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도시의 말 (16)

by 다안

한동안 벤은 연구에 열중했다. 종종 학계에서 중요히 다뤄지고 있는 논쟁거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신나게 떠들었는데, 내가 알아듣든가 말든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난해한 이론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했고.


그가 세 번째 연인을 내게 소개해준 건 은호와 헤어지고 반년 후, 유난히 빨리 더워졌던 올해 봄이었다.

물리학을 제외하고 벤이 가장 관심 있어 한 분야는 엉뚱하게도 미술이었다. 그는 고전이나 현대보다는 양차 세계대전 전후의 근대미술, 특히 회화 파였고, 추상화보다는 구상화를 좋아했다. 미술학도였던 수민과 헤어진 이후로 벤이 꽤 오랜 시간 그쪽에 관심을 아예 끄고 지냈기 때문에 나는 그때 즈음에 처음으로 그가 예술에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희연 씨는 여자였다. 벤과 나이가 엇비슷했고,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번 했었던 거로 기억한다. 화려한 외모는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가끔 생각이 났다. 굳이 예쁜 부분을 꼽자면, 날씬한 다리와 바른 자세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특별히 꾸미지 않은 듯한 수수함이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완벽해 보여서 신기했다.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유명 갤러리의 기획실장이라는 번듯한 직책도 특유의 빈틈없는 분위기에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나도 벤을 따라가봤는데, 굉장히 세련되었으며 조형적으로 보기 좋은 건물이었다. 희연 씨가 하얀 하이힐을 신고 그 건물 안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희연 씨는 이를테면 뉴욕 같은 여자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날카로운 마천루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한편, 온갖 익살맞은 그래피티로 오래된 벽돌 담벼락이 뒤덮여 있는 곳. 차갑고 세련된 오전과 왁자지껄한 소란의 지배를 받는 오후가 공존하는 곳. 희연 씨는 실제로 대학 시절과 그 이후의 몇 년을 뉴욕에서 보냈다고 했다.


그녀는 재학생인 동생을 보러 Y대에 왔다가 벤을 처음 만났다. 희연 씨의 검은 랜드로버가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벤의 자전거를 살짝 스쳤단다. 말이 살짝이지, 그런 무지막지한 차에 스친 벤의 입장에서는 있는 힘껏 돌진하는 황소에게 들이받힌 운 나쁜 투우사가 된 기분이었을 거다. 다행히 오른쪽 손목뼈에 금이 살짝 간 것과 자전거 뒷바퀴가 알루미늄 포일처럼 구겨진 것을 빼고 큰 부상은 없었다. 나중에 들은 건데, 벤이 희연 씨에게 호기심을 가진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나긋한 성격에서 쉽게 연상이 되지 않는 전투적인 차였다고. 나긋한 성격이라, 희연 씨를 그렇게 묘사할 사람은 그밖에 없을 것 같긴 하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해도, 벤의 온몸은 타박상으로 뒤덮였다. 다른 부위야 옷으로 가리면 되지만 오른쪽 광대뼈에 난 상처와 눈가의 울긋불긋한 멍 자국은 그도 살짝 민망스러워했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뛰다가 넘어져서 다친 애 같잖아. 이 꼴로 강의를 어떻게 해?”

그렇다기보단 솔직히 임자 있는 사람 두고 치정 싸움하다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얌전한 고양이 같았다. 내가 그렇게 말하며 웃자 벤은 귀가 빨개져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작은 사고는 벤의 과실이었지만, 피해를 본 것도 벤뿐이었다. 희연 씨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해서 그런 상황을 그냥 지나칠 성격이 못되었나 보다. 아니면 상대가 벤이었기 때문에 지나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고. 더군다나 벤은 하필 오른손을 다쳤는데, 그가 양손잡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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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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