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벤이 자주 꺼냈던 화제는 김인지 강인지, 아무튼 무슨 은호라는 사람의 신상정보였다. 은호는 키가 엄청 커, 나보다 두 뼘은 큰가. 은호는 동생이 셋이나 있대.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 은호는 서울 토박이래, 너도 그래?
은호는 벤이 진행하는 수업의 조교였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으로, 나보다 세 살인가 네 살인가가 많았다. 나도 그를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예의 바른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맑은 인상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간 골방에 처박혀서 공부만 하는 샌님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쩐지 골격이 좋더라니, 학창 시절 내리 농구부 활동을 했단다. 프로 선수가 될 실력까지는 아니었지만.
벤과 은호는 1년 정도를 만났다. 벤이 실제로 연애하는 과정을 지켜본 건 그게 처음이었는데, 적잖은 충격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평범해서.
그처럼 무던한데 또 날 서 있는 사람은 사랑도 무심하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벤은 은호한테서 한시도 눈을 못 떼고 그가 무슨 말만 하면 까르르 웃으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별것도 아닌 거로 서운해하고, 밤을 새우면서 싸우다가 또 별것도 아닌 거로 금세 풀렸다. 땀 흘리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농구공을 들고 다니는 게 일상이 됐다. 그러고 보면 벤은 연애를 할 때마다 당시에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 철저하게 맞춰졌는데, 나는 그의 그런 습관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지조를 좀 지키란 말이야.”
내가 불만을 제기하자 벤은 퉁명스럽게 맞받아쳤다.
“지조가 뭐야.”
“절개!”
“몰라.”
“모르는 척하지 마. 나보다 어려운 단어 더 많이 아시잖아요, 교수님. 사랑 앞에 자존심 필요 없다지만 진짜 자존심도 없냐?”
“응. 없어.”
그가 한없이 화사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기 때문에 나는 더이상 구박할 구실을 찾지 못했다. 벤 혼자 그렇게 유난이었다면 괘씸했으련만, 다행인지 은호는 받고 자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올곧은 사람이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군.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렇게 서로 죽고 못 살더니, 1년 치밖에 안 되는 감정이었어?
헤어진 뒤에도 벤은 가끔 은호 얘기를 꺼냈다. 은호는 이번에 대전으로 발령 났다더라. 걔네 막내도 군 복무를 그쪽에서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이젠 제대했으려나. 뭐 그런 시답잖은 얘기를. 딱히 그에게 유감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서로 바쁘니까 자연스럽게 헤어졌다거나 좋을 때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다거나 뭐, 잘 모르겠다. 그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의 의도를 어설프게 짐작해 봤자 그다지 의미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