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낭이 Jan 18. 2024

이 죽일 놈의 공돌이 마인드

새벽 6시에 잠이 드네

오늘 두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매달 sr.director에게 프로젝트 진행사항을 보고하는 발표준비 때문이었는데,

처음엔, 그냥 대충 준비하려고 했다.


직접 개발한 메모리 검증 툴을 돌린 결과를 단순히 나열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발표하는, 그야말로 10점 중에 4점 정도 되는 발표 수준으로 만족하려고 했다.


그런데, 

검증을 위해 돌렸던 4nm S사, T사 제품의 결과를 쭉 뽑고 나니,

기존에 인도 팀에서 정해놓은 검증 결과와 상이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결과가 A와 A'처럼 완전히 상반된 결과라면 차라리 이해가 쉬웠을 텐데,

문제가 있는 메모리가 특정 제품에서 일부의 경우에만 문제가 없는,

쉽게 말해 나 스스로가 이해와 납득이 안 되는 검증 결과였다.


그것이 발단이었다.

나는 결국, 나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내 검증 결과를 하나하나 layout database를 열어보며 

케이스 별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여러 예외 케이스들에 대한 일반화 작업을 했다.


사실 인도 팀은 지금까지 별다른 검증 tool이 없었다.

전체 메모리 중 (보통 칩 안에 SRAM 메모리가 많은 경우 10000개까지 들어간다)

지금까지 문제 된 case들을 기반으로, 

문제 된 메모리들의 naming으로 유추하여, 문제 케이스를 분류해 두었다.

그러다 보니, 실제 문제가 없는 경우가 문제 케이스로 분류되거나,

혹은 문제가 있는 경우인데도 네이밍으로 분류되지 않아 문제가 없는 케이스로 분류되곤 한 것이다.


그렇게 케이스를 정리하다 보니, 발표를 하기 위한 하나의 스토리가 만들어졌고,

단순히 사실 나열로 끝나려던 나의 발표는

그로 인한 수율 분석 impact 수치와 head count reduction에 대한 cost 수치를 도출해 내는,

뭔가 더 그럴듯한 발표자료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시간은 새벽 6시가 넘어가게 되었다.




발표가 마무리되고, sr.director의 okay 사인을 듣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발표 중간에 한숨을 한 번도 쉬지 않았다는 것에서,

무난하게 잘 흘러간 발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준비가 되어있는 회의이다 보니, 그 주변 principal engineer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쉽게 받아치거나, 혹은 모르더라도 다시 물어볼 수 있는 여유까지 생긴 것이다.


발표를 마치고, 한편으로는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이 정도 고생과 노력을 들여서 발표하는 것이 이곳에서의 default 기대 수준이구나'




어떤 일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건 나에게 정말로 장점이자 단점이다.

예전에는 이 결과의 끝을 볼 때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나만이 할 수 있는 나의 강점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어른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마추어가 되는 것이다.


매 달 이런 발표마다 밤을 새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공돌이 특성 탓에, 원하는 결과를 직접 보고, 

스스로 이해하고, 누군가를 설득시켰다는 사실이 기쁘다.


이런 게 엔지니어로서의 참 맛이 아닐까 싶다 ㅎㅎ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