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도시의 말 (12)

by 다안

정신없이 솟아나는 말의 속도를 손이 따라잡지 못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벤이 요구한 대로 이 이야기는 나에 의해 기록되어야만 했다. 곡예사를 알기 위해서, 그가 나의 언어를 빌려 그 안에 감춰놓은 것들을 토해내도록. 그게 그에게 가장 밀접하게 다가갈 방법이라고, 따라서 내 문제를 파헤치고 해결해 줄 유일한 방법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벤의 것이다. 벤을 위한 것이고, 어쩌면 벤에 대한 것이다. 내가 그림을 보자마자 그토록 무너졌던 것은 그를 떠올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통 속에 몸을 뒤트는 남자를 보면서, 그 모든 벤의 불행이 떠올랐기 때문에.

난 조금 서운해하기로 했다. 이유를 짐작도 하지 못하고 불면에 시달리던 지난 3년이 억울하지 않은가? 아니, 다른 어떤 경우의 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당연한 것 같기도 했다.

벤이 하면 뭐든 자연스럽다. 달리 말하면 그는 별다른 노력 없이, 수월하게, 그였다. 그 얼굴과 목소리와 말투와 미소와 태도와 손짓과 걸음걸이의 덕일까. 그는 세련된 공법으로 철저하게 세공된 조각상 같았다. 동시에 날것처럼 순수했다. 낮은 목소리로, 독백하듯이 이야기했다. 그의 말들은 항상 지나치게 직설적이었다.


지금껏 나는 3명의 애인을 벤에게서 소개받았다. 3년 동안 3명이면 적은 수라고는 할 수 없겠지. 그중 첫 번째는 사실 소개받았다고 하기 좀 애매한데, 그가 바로 나와 이름이 같은 ‘수민’이라는 남자다. 성은 기억나지 않는다.

재작년, 겨울이 끝나가던 무렵에 벤은 런던에서 서울로 왔다. 수민 씨와는 영국에서부터 만난 사이로, 그는 런던의 저명한 예술대학에 다니는 유학생이었다. 벤은 그의 귀국 시기에 맞춰 진행 중이던 연구도 관두고, 돌아갈 기약도 없이 한국으로 왔다. 일희일비, 충동, 농담 따먹기 같은 단어들은 그와 거리가 멀었으나, 그렇다고 ‘벤은 매사에 진중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썩 옳은 진술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에게는 런던의 옛 직장에 애착을 가질 만한 이유가 몇 없었고, 어릴 때 떠난 고향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수민은 서울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느닷없이 벤과의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그야말로 번개가 내리 꽂히듯이 갑작스럽게.

벤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번호를 착각했나? 기계에 저장된 데이터가 스스로 묘기라도 부린 게 아니라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벤은 그가 말해준 주소로 대뜸 찾아가 초인종을 눌러댔다. 수민은 제 일에 정신이 팔리면 초인종이 울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벤은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벨을 누르고 또 눌렀다. 옆집의 노부부가 불안해하며 내다볼 때까지.

죄송합니다, 시끄럽게 굴어서.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 이것만 마무리하고. 금방 끝나. 익숙하고 나른한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벤은 시끄럽게 초인종 울리지 말고 그냥 들어오라며 수민이 일러준 현관 비밀번호를 겨우 기억해 냈다. 무려 열한 자리의 무의미한 숫자 조합이었다. 무작위로 설정한 것이기에 집주인조차 가끔 실수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보안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끼익, 불길한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렸다. 커다란 창문이 난 집은 텅 비어 먼지만 굴러다녔다.


처음에 벤은 수민이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금도 신용카드도 어떤 문서도 여권도, 그의 연인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 하나 분실한 게 없었다. 이런저런 가설이 뒤따랐다. 실종되었다? 납치당했다? 죽을병에 걸려 요양을 떠났다? 큰 사고가 나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어이가 없었다.

벤은 그 동네를 맴돌았다. 한참을 완전히 등 돌리지 못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후 몇 달이 지날 때까지도 여전히 그런 미련한 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웃었다. 처음 수민을 만났을 때는 이국의 도시에서 이렇게 나와 꼭 들어맞는 사람을 찾아내다니, 세상이 참 좁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같은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가장 가까웠던 사람을 도저히 만날 방도가 없다. 세상은 너무 넓었다.

벤은, 어디까지나 나의 입장이지만, 이라고 덧붙이긴 했다. 벤은 수민이 그런 식으로 자신을 떠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때때로 치고받고-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치고, 받으면서 싸웠다. 모든 연인이 그처럼 서슬 퍼렇게 싸우지는 않겠지. 그렇다고 비정상적인 관계입니다, 단언할 정도였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게다가 둘 다 뒤끝 없이 딱 부러지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든 같은 일로 두 번 트집 잡히지 않았다. 섭섭함을 꾹꾹 눌러두었다 한 번에 터뜨리지도 않았고.


“I’ve nearly loved him.”

“뭐라고?”

“그 애를 거의 사랑했었다고.”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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