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나는 이 사람을 알아야겠어.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런 예감이 들어. 그렇지만 뭘?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나는 발을 헛디디듯 정신없이 애걸했다. 심장이 조여들며 공기를 뱉어냈다. 손끝에 저릿한 전류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흐물거리다가, 머리카락 사이로 밀고 들어가 두개골 속에 감춰진 뇌에 침입하려는 사투를 벌였다가, 같은 구간을 반복하는 멍청한 CD처럼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나는 내 이성의 의사가 두 손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확인하기 위해 손목을 탈탈 흔들었다가, 욱신대는 갈빗대를 움켜쥐었다가, 그 안쪽에 선명한 호흡을 채워 넣으려고 무의미한 시도를 몇 번 반복했다. 벤은 내 어깨를 가볍게 잡고 아이를 어르는 젊은 부모처럼 규칙적인 리듬으로 두드렸다. 그의 눈동자가 답을 찾아 허공을 휘젓는 걸 보며 나는 고르게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서른, 스물아홉, 스물여덟, 그가 거꾸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나는 눈꺼풀을 꽉 닫고 그 목소리에 집중했다. 열하나, 열, 아홉…
“한, art, 그러니까 ‘예술’의 어원이 뭔지 알아?”
이게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지. 어쨌든 주의를 돌리려는 의도라면 그는 성공했다. 차분하지만 영민한 목소리에 정신을 빼앗겨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으니까.
“…후, 아니.”
벤은 내가 정상적인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때까지 어깨를 토닥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Article(기사, 조항), artisan(장인), 그리고 art. 이 세 단어의 공통점은 라틴어의 ‘ars’라는 단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거야. Ars는 기술, 또는 학문을 뜻하는 말인데, 이 ars에서 파생한 두 종류의 학예를 artes liberales(자유로운 기예), 그리고 artes vulgares(비천한 기예)라고 부르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겠지만, 전자는 직업인이 연마하는 기능, 즉 생계 중심형 기술과는 대조적인 자유 시민의 교양 과목이라는 뜻이고, 후자는 먹고살기 위해 갈고 닦아야만 하는, 따라서 7가지의 자유 학예보다 질적으로 천하다고 여겨지는 기술들을 일컫는 말이야. 흥미롭게도 art, 그러니까 회화, 공예 같은 미술은 후자에 속하고.
그렇다면 이렇게 대조적인 두 분야-시민 계급의 고귀한 학문과 생산 계급의 미천한 기술-를 ars라는 한 단어로 묶어서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질문이야?”
“응.”
박식한 벤의 다채로운 가설과 이론을 듣는 것은 대체로 즐거웠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질 때면 열정으로 눈을 빛내는 교수님과 맥없는 나, 단둘뿐인 강의실에 강제로 입장 당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을쎄. 다의어는 보통… 다른 의미라고는 해도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지 않나. 가령 ‘길’이라는 단어가 물리적인 도로, 그 도로 위를 이동하는 과정, 그리고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을 함께 의미하듯이. 저기 아이가 길을 걷는다. 나 집에 가는 길이야. 이 강아지를 살릴 길은 없나요, 뭐 이런 거. 기술과 학문에도, 어떤 유사성이 있겠지.”
“Magnificent! 자, 그럼 이제 ars의 다른 의미를 살펴보자고.”
이 대화가 지금 저놈의 그림이랑 무슨 상관인가 싶으면서도, 손가락까지 튕겨가며 상기된 벤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천직이네, 천직이야.
“비웃지 마.”
“안 비웃었어. 그냥 웃은 거야.”
“잘도. 아무튼, ars에는 ‘재능, 재주’라는 뜻이 있는가 하면, ‘숙련되다, 노련하다’라는 뜻도 있어. 이제 감이 오지?”
“기술도 학문도, 타고난 재능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체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 결국 육체를 쓰는 행위든, 정신을 쓰는 행위든, ‘앎’이라는 본질을 공유한다는 거지.”
“아주 신기하게도 원래의 주제로 회귀하고 있군. 계속 말해봐.”
그림을 옆으로 밀어내고 침대에 걸터앉은 벤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정리하자면, 무언가를 안다는 일은 대상에 대해 ‘선험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재능)’에 ‘새로운 지식을 덧대어 쌓아가는 것(배움)’이라고 볼 수 있겠지.”
“음.”
“네가 그림 속의 남자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건 뭐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당연하게 내재화하고 있는 정보.”
“곡예사다, 고통받고 있다, 살아남는 사람이다.”
“Good. Now let’s, 그 기반 위에 네가 모르는 정보를 추가해 보자고.”
“하지만 어떻게?”
저건 그림이고, 남자는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아직 모르는 사실을 새로이 밝혀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나는 너를 잘 알아. 너도 나를 잘 알지?”
“그렇다고 생각하지.”
“처음부터 우리가 서로를 잘 알았던 건 아니지. 대부분의 관계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한참 변화되고, 진전되어 있잖아. 그 과정을 되짚어 가보는 거야. 나라는 사람을 파헤쳐 간 방식, 기억해?”
“글쎄, 그냥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단순히 함께 한 시간이 쌓인다고 그에 비례해 유대감이 쌓이나? 사람들은 종종 평생을 알고 지낸 부모보다도 몇 년 지기에 불과한 친구에게, 오랜 친구보다도 곧 헤어질 연인에게 더 가까이 닿아 있다고 느끼잖아.”
그의 말이 맞다. 미성년의 19년 동안 한집에 살았었는데도 난 엄마를 잘 몰랐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벤에 관해서라면 10장짜리 레포트라도 거뜬히 그리고 기꺼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네. 왜지? 더 좋아하니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래, 사과보다는 용과를 까보고 싶지 않아?”
“뭐?”
벤은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이마를 찡그린다. 흐으음, 얕은 웅얼거림이 새어 나온다.
“그러니까,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잘 모르는 것. 보통은 둘 중 후자에 더 끌리겠지?”
“뭐, 그렇지.”
“그럼 둘 다 모르는 거라면? 두리안 먹어봤어?”
“아니.”
“쿠푸아수는?”
“뭐? 먹기는커녕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과일이야. 과일이긴 해? 애초에 왜 자꾸 과일에 비유하는 건데?”
“쉽고 맛있잖아. 아무튼, 그 두 개가 네 눈앞에 놓여 있고, 둘 중 하나만 맛볼 수 있다면 뭘 고를래?”
“어, 글쎄. 모양을 살펴보고, 향도 좀 맡아보고. 덜 위험하거나 더 맛있어 보이는 걸로 고르겠지.”
벤은 씨익 웃는다.
“한, 난 널 처음 만나자마자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될 거란 걸 알았어.”
늘 이렇게 뜬금없지.
“왜?”
“Your stories fascinated me. 네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거든.”
“이야기? 옛날이야기 같은? 그런 재롱을 떤 기억은 없는데.”
“You mean tale. 그것보다는 좀 더 개인적인, 너의 이야기. 네가 주인공인 기억들 말이야. 너라는 개인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