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씻고, 옷을 갈아입고, 주전부리를 우물거리다가 밀린 설거지를 후다닥 끝내고, 아무렇게나 벗어둔 옷가지를 대충 치운 뒤에야 시야가 닿는 곳에 그림을 세워두고 앉았다. 내 작은 방에 그림의 크기는 상당히 버거웠다. 잠시 등을 돌리고 베개에 머리를 비비적대 보았지만, 신경이 뒤쪽으로 쏠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진짜 사람이 서 있기라도 한 듯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다. 악몽 꾸는 거 아닐까. 이거 아무래도 선물이 아닌 것 같은데.
한참을 혼자서 격렬한 내적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멋없게 포기하고 말았다. 한 번 생각이 든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저항하는 대신 노트북을 켜 문서 작성 프로그램을 열었다. A4 용지 크기의 하얀 바탕에 지우개 가루처럼 붙은 커서가 깜박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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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박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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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은 깜박임이 바람 앞의 연약한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여서, 우선 생각나는 대로 단어를 나열해보기로 했다. 그림에 대한 감상을 간결하게 정리해두고 나중에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생각이었다.
내가 그림 속의 남자를 보고 처음 생각한 바는ㅣ
처음 쓰려고 했던 문장은 활자로 시각화되자마자 빠르게 폐기되었다.
내ㄱㅣ
이야기, 난 곡예사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 이야기는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당연히 일인칭 주어로 시작해서는 안 됐다. 아귀가 딱 맞는 단어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달콤한 코코아를 끓여와 한 모금 마시고,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보기로 했다.
Des yeux qui font baiser les miens
Un rire qui se perd sur sa bouche
Voila le portrait sans retouche
De l'homme auquel
j'appartiens
Quand
il me prend dans ses bras
Il me parle tout bas
Je vois la vie en
rose
장밋빛 인생. 나는 글쟁이가 아니다. 이 노래를 틀기 전까지는 글다운 글을 쓸 생각도 아니었다. 그러나 형태가 뭉그러진 언어 다발 속에서 감각한 것에 지극히 근접한 단어를 찾아내는 경험은 그동안 왜 거부해 왔나, 잠시나마 의아할 정도로 정신을 번쩍 뜨이게 했다.
Le garçon dㅣ
Il Me Dit Des Mots D'amour, Das Mots De Tous Les Jours, Et Ca Me Fait Quelques Choses, 옛 시간의 잡음이 섞인 목소리가 벽과 천장을 따라 옹골차게 맺혔다.
Le garçon de rose. 그의 얼굴은 새벽처럼 여운을 남겼다.ㅣ
충분한 시간을 들여 첫 문장을, 정확히는 첫 이국의 문장과 뒤따르는 반듯하게 가공된 일상의 언어를 감상했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파동을 일으키는 코코아 수면의 미세한 소음까지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긴장감이 뒷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정말 정확하게,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가 쓰고 싶던 문장 그대로였다. 아니, 쓰고 싶었다? 읽기 전까지는 이런 문장을 쓰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는걸.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쓴 게 아니잖아.
다른 누가 대신 써준 것도 아니었다. 어디서 본 대사를 긁어와 교묘하게 짜깁기한 것도 아니었다. 눈과 귀와 손과 코의 감각이 신경을 타고 뇌까지 흘러 들어가 그 어느 구석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툭, 던져놓은 것 같았다. 기특하게도 감각의 언어는 자신을 그대로 치환할 수 있는 인간의 말을 찾아냈다. 무분별하게 그러나 유연하게 이리저리 오가는 어린아이처럼. 그게 내가 끼워 맞출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이었다.
Le garçon de rose. 그의 얼굴은 새벽처럼 여운을 남겼다. 장미가 겨우내 머금고 있던 꽃봉오리를 터뜨리듯이, 쏟아지는 유성이 밤하늘에 길게 떠나는 자국을 그리듯이. 그리고 그는 완벽하게 불행했다.
La misère arriva soudain dans sa vie. 불행은 갑작스럽게 그의 삶에 도달했다. Un malheur ne vient jamais seul. 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았다.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