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도시의 말 (1)

by 다안
KakaoTalk_20240806_192809889_01.jpg


“그냥 좀 해.”

벤의 목소리에는 이미 짜증이 섞여 있었다. 빗소리가 귓등에 떨어져 작은 굴곡을 따라 흘러내린다. 제대로 붙들지 않으면 금세 잊힐 것처럼, 빠르고 조용하게.

“표현하라고. 말이 됐든, 글이 됐든. Expression helps to cope with your fear of undefined.”

“Non.”

나는 어릿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두통 대신 커피 찌꺼기만 누렇게 변색 된 잔의 심해로 가라앉는다.

“대체 왜?”

“그냥.”

덜 식은 커피를 부주의하게 삼키며 벤은 지적했다.

“Bullshit. It seems like you are somehow resisting your urge to express.”

“그렇게 말해봤자 못 알아들어.”

“And that is your problem, as always. You never listen to me at all. Though still, I’m here, trying to help you get over with this eccentric situation, you’re welcome!”

못마땅한 얼굴로 그가 한숨에 문장을 끝냈다. 어쩌면 여러 문장이었는데 그냥 명확한 구두점 없이 말한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에게는 빠르고 화난 투의 긴- 문장으로 들렸다. 불규칙하게 책상을 두드리는 손가락. 벌게진 귓불과 목덜미. 나는 그가 영어를 발음하는 방식을 사랑했다.


벤은 런던에서 왔다. 빅토리아 시대의 명탐정 셜록 홈즈와 그 친구이자 서기관 존 H. 왓슨 박사가 살았던 베이커 스트리트에서. 그 소개를 듣자마자 나는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수준의 콩글리시(그보다는 대체로 한국어인 문장에 간신히 끼워 넣은 기초 영단어 몇 개라고 하는 편이 옳겠지만)를 구사하며 아등바등 그에게 말을 붙여댔더랬지. 벤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Whatsoever, I prefer Mr. Lupin.”

“익스 큐즈 미?”

“난 뤼팽이 더 좋다고요. 홈즈는 지루해요.”

지루? 지루하다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적어도 30분은 논쟁을 벌였다. 나는 홈즈의 특출난 지성이야말로 다른 모든 재능을 압도하는 매력이며, 괴팍함이나 무심한 태도는 그가 갈고 닦은 뛰어난 자질로 인해 흠이 아닌 독특한 개성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했다. 뤼팽은 쇼맨십으로 잠깐 시선을 끌뿐, 사고 과정이나 행동 양식에 그만한 정교함이 없지 않은가.

벤은 뤼팽이 낭만적인 사람이라 좋다고 했다. 그처럼 위풍당당한 악당을 본 적이 있느냐고. 태도든 맵시든, 뭐가 되었든 아름다워서 나쁠 건 뭐겠냐고. 그리고 한국은 조금만 오래됐다 싶으면 뭐든 허물어버리고 그 위에 예쁘지도 않은 주제에 커다랗기만 한 것들을 쌓아 올린다며 불평했다.

“Anyway, 아름다운 시대였잖아요.”

“Belle époque?”

“Oui.”

그가 즐거운 표정으로 유리잔의 얼음을 굴리며 대답했다. 그 우아한 태도 덕분에 당연하게도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겠거니, 짐작했었지.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건 단순히 뤼팽이냐 홈즈냐의 문제만은 아니었는데, 벤이 무엇보다도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도시는 파리, 내가 지구상에서 가장 동경하는 장소는 런던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한 번도 파리에, 나는 런던에 발을 들여본 일이 없다. 치열한 갑론을박 끝에 우리가 극적으로 합의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 : 지나간 시간의 향을 품은 건물과 두 사람이 안아도 넘치는 둘레의 나무를 가만 내버려 두는 공간들도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해야지.

나야 잘 모르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벤이라는 이름은 아저씨들이나 쓰는 거였다. 그도 아주 젊지는 않았으나, 수 세기에 걸쳐 셀 수 없이 많은 남자아이에게 대물림되었던 자신의 이름보다는 그래도 어렸을 거다. 그는 촌스러운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을 좀 우스워했다. 그러나 벤의 어느 부분을 떼어놓고 봐도 배 나온 중년의 남자가 섞여 들어갈 구석은 없었다. 그는 말 그대로, 아저씨라는 단어와는 절대로 마주 볼 수 없고 한순간이라도 겹칠 일 없는 양극단에 서 있었다. 오히려 어떤 각도에서는 대여섯 먹은 여자애와 엇비슷했는데, 아주 기이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벤은 살아있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게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 거대하고 오래된 나무처럼 보였다. 두 명의 팔로도 모자랄 만큼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나무가 수백 년을 더 늙고 늙어, 마침내 석화처럼 확고해진 신비의 유적.


1.jpg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