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이먼 Apr 12. 2021

사랑은 변한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

변화를 통해 온전해지는 사랑.

 우리나라의 로맨스 영화 중 가장 유명한 대사를 하나 꼽자면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는 대사일 것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 에서 처음 사랑을 시작한 ‘상우’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는 이리도 완고한 사랑인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인 ‘은수’가 쉽게 마음을 바꾸는 것을 보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변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은 대상이 변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유가 변하기도 하면서 본질을 잃지 않고 유지해나간다. 이름을 수시로 바꿔가면서 말이다.


출처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방학 동안 엘리오의 아버지인 펄먼 교수의 조교로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오게 된 올리버는 엘리오가 지내던 방에서 지내게 된다. 이 때 엘리오는 '제 방은 이제 당신 방이에요.' 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변모해갈지를 암시한다. 엘리오는 올리버를 동경하는 동시에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엘리오는 곧 있으면 떠나게 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마음을 쏟아붓게 된다. 영화는 계속해서 변화를 통해 온전해지는 것들에 대한 대화가 오간다. 올리버와 펄먼 교수가 살구의 어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그렇다. 그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다른 의견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수많은 흐름 속에서 어떻게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논의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사랑 또한 그러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그 삶의 흐름 속에서 사랑이 누구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엘리오가 기타로 연주하는 바흐의 곡을 들은 올리버는 그 곡이 너무 좋다고 말하자, 피아노곡으로 들려주겠다며 올리버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간다. 엘리오는 같은 곡을 계속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며 원곡을 들려주지 않다가 끝내 올리버가 원하는 곡을 연주하는데, 이때 엘리오는 '이 곡은 어떤게 원곡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바흐는 기타로 연주한 적 없어요.' 라고 한다. 결국 그것은 자신이 엘리오에게 들려주고 싶은 방식으로 그것을 변화시켜 연주했다는 것이다. 엘리오는 이 곡이 바흐가 그의 형을 위해 바친 곡이라고 말한다. 즉, 엘리오는 자신과 바흐를 동일시하며 그 곡을 올리버에게 바친 것이다. 엘리오는 방에 돌아와 일기장에 '바흐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고 물었던 건, 사실 나를 싫어하는줄 알았다고 물었던 것이다.' 라고 적는다. 다시 말하면 그 순간 엘리오는 스스로를 바흐와 동일시하여 그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같은 곡을 다른 방식으로 연주해서 올리버에게 들려주었지만, 결국 그것은 모두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출처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엘리오는 우연히 올리버가 읽던 책, <우주의 파편>(저자 헤라클레이토스)를 발견한다. 그가 메모해둔 페이지를 살펴보니 이런 구절이 있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어떤 것들은 오직 변화함으로써 같은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올리버가 이 부분을 표시해둔 이유는 자신의 감정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그는 처음 엘리오의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할 때, 그 전날 오전부터 여독을 푸느라 잠만 잤던 그는 허겁지겁 달걀 하나를 먹는다. 엘리오의 어머니가 더 먹으라고 권유하자, 자신은 한 번 시작하면 남들이 멈추라 해도 그러지 못한다고 말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올리버는 사랑에도 동일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엘리오와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려 노력했었다. 왜냐하면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엘리오에 대한 감정이 더 깊어지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강하게 엘리오를 원하게 된다. 영화 종반부에 나오지만 그는 오래된 연인이 있는 상태였고 그와 약혼을 하게 된다. 그러니 올리버에게 이탈리아에서의 사랑은 그의 삶을 분명히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결혼을 하더라도 엘리오와의 사랑은 이미 그의 삶에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이미 그 변화된 강물에 발을 담구고 있기 때문에 올리버의 삶은 그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엘리오의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 아마 엘리오는 올리버 이전에 동성애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후반부에 펄먼 교수가 엘리오에게 하는 말을 보면 대충 예상할 수 있고, 원작에서도 그 전에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은 있으나 올리버와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오에게도 올리버와의 사랑은 앞으로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마치 계속 흘러 같은 물이 같은 곳에 한 번도 흐른 적이 없는 강물처럼.


출처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 영화는 끊임없이 현재를 찬양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몸과 마음, 태도, 느낌, 그리고 사랑, 더 나아가 오늘 자체를 동경한다. 따사롭고 아름다운 미쟝셴은 보란 듯이 엘리오의 사랑을 축복하고 있다. 비가 와서 정전이 된 어느 날, 엘리오의 엄마는 <헵타메론> 이라는 책을 읽어준다. 엄마는 이탈리아인인데 독일어로 된 그 책을 영어로 번역해서 읽어준다. (그 책을 엘리오와 남편에게 읽어주기 위해 총 두 번을 번역한 것이다. 이 또한 변화를 해도 그 본질이 변하지 않음, 또는 더욱 완고해짐을 암시한다.) 그 책에는 공주에게 사랑에 빠진 기사가 '말할까?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까?' (‘Is it better to speak or to die?’) 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엘리오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엘리오는 그 뒤 시퀀스에서 바로 올리버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두 시퀀스 사이의 공백에서 엘리오는 죽음 대신 말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현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햇살이 따사롭게 빛나는 이 순간, 바로 지금을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엘리오는 올리버와의 그 짧고 강렬했던 몇 주를 로마 여행으로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이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듯이 말하며 엘리오에게 따뜻한 조언을 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만들다니 그런 낭비가 어디있니?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이 단 한 번 주어지지. 마음은 갈수록 닳고 몸도 똑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다가오는 사람이 없어져. 지금 너의 그 슬픔, 그 괴로움을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즉, 지금 이 순간의 아픔마저 끌어안고 그 감정까지 충분히 느끼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아프다고 무디게 만들지도 말고 그것을 잊으려 하지도 말고 충분히 느끼고 아파하며 현재의 모든 것을 느끼며 이 순간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앞으로의 삶을 위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올리버는 엘리오와의 아름다운 사랑을 나눈 후, 서로를 서로의 이름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을 동경하는 동시에 그 사람의 생각부터 행동까지 모든 것이 궁금해진다. 그렇게 나 스스로가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하고 사랑의 과정에서 서로를 닮아간다. 즉, 사랑이란 자신과 상대방과의 경계가 무뎌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서로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경지에 오른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랑도 끝내 다른 길을 걷는다. 올리버는 미국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게 되고, 엘리오는 타오르는 불빛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결국 엘리오는 몸에 여전히 올리버의 생각, 경험, 느낌이 남아 있지만 더는 ‘올리버’라고 불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외력에 의해 다시 엘리오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엄마가 뒤에서 여러 번 엘리오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 한참이 되어서야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엘리오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엘리오는 사랑의 변화를 받아들인다. 엘리오는 앞으로도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엘리오는 사랑이 진부하다고 느끼거나 마음이 닳아서 무뎌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 변화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아픈지, 그리고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