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도시의 말 (9)

by 다안

아까 카페에서 벤에게 말했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Une histoire étrange.” Histoire (여성형 명사) 역사, 역사책, 연혁, 내력, 경력, 전기. 혹은 이야기. 모든 이야기는 결국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에 대한 사적이고 내밀한 기록이다.

“그러니까, 매력적인 이야기를 가진 사람은 낱낱이 알아가기가 쉽다는 거지? 달갑게 듣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 확실히. 나는 저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 껍질도 독특하고, 향도 매력적이야.”

나에게는 곡예사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의무가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 의무가.

“하지만 그림은 말할 수 없다고.”

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야기는, 구전되기도 하지만… 기록될 수도 있지.”

“그게 무슨…”

아, 설마.

“Write it down.”

단호한 음성이 선언했다. 투명한 시선이 나를 옭아맸다.

“You must write it down, until the end.”


번역해주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이 곡예사의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가길 바라는 것이다. 내가 외면해왔던, 도망쳐왔던 의무를 단행하도록 내게 자비 없이 명령하는 것이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려고 시도했다.

“싫어.”

벤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날카롭게 추궁하는 눈빛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어불성설이야.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쓸 수는 있겠어? 그건 축적이 아니라 날조지.”

“네 청력으로 감지할 수 없는 주파수라 해도, 그림이 너한테 말을 걸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겠지. 난 널 알아, 한.”

“날 안다면 이것도 알았어야지. 나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아. 세상에 물질적인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그런 무의미한 짓을 뭣 하러? 바보 같아. 난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고, 존재했었다는 어떤 사소한 증거도 없이 완전히 사라지길 바라.”

두 개의 청명한 눈이 말했다. 거짓말. 알겠어, 알겠다고.

“…굴복하고 싶지 않아.”

“누구한테? 무엇한테?”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말했잖아. 너는 너의 욕망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거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왜?”

난 거의 체념한 심정으로 내뱉었다.

“날 것 그대로를 내보일 수는 없어. 누가 됐든 무엇이 됐든, 전부를 알면 질리게 되는 법이야. 감추고 꾸며내고 기만하면? 추락이 극적일 뿐, 결말은 다르지 않겠지. 그리고 나는 정말로 추해지고 싶지 않아.”

따뜻한 꿀물 같은 눈동자를 가진 벤은 조심스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너는 하나도 추하지 않아. 정말로.”

그가 내뱉는 말이 공기를 어떤 식으로 울리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귓가에 닿는 진동은 안락했다.

“네 전부를 알게 되더라도 여전히 그럴 거야.”


서투른 위로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그를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뒷말은 머릿속으로만 간직하기로 했다.

벤, 나는 사랑하고 싶지 않아. 엄마도, 연인도, 영영 태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의 내 아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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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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