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벤은 그림과 함께 나를 차로 데려다주었다. 매끈한 흰색의 고급 세단이었다. 그는 차에 타는 걸 싫어했고, 운전을 자주 하지도 않았다. 거의 모든 날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데도 벤의 차는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차 내부에서는 시원한 레몬그라스와 라벤더 향이 났다. 내 옆에 앉은 벤에게서는 옅은 박하와 자스민 향기가 났고.
“왜 차를 싫어해? 이렇게 예쁜 애로 갖고 있으면서. 난 하얀 차가 좋더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얀 차를 제대로 하얗게 유지하는 사람이 좋은 거지만.”
벤은 콧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가죽 냄새가 머리 아파. And besides,
“무섭잖아.”
뭐가? 라고 물어도 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교통사고가 났었던가?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은 없다. 더군다나 그런 이유라면 굳이 숨기려고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운전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사고를 내는 건데. 난 더는 캐묻지 않았다.
벤은 운전석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왼손을 입가에 가까이 대고 있었다. 미지의 공상에 몰두한 눈꺼풀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둠은 진즉에 내려앉았지만, 대교 위로는 빨갛고 노란 자동차 후미등 수천 개가 후덥지근한 별무리처럼 빛났다. 멀리 시야가 닿는 곳까지 빛이 울렁였다. 이 시간에는 항상 차가 막히지. 나는 고개를 돌려 창 너머 은반을 반사하는 나지막한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메아리처럼 기억을 맴도는 노랫소리가 있었다. 도무지 정확한 선율을 복기해낼 수는 없었지만. 주인 잃은 음들은 허공에 흩어졌다. 곡예사, 혹은 무용수를 그린 오래된 그림은 뒷좌석에 누워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갑자기 현실감이 사라져서, 차창으로 들어오는 붉은 빛에 손등을 비춰보았다. 손가락들은 다 제자리에 달려 있었으나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난 공중에 피아노를 치듯 손을 까딱여보았다. 벤의 오른손은 든든하게 곡조를 받쳐주는 저음의 타악기처럼 탁, 탁 느린 간격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차를 세우고 내 작은 거실 겸 부엌 겸 침실까지 그림을 옮겨다 주는 동안, 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나눴던 대화, 잘 빠진 하얀 자동차, 빼곡히 차가 쌓인 한밤중의 거대한 가교, 혹은 다른 무언가가 그의 말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방 창문을 통해 조수석 문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는 벤을 볼 수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정갈하게 그의 이마에 가 닿아 있었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 높이에서 알아보는 건 무리였다. 벤은 차에 타기 직전 창가에 턱을 괸 나를 발견했다. 그는 차 문을 연 채로 얼마간 그렇게 가만히 이쪽으로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휙, 손 하나가 가볍게 허공을 휘젓는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동그란 머리통이 차 속으로 사라지고, 얼마 뒤 시동이 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창문을 닫고 기지개를 켰다. 희미한 미소를 본 것 같았다. 누구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지은 게 아닌, 스스로를 위한 힘 없는 웃음을.
거리에서 우연히 벤을 마주친 날이 있다. 근 몇 년간 가장 많은 비가 내린 날이었다. 기이하게도 밝은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끝을 모르는 빗줄기들이 지상을 향해 뛰어든다.
그는 우산도 없이 빗속에 멍하니 서 있는데, 옅은 푸른색의 셔츠는 이미 다 젖어서 살갗이 투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왜 저기서 저러고 있어, 감기 걸리게. 나는 그를 부르려고 하지만, 혀끝을 맴도는 이름은 아무래도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B로 시작하는, 서너 글자의… 뭐더라. 다시 마주칠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니까.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는 온몸으로 빗줄기를 받아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똑바로 응시한다. 잔인하게 비를 뿌려대는 구름과 눈싸움이라도 벌이려는 모양새다. 어리석은 인간이로구나, 비웃듯 천둥이 천지를 울린다. 그 가뿐한 고갯짓이 절대 권력을 지닌 왕의 명령처럼 시선을 꽁꽁 옭아맨다. 심심하지 않으나 심상한 사랑스러움. 그게 이 사람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러니 이런 장면을 목격하는 건, 예정에도 예측에도 없던 일일뿐더러 은밀한 죄의식마저 느끼게 한다.
그가 존재하는 작은 구역만이 외따로 떨어져 나머지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형성하는 것을 관조하며, 나는 비로소 그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벤은 그에게로 곤두박질치는 빗방울과 인사를 나누듯 천천히 눈을 감는다. 꿀 같은 머리카락은 싱거운 잿빛으로 이마와 볼에 달라붙고, 거센 비바람 속에 내던져진 그는 볼품없이 태어나 어미에게 버림받은 어린 짐승 같다. 나는 인상을 찡그려야 할지 가슴을 문질러야 할지 조금 헷갈린다.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우거진 나무들과 오래된 건물 사이에 서 있는 벤. 그는 기억할까. 초라한 자신을 내가 조용히 엿보고 있었다는 걸 알까. 이제는 알겠지. 그는 아주 사소한 것도 잊지 않으니까. 내게는 그게 두 번째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