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도시의 말 (13)

by 다안

그게 무슨 이상한 말이냐고, 나는 벤을 타박했다. 그 말을 한 게 수민이 벤을 떠나고 넉 달이나 지났을 때, 즉 내가 벤을 알게 된 지 세 달이 채 안 됐을 때였다. 그는 처음 만난 날부터 나날이 말라 갔고, 핼쑥해졌다. 나는 그가 너무 오래되어서 힘을 잃은 자작나무처럼 허옇게 바래 쓰러질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벤에게는 단 한 번의 만남에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동네 친구나 가장 좋아하는 형제의 아이처럼 가까이 두고 싶게, 마음 쓰이게 하는 신기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석 달이면 그를 오래전 잃어버렸다 하늘이 도우사 되찾은 가족인 양 여기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나는 화가 났다. 그는 내 앞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선 안 됐다. 뭐 때문에 그토록 스스로를 혹사하는지 한마디 언질이라도 줘야 했다. 줄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벤의 볼은 움푹 파여 있었고, 안 그래도 가느다란 손은 잿빛으로 떴다.

처음으로 그는 우아해 보이지도, 굳건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약해졌다. 그리고 아팠다. 시커먼 눈 밑과 메말라 갈라진 입술이 안쓰러워서 보고 있기가 불쾌할 정도였다.


오래된 현미경이 간신히 초점을 맞추듯이, 닳고 해진 벤이 느직이 나와 눈을 맞춘다. 그 얕은 움직임에 나는 별다른 기대를 품지 않는다. 그는 숨만 겨우 붙여 놓은 송장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가 예사로운 어조로 말을 시작한 뒤에도, 한참 동안 그게 그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살다 보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잖아. 그런가. 어디를 가도 주목받고,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길이 먼저 가고. 밝고, 재능있고, 사교적이고, 삶을 진심으로, 충실하게 즐기는 것처럼 보여서, 아, 저 사람에게도 과연 그늘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싶은 사람들. 그렇네. 드물지만 어딜 가도 꼭 한 명쯤은 있지. 그런 애들은 말이야, 대체로 성격도 좋고 그래서 더 사랑받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한테 못되게 구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더라고. 안전하다? 응. 이런 짓 좀 해도 너희들은 날 좋아할 거지, 하는, 일종의 자만을 굳게 믿는.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악의라고 할까. …걔가 딱 그랬지.

어라, 이거 누구 얘기야? 내 첫사랑. 아니,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애라고 해야 하나. 걘 날 싫어했으니까.


그가 평범한 십 대 소년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좋은 교육을 중시했던 벤의 부모님은 그를 명문 기숙학교에 보냈다. 그 학교 전체를 통틀어 동양인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지만, 벤은 제법 훌륭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서울을 떠났기 때문에 그때쯤에 그는 이미 한국 사람보다는 영국 사람에 가까웠다.

그때도 벤의 웃음은 부드러웠고, 말투 역시 상냥하고 말쑥했던 데다가, 결코 귀찮게 보채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는 건 쉬웠다. 모두가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염원 따위는 빌어본 적도 없다.


열일곱이 되던 해에, 벤은 교내 신문부의 사진 기자였던 친구를 따라 지역 학교 간 친선 테니스 경기를 구경하러 갔다. 무더운 날이다. 잔디밭은 뜨거운 햇볕을 받아 황금빛으로 불타오른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옷자락을 펄럭거리는데, 관중석이 함성으로 뒤덮인다. 친구는 벌떡 일어나 호루라기처럼 거센 휘파람을 불며 셔터를 몇 번이고 눌러댄다. 벤은 열기에 너절해진 정신을 붙잡고 코트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이리저리 눈을 굴린다. 그가 다니는 학교의 로고가 박힌 피케 셔츠를 입은 두 선수가 하이파이브를 친다. 득점했구나, 시답잖게 생각하던 벤의 시선이 턱, 하고 멎는다.

복식 경기였고, 코트 위에는 네 명의 선수가 있었고, 심판과 이백 명이 넘는 관중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었지만, 벤의 시야를 온통 점거한 건 주먹 쥔 손을 번쩍 들어 보인 적갈색 머리의 남학생이다. 순간 눈이 마주쳤나, 하는 착각이 든다. 그 천진한 웃음과 기운찬 세리머니는 관객의 기억에 박아 넣는 기념비이자 주체할 수 없는 승리감의 표출이며, 특별히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벤은 왠지 도둑이 제 발 저린 기분이 되어 슬그머니 다리를 꼰다.


방학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벤은 테니스부의 남학생이 자신보다 한 학년 위의 유명인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짝 깎은 녹색 잔디밭 위에서 그는 맹렬하게 테니스 채를 휘두른다. 하얀 반바지에 빛이 어지럽게 반사되어 눈부시다. 뻐억! 퍽! 공이 채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벤은 관중석에 앉아 차가운 우유를 마신다. 여름이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유달리 긴 여름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치는 아이들은 미적지근한 열기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싱그럽다.

한마디로 근사한 애였어. 난폭하게 삼키는 햇볕 아래서도 혼자 또렷하게 두드러져 보였지. 훤칠한 외모 덕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

벤은 그의 모든 움직임을 열렬히 좇기 시작한다. 잔뜩 안달 나서 찡그린 미간과 아무런 예고 없이 사납게 휘두르는 오른손과 그 위로 뻗은 곧고 튼튼한 팔. 발사되는 로켓처럼 폭발적으로 코트 위를 누비는 형체는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고 놀라울 만큼 우스꽝스러웠다.

스포츠에 열중한다는 건 어찌 보면 참 기이한 일이야. 스포츠는 뭐지? 놀이인가? 그렇다기엔 과열되어 있고. 투쟁인가? 아니, 승리 그 자체에서는 어떤 이득도 얻을 수 없지. 그런데 모두가 그토록 흥분해서는, 한목소리로 응원하고 또 비난하고. 무얼 위해서? 한, 경기에 성심성의껏 몰입해 있는 운동선수의 얼굴을 자세히 본 적 있어? 지구를 들어 올리는 형벌이라도 받는 죄인처럼 얼굴은 더없이 구기고. 눈밭에서 처음 굴러본 강아지처럼 꽁지가 빠지게 뛰어다니잖아. 자기 꼴이 우스운지 어떤지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안 쓰지.


그런 점에 반한 걸까. 그 애는 위풍당당했다. 별거 아닌 일을 해낼 때도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환호성을 질렀고, 그러면 모두가 진심으로 손뼉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자신을 중심에 세우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로지 태양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 주위를 공전하는 작고 초라한 행성 같았다. 그렇지만 벤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럼 뭐가 그렇게 좋았는데?

눈이 꼭 열대의 바다 같은 색이었어. 아주 파랗고, 에메랄드처럼 빛났어. 햇살을 받으면 머리카락이 붉게 물들었는데, 명랑한 바다에 지는 노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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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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