼭지처럼 흘러내렸다. 울음소리는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울음소리마저 삼킬수록 식도가 뚫리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기 집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집이 엄청 높아진 것 같았다.
‘난 바닥에서 두 번째인데.’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