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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에스더 Jun 24. 2022

잠자지 않고 징징거리는 애를 두고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나를 지켜주는 방법




‘이러다가는 내가 더 폭발하겠어.’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도저히 안 되겠다. 자꾸 징징거리며 잠도 자지 않는 애와 이렇게 있을 수 없다. 함께 있지 못하겠다. 내 인내심의 한계다. 



결국 나는 두 애를 깜깜한 방에 놔두고 문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곧장 거실 매트에 가서 드러누웠다.




“으앙!!!!!! 엄마!!!!!!!”






 둘째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누운 채로 깊은 심호흡을 몇 번 했다. 내 귀에 격하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어려웠다. 잘되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귀에서 마음으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아이가 엄마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끼면 어쩌지?








 나는 우는 애를 방에 두고 오면서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누군가에게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생존모드로 바꾸고 행동하게 만들었던 가장 강력한 감정이다.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건강하게 화를 내지 못했다. 그러면서 친정엄마부터 가까운 사람들의 감정을 받아주기만 하는 쓰레기통의 역할을 해왔다.



 처음은 내가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서 화가 났다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버림받았다고 느끼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같이 있으면 내가 심하게 폭발할 것 같아서 문을 박차고 나왔지만, 어두운 방에 우는 애를 놔두고 왔다는 게 버림받았다고 느낄까봐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나는 심호흡을 몇번 더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까보다는 내 상태가 더 낫다. 애를 집어 던져버리고 싶다는 마음의 불은 꺼졌으니까. 분노의 게이지가 빠르게 상승할 때는 자리를 떠나는 게 더 낫다. 











 유독 내 감정이 잘 조절되지 않는 걸 강하게 느끼는 순간이 있다. 이때는 우선 계속 붙어있는 것보다는 짧은 시간이라도 공간부터 분리하는 것도 괜찮다. 징징거리는 아이가 내 눈에 안 보여야 이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틈이 생긴다.


 내 머리에 켜진 분노의 빨간 불부터 꺼줄 수 있다. 안 그러면 이성을 놔버리고 폭발하기에 딱 좋다. 그동안 잠자지 않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여러 날을 수도없이 반복해왔다. 


 그래서 잘 알고 있다. 자칫하면 아이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좋은 것인지를 가르치기보다는 엄마의 격해진 감정을 쏟아내는 시간으로 바뀌기 쉽다는 것을 말이다. 전혀 필터링 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은 상태로 막말을 내뱉는다. 




 내가 격해지기 제일 쉬운 시간, 내 인내심의 역치가 낮은 시간이 있다. 바로 잠자려고 누운 때이다. 이성이 도통 말을 잘 안 듣는다. 아이들은 금방 잠들면 좋으련만. 바로 잠들지 않는다. 나만 꿈나라로 향하고 있다.



"엄마 잠이 안와요."

"엄마 물 마시고 싶어요."

"엄마 안아주세요." 

"엄마 토닥토닥 해주세요."




 거기에 첫째 아이는 자꾸 내 옆으로 와서 꼼지락거린다. 자꾸 나를 친다. 오던 잠이 확 달아났다. 첫째 아이는 잘 때 누군가 몸을 가까이에 두는 것을 좋아한다. 그걸 더 편안해한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계속 되거나 둘째가 징징거리기 시작하면 못참겠다.




"엄마도 잠 좀 자자고!!!!” 






평소보다 더 격하게 화를 낸다. 그러면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런 순서를 수도 없이 반복해왔다.     



아이가 잠자지 않고 징징거리거나 나를 건드린다. ->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 참다 참다 폭발한다. -> 애한테 격한 말을 쏟아낸다. -> 애는 침울하게 잠든다 -> 잠이 오지 않는다 -> 아이에게 미안하다. 나 왜 이러니 자책 모드에 들어간다.

  


 밤에 내가 아이에게 했던 패턴을 보면 비슷하다. 진짜 잘 안 바뀐다. 계속 이렇게 갈 수는 없다. 내가 문제라고 느끼는 건 아이와 나에게 맞는 해결책을 찾으라는 신호다. 자꾸 나를 공격하는 이유가 되면 안 된다.

 


 여기에서 생각할 부분은 내가 바꿔야 할 것과 아이가 배워야 할 부분을 구별하기다. 내가 화난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하는 법을 연습의 장으로 만들 수 있다. 오히려 참다가 폭발해서 아이를 이성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채 쏟아낸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아이는 엄마의 감정 하수구가 되기 쉽다.

 






<부모와 아이 사이>에 우리가 화를 인정하고 분노를 건강하게 가라앉히는 세 가지 단계를 설명한다. 먼저 다음과 같은 진실을 말한다. 


첫째,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더러 화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둘째, 우리에게는 죄의식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화를 낼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셋째,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 한 가지를 제외하면, 우리에게는 감정을 표현할 자격이 있다. 아이의 인격이나 성격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분노의 감정을 표현해도 괜찮다.




이를 위해서 분노를 처리하는 세 단계는 다음과 같다.


1단계,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여서 이를 확인한다. 예를 들면 “나 기분 나빠”, “나 짜증 났어”라고 말한다.


2단계, 화를 좀 더 강하게 표현한다. “나 화났어!” “나 무척 화났어!”


3단계, 화가 난 까닭을 설명하고, 마음속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행동했으면 좋겠는지 아이에게 요구한다.




 나는 아이를 엄마의 화났을 때 정제되지 않은 말과 감정을 다 받아주는 쓰레기통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건 내가 그렇게 자라왔기에 너무나 잘 안다. 거기에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더해지면 오히려 그 사람의 마음을 맞추려고 너무 애쓰게 된다. 오히려 화가 났을 때 상대방에게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참으려고만 한다. 내가 화를 내면 다른 사람이 나를 버리고 갈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다. 아이에게 화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분노했을 때 아이에게 과하게 쏟아붓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표현하는 것을 연습한다. 내가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것을 건강하게 해보는 쪽으로 바꾸는 것에 집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해나가는 게 진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화를 내지 않겠다는 다짐은 쓸데없는 다짐을 하는 것보다 더 해롭다. 그것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분노를 태풍처럼, 삶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 


 <부모와 아이 사이>에 나오는 글이다. 내 감정은 내 몫이다. 아이의 행동이 나를 화나게 한다면 아이도 알아야 한다. 엄마는 무엇으로 화가 나는지를 말이다. 그게 아이의 존재때문이 아니라 아이의 말이나 행동으로 그렇다는 것을 구분해줄 필요가 있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나를 지켜주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연습한다. 분노하고 있는 나를 이해해주고 거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화난 감정을 아이에게 건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행동이다. 그래야 자책 모드에 빠지는 것으로 더이상 나를 공격하지 않을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서 같은 방식으로 화를 폭발하는 것을 무한반복하는 것도 끊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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