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하기 위해, 지금 회사에 충실하기로 했다.

커리어 쌓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by 담낭이
그래서 네가 진짜 원하는 것은 뭐야?

"높은 연봉?"
"다른 분야로의 변경?"
"남들이 다 아는 유명한 빅테크 회사?"



이직 생각도 없던 내가 예상에도 없던 2번의 면접을 보고 나서,

나는 조금 더 나 자신과 솔직한 대화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정말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나는 정말 이직이 하고 싶었던 걸까?


가장 먼저 내가 나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일주일에 한 번씩 나 스스로와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스스로에게 궁금한 점을 적어두고,

누구도 보지 않을 테니 가장 솔직하게 대답해 보는 시간.


이러한 과정은 생각보다 더 나 스스로를 잘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에,

혹시나 본인이 이직 등 커리어에 고민이 있다면

꼭 혼자와의 솔직한 대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을 추천한다.


본인에 대해 확실하게 알게 되면,

그 이후에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성이 확실해지고,

방향성이 확실해지면 결국 언젠가는 그것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누군가는 이러한 과정을 비싼 돈 주고

커리어 코칭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와 진행한다고도 하더라.)


내가 나 스스로에게 물어봤던 질문들 중 몇 개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았다.


1. 높은 연봉, 하는 일, 회사 네임 벨류 셋 중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2. 현재 회사에 만족하는가? 만족하는 점은 무엇이고 만족하지 못하는 점은 무엇인가.

3. 현재 회사에서 어느 정도로 일을 하고 있는가? 만족할 만큼의 성취를 이뤄내고 있는가.

4.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점이 이 회사에서 만족스러워진다면 나는 계속 이 회사를 다닐 것인가?

5. 5년 후, 10년 후의 내 회사 생활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이길 바라는가?




내 스스로 가장 먼저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것은,

나는 현재 회사, 현재 팀에서 하는 일이 만족스러운가? 였다.


AMD에서 내가 하고 있는 Diagnosis 업무는,

전 세계적으로 경쟁해도 자신있을 정도로 익숙하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업무였다.


하지만 문제는,


따분했다.


주어지는 업무들이 그렇게 스스로에게 도전적이지 않았다.

2-3달어치 업무가 대부분 2-3주면 끝나는 일들이었다.


조직 자체가 근무시간을 많이 요구하지 않는 곳이었고,

흔히 말하는 워라벨이 좋은 곳이었다.

남는 시간은 가족을 위해 사용하거나 개인적인 취미 (유튜브 등)을 하기에

최적의 조직이었지만,

엔지니어로서 커리어를 쌓기에 도전적인 환경은 전혀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예전 삼성때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이라는 회사는 보통 매우 바쁜 곳이지만, 내가 있던 조직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조직이었다.


주도적인 위치가 될 수 없는, 지원을 주로 하는 조직.

억지로 근무시간을 늘리기 위해 퇴근하지 않는 사람들.

기를 쓰고 일해도 업적으로 인정받기 힘든 일들.

일을 열심히 하면 바보 취급하는 시선들.


나는 그런 부분들이 싫어서 미국으로 왔던게 아니었던가?


그렇게 여러번의 나와의 대화 끝에 나는 깨달았다.


나는 반도체 엔지니어로서 더 성장하고 싶다.
엔지니어로서 더 많은 challenge가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




그렇게 내 스스로에 대해 조금 더 알게된 후 내 스스로에게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가장 먼저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던 지점은 이것이었다.


나는 지금 회사에서, 내 팀에서 정말로 인정받을 만큼 잘 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현재 일이 귀찮아서, 입으로만 떠드는 그런 일개 엔지니어인건 아닌 건가?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하고있는 업무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하고 자신있는 분야다.

가장 자신있고 잘하는 분야인 이 팀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새로운 곳에 가더라도 똑같은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해야할 일은 너무나 명확했다.


최선을 다해 이 팀에서 인정받고 올해 좋은 평가를 받을것.



어떤 이유로 이직을 하든 하지 않든,

지금 회사에서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자.

이직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계속해서 이 팀에서 인정받는 엔지니어로 성장할 것이고

이직을 한다고 해도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다짐을 한 이후로 나는 정말로 회사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2번의 이직 면접을 보고 나서

현재 회사일에 더 집중하게 된 것이다.


먼저 내가 했던 것은 내 스스로의 visibility를 높이는 일이었다.


AMD는 매년 5월 NATS(North America Technical Showcase) 라는 이름의 행사를 진행하는데

북미 내 각 팀들이 모여 새로운 방법론을 논문화 하고, 발표하는 행사이다.

해당 행사는 무려 SVP 이상 급 사람들이 와서 참석하고 피드백을 주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온 우주가 내 마음을 읽었던 걸까?

나와의 대화를 마쳤던 그 즈음,

마침 매니저가 내가 새롭게 개발해오던 검증방법론으로 NATS에 참가해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나는 기쁜 마음으로 회사일과 함께 논문 작업을 병행했고,

사내 논문을 제출하여 운이 좋게 최후 8인의 presenter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AMD 내에서 각 분기마다 팀에서 실적이 좋은 사람들에게 주는

2025 Q3 Spotlight award를 받을 수 있었다.


회사와 조직에 충실하게 기여하여 실적을 내자고 다짐한 이후,

스스로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가시적인 성과를 처음으로 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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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업무에 적극적이게 되다 보니, 점점 주어지는 일도 늘어나게 되었다.


NATS 참석 이후

내가 DFT 설계 지식도 가지고 있는 박사 인력이라는 것을 깨달은 Senior director는

나에게 반도체의 pre silicon 설계팀과의 미팅, 그와 관련된 업무에도 점점 일을 할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또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AMD 내 가장 중요한 제품의 검증 일정이 다가오면서 그 제품에 들어간,

현재 DFT 분야에서 가장 핫한 기술인 SSN이라는 기술에 대해

Senior director가 매우 관심을 보였고,


나에게 혹시 이 기술에 대해

본인을 포함한, DFT를 모르는 팀 내 팀원들에게 세미나 해줄 수 있냐는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 당시 그 기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SSN이라는 이름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DFT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누가 억지로 시킨 일도 아니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저 시작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이유는 명확했다.

이직을 하던 하지 않던 DFT 분야 특히 SSN이라는 신기술에 대해 알고 있으면

내 업무에 무조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업무시간 이외에도 퇴근 후에 따로 공부를 하게 되었고,

완벽하진 않았지만 팀 내 세미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면서,

'post silicon 검증도 하면서, pre silicon 설계도 할 줄 아는 엔지니어'

로 포지셔닝을 해나가게 되었다.


그랬다.


그토록 원했던 "인정받고 싶은 일과, 도전적인 업무"를 할 수 있는 곳은

사실 지금 조직일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삼성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불만이었던

'주도적인 위치가 될 수 없는, 지원을 주로 하는 조직'에 근무하는 나는,

사실은 그 방법을 몰랐던 게 아닐까?


주어지는 일만 하면서 지원 조직이라고 한탄할 시간에

스스로 찾아다니면서 일을 만들어 내면 될 일이었다.

불만과 고민이 있었다면

당시 조직장이었던 선배에게 찾아가서 같이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남들처럼 똑같이 하면서 남들과는 다르길 바라는,

어쩌면 그 당시 불만만 하던 내가 문제가 아니었을까?


내가 속한 조직이 문제가 아니라

내 태도와 의지의 문제일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아이러니하게도,

우연히 찾아왔던 두 번의 빅테크 면접 실패 경험은

나로 하여금 내 자신을 더 깊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고,

무척이나 오만하고 한심했던 나에게 결과적으로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




SSN 기술 팀 세미나 이후에도 나는 DFT 설계 관련 공부를 계속 따로 진행을 했다.

어차피 나에게 필요한 공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정도 공부가 진행되던 즈음에는

정말 진지하게 DFT 설계 분야로 업무를 변경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되었다.


이전 브로드컴 면접때 그냥 주절주절 떠들었던 내 이직 사유,


'현재 post silicon 지식을 바탕으로

DFT 설계 커리어를 쌓으면 앞으로 10년 후엔 제 커리어가 더 단단해 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때는 되는대로 떠드느라 지어냈던 말이었지만,

사실 실제로 업무를 경험하면서 피부로 느끼게 된 점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바쁜 미팅 후에 잠시 보내는 커피 시간이었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던 도중,

같이 미팅에 참석했던 유관부서의 매니저가

본인의 팀에서 DFT 엔지니어를 새로 하이어링 하려는 계획이 있다는 게 아닌가?


그래.

분야 변경은 꼭 이직만이 답이 아니지.

오히려 회사 내에서 이렇게 분야 변경을 하면,

지금까지 내가 이 조직에서 쌓아놓은 여러 평판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업무 측면에서도 훨씬 유리할거야.


그런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마치 삼성 시절,

미국 퀄컴으로 면접을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만큼의 설레임, 그것이었다.


헐레벌떡 커피타임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당신과 제 커리어 관련하여 1 on 1 미팅을 하고 싶습니다.'




사실 이 하이어링 매니저와 나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었다.

그는 올해 5월 NATS에 논문 발표하던 당시 나를 심사하던 심사위원이었고,

SSN 기술 관련 팀 세미나를 할 때도

특별히 참석해서 나에게 여러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우연인가.

그때 그저 가만히 있었으면

NATS에 참석하지도, SSN 관련 세미나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겠지.


뭐라도 하기 위해 발버둥 쳤던 그 순간들이

결과적으로 나에게 새로운 가능성 있는 기회의 조각이 되어 준 것이다.


내가 만났던 이 분이라면,

나의 커리어 고민에 대해 진심으로 같이 들어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온 답변


"그래요, xx 날 시간이 괜찮은데 잠깐 30분 정도 이야기 하시죠"


그렇게 흥분되는 마음을 안고 나는,

혼자 잠시 자리에 앉아서 정말 진지하게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

지금 조직도 마음에 들지만,

내 5년, 10년 후를 생각한다면

역시 DFT 설계 엔지니어로 옮기는게 가장 좋은 선택일거야'


'AMD 내에서 또 새롭게 많은 것을 배우고 나면 나중에 더 좋은 기회들을 잡을 수 있겠지...!'


그때 갑자기 핸드폰으로 울리는 알림,


'띠리링'


어디선가,


본듯한,


묘한 기시감이 있는

링크드인 메세지 한통이었다.



너 혹시 이 포지션에 관심있어?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부터 온 메세지였다.


게다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회사 소개 문구.


나는 리쿠르터에게 어느 회사인지 물어보았고,

그 리쿠르터는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응 여기는 브로드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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