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은 치밀하게도 테니스부의 연습 시간표를 공수해낸다. 숲처럼 푸른 눈을 가진 남학생은 곧 매일같이 코트 옆 작은 벤치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동양인 하급생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벤에게는 행운이 아니다. 그 나이대의 인기 있는 남자애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는 쾌활하고 무자비했으니까.
교복을 세탁기에 돌리는 일이 잦아진다. 어떤 날은 우유를 엎질러서, 어떤 날은 걸레 빤 물을 쏟아서, 어떤 날은 실수로 흙바닥에 넘어져 굴러서. 벤의 거짓말은 금방 소재가 고갈되었고, 애초에 그럴싸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한마디도 얹지 않는다. 남편에게 귀띔하지도 않는다. 자기 목숨보다 아들을 더 아끼는 지순한 어머니이며, 어리석거나 성정이 유약한 여자도 아닌데 왜일까. 무엇보다도 벤이 그런 문제로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는 것을 극도로 기피했고, 그에게 충분히 상황을 정리할 요령이 있다는 건 모두에게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벤은 곧 파란 눈의 남학생과 그 패거리의 과도한 관심에서 벗어난다. 그는 사람이 모자라본 적 없었고, 괴롭히는 재미를 느끼기엔 너무 무던하게 굴었다. 그렇지만 벤은 그 이후로도 가끔 테니스 코트 근처를 지나간다. 때로는 우연히, 때로는 문득 생각나서. 뭐? 자존심도 없어? 그 싹수 노란 놈이 뭐 예쁘다고 거길 찾아가?
좋아했으니까.
간결한 대답이다. 그 애는 여전히 새파란 눈을 가지고 있지만, 벤은 그 안에서 더이상 여름처럼 오묘한 초록빛을 찾지 못한다. 이리저리 열성적으로 뻗어대는 사지도 똑같이 생기가 넘쳐흐르지만 어쩐지 그전만큼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수민아,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건 네 이름이야.”
한참을 얘기한 끝에 벤이 내린 결론이다.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도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다. 갑자기 사라진 그의 전 애인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래된 짝사랑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그렇지만 둘 중 누가 더 못됐을까, 그건 쉽게 계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수민’이라는 이름은 그 이후 단 한 번도 그의 입에 오르지 않았다. 그냥 걔, 아니면 그 자식, 혹은 무언가의 영어로 된 욕이었고, 그마저도 농담조가 아니고서는 들을 수 없었다. 당연하지만, 다시는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일도 없었다.
그때쯤 벤은 서울에서 자기 역할을 찾았다. 내게는 다행이었다. 제대로 된 직업이라고 하기에 충분한 돈을 받는 일은 아니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좋아하는 분야에 대한 탐구를 다시 시작하면서 그의 상태가 눈에 띄게 나아졌기 때문이다.
학교 선배가 Y대 교수거든. 우리 과에 한국인은 나랑 그 선배 둘밖에 없었어. 아, 나 알아. 치즈 나초에 환장한다는 사람? 벤이 작게 웃는다. 응. 선배가 자기 연구실에 비어 있던 자리를 하나 내줬어. 원래는 강사 일을 소개해준다고 했는데, 일단은 비좁아도 좋으니 내 연구를 할 만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부탁했지.
일단은? 그럼 다시 강단에 설 생각이 있기는 하다? 벤은 어깨를 으쓱한다. 생각해보고. 아직은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조금 침울해 보여서 나는 질문을 후회한다. 그가 또 평생 그늘에서 햇빛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나무처럼 굴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다행히 점차 상태가 나아진 벤은 그해 가을부터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잔인한 기억의 잔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