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냄과 숨김이 만드는 공간의 질서
공간에 분위기에 예민하게 반응하다 보니,
편안하고 에너지를 받는 듯한 공간과
어수선해 에너지를 빼앗기는 공간의 차이를 관찰하게 되었다.
사람이 많고 물건이 많아도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 있는 반면,
그리 복잡하지 않아도 유독 피곤하게 만드는 공간도 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관찰 끝에 한 가지 조건을 발견했다.
좋은 공간은 시선을 둘 곳과 배경으로 물러날 곳을 분명히 구분한다는 점이다.
자칫하면 어수선해질 수 있는 공간도
강조될 구조를 명확히 세우는 순간 살아난다.
전체를 잡아주는 큰 틀에 주의가 먼저 가도록 설계되어 있고,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소란은 실제보다 덜 부각되도록 조정되어 있다.
반면 어수선한 공간은
드러낼 것과 감출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동시에 드러나 있거나,
혹은 모두가 밋밋하게 숨겨져 중심이 없다.
예를 들어, 방음을 처리한다고 하면서
화이트 노이즈까지 제거해 버린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는 작은 기침 소리나 과자 봉지를 뜯는 소리가
필터 없이 또렷하게 부각된다.
소리가 드러나야 할 맥락이 아닌데도
주의를 강제로 끌어당긴다.
안정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선이 머물 ‘아름다운 구조’를 먼저 세워야 한다.
넓은 공간이라면 분위기를 잡아주는 큰 가구나 책장을 두고,
조명으로 강조할 부분과 배경으로 남길 부분을 나눈다.
공간의 톤이 일정 범위 안에 머물면
신경계는 분산되지 않고 통합된 정보로 인식하며 안정감을 느낀다.
강남 교보문고를 떠올려 본다.
전체 구조를 잡아주는 큰 갈색 책장과
톤을 맞춘 바닥이 시각적 분산을 줄여 준다.
노란 조명은 사람과 책장을 부드럽게 비추며
시선이 머물 곳을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이처럼 드러냄과 숨김이 적절히 조율된 공간은
사람의 주의를 함부로 빼앗지 않는다.
주의를 둘 곳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 준다.
카페에서 노란 불빛이
집중하는 자리를 감싸듯 비출 때,
우리는 외부 자극에 끌려가지 않고
보고 있는 일이나 공간 자체에 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
주의를 빼앗지 않는 공간은
인지 에너지의 소모를 줄인다.
어수선함에 낭비되는 에너지가 줄어들고,
원하는 곳에 집중하는 데 드는 노력도 덜해진다.
그 결과 피로감은 낮아지고 집중력은 높아진다.
어쩌면 좋은 공간이란
화려한 곳이 아니라,
우리의 주의를 함부로 끌어가지 않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숨길 것인가.
그 선택이 공간에 머무는 사람의 에너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이 원리는 공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발표와 보고서, 나아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드러냄과 숨김을 설계하며 서로의 주의를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