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약속

평생 지워나가야 할 낡은 수첩 속의 약속

by 담우


해바라기_영화_2006_강석범_감독_김래원_주연.jpg 영화 '해바라기'/2006/강석범 감독/김래원, 한혜숙, 서지혜 출연


문득 영화 '해바라기'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갑니다.

새 삶을 결심한 주인공이 낡고 작은 수첩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꾹꾹 눌러 적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하나하나 실행할 때마다 붉은 줄을 그어가며 짓던 그 엷고 따스한 미소. 그 미소는 단순한 성취감이 아니라,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깊은 안도감이었습니다.

어제, 저에게도 그 낡은 수첩 한 페이지를 붉은 줄로 긋는, 가슴 벅찬 순간이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 제 가슴은 언제나 붉은 열정으로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에 서툴게 저항하며, 때로는 엇나간 방향으로 치닫던 그 시절의 저를 묵묵히 품어 주신 분이 계십니다. 교수라는 벽을 넘어,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방황하는 제 영혼을 다독여 주셨던 은사님.


무려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강산이 두 번하고도 반이나 바뀌는 시간. 그러나 팔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여전히 단아한 기품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주름진 손으로 제 손을 잡아주시며 건넨 눈빛은 25년 전 강의실에서 보여주셨던 그 따뜻함 그대로였습니다.

심지어 저는 까맣게 잊고 지냈던 저의 철없던 시절 일화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자네가 그랬었지..."

그 말씀 한마디에, 25년의 시간은 순식간에 증발하고, 저는 다시 철없지만 뜨거웠던 청년이 되어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했습니다.


그 소박한 자리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노교수님은 굳이 말씀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걸어오신 삶의 궤적 그 자체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가치의 삶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세월의 무게 앞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단아함, 제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기억하는 세심함, 그리고 팔순의 나이에도 잃지 않은 맑은 영혼. 그것은 그 어떤 명예나 부보다 빛나는, 잘 익은 인생의 향기였습니다.


사실 저는 제 안에 억눌러 놓았던 오만과 관성의 유혹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익숙함에 안주하려 하고, 타성을 합리화하려던 찰나였습니다. 그러나 은사님과의 만남은 흐트러지려던 저의 마음을 다시 단단히 동여매는 죽비와도 같았습니다.


나의 소중한 삶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25년 전 교수님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셨던 그 넓은 품처럼, 이제는 저 또한 나만의 방식과 경험, 그리고 축적된 시간으로 타인에게 나눔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제가 낡은 수첩에 적어놓고 평생 지워나가야 할 진정한 해바라기의 약속임을 깨달았습니다.


돌아오는 길,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저는 마음속 수첩에 새로운 다짐 하나를 적어 넣었습니다.


'훗날 누군가가 나를 떠올렸을 때, 나 또한 그들에게 따뜻한 품으로 기억되기를.'


그 다짐 위에 붉은 줄을 긋는 날까지, 저는 다시 묵묵히, 그러나 뜨겁게 저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작가의 노트]


기억의 서랍 깊은 곳, 10여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낡은 글을 조심스레 꺼내 보았습니다.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고, 투박했던 그 시절의 진심에 지금의 시선을 더해 다시 문장을 매만졌습니다. 세월은 흘렀어도 스승님을 향한 존경과 그날의 따스한 온기는 여전합니다. 과거에서 소환한 이 기록이, 오늘을 사는 당신의 마음에도 잔잔한 울림으로 닿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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