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은 손가락이 완만한 호를 그리며 얇은 커튼처럼 드리운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동그란 뒤통수를 천천히 지난 손은 목덜미 위에 멈춰 섰다. 애써 넘긴 보람 없이, 팔랑대는 가는 머리카락이 반듯한 이마 위로 쏟아져 내렸다. 보리밭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잘 모르겠어. 나한테 박힌 이 감각을 똑바른, 정확히 조응하는 단어들로 구성할 수가 없어.”
내 호흡이 거센 바람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낮췄다. 벤은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맞대었다. 구슬 같은 호박색 눈동자가 빤히 쳐다보는 동안 나는 어떤 예감에 사로잡혀갔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 의도되지 않은 듬성듬성한 말들이 발아래 우수수 펼쳐졌다. 곤란하네, 그냥 적당한 맞장구나 칠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벤한테라도 그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본 적은 없었다.
“어떤, 덩어리야. 끈적한 것들이 엉겨 붙어서, 한데 뭉쳐 있어. 계속 요동치면서. 그런데 그 물질 자체는 순수해. 그래서 아주 짙은데도 아주 투명한 거야. 심해나 보석 결정처럼. 만화경을 눈 가까이에 대고 들여다보는 것처럼. 촘촘하게 엮여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날카롭게 찌르고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틀렸어. 뭔가 잘못됐어, 방향이… 이렇게 똑바로가 아니라.”
나는 더듬더듬 방안을 서성이다가 갑자기 결심을 굳히고 그림을 들어 올렸다. 벤은 내가 활개를 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린아이의 해적 놀이를 가만 바라봐 주는 다정한 엄마처럼 말이다. 혼자 들기도 버거웠지만 나는 기어코 그림을 뒤집는 데 성공했다. 본래의 모습대로. 무용수의 머리가 바닥을 향하게, 발끝은 천장을 향하게.
“닿은 살갗이 아플 정도로 세게 비가 내려. 어떤 남자가 우산도 없이 그 한가운데 서 있어. 겉옷부터 시작해서 속옷까지, 피부의 미세한 빈틈 사이사이까지 완전히 빗물에 푹 잠기도록 가만히. 남자는 고개를 위로 젖히고 있어. 빗방울이 창백한 얼굴 위로 뚝뚝 떨어져서 작게 터져. 머리카락은 온통 질척하게 이마에 휘감겨 있고, 물이 눈에서, 코에서,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지, 구름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건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축축하게 젖었어. 남자가 손바닥을 들어서 오목하게 오므려. 빗물이 잠깐 고이는 듯하다가, 그냥 흩어져 버려. 남자는 하늘을 보고 있어. 아직도 비를 맞고 있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벤이 열성적으로 귀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도 나를 휘감는 이 기묘한 감각에 공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물구나무선 남자의 아픔에 내던져지고 휘둘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봐, 이걸 봐. 이 사람은 무용수가 아니야. 그렇게 고상하고 우아한 게 아니란 말이야.”
난 그림 속의 남자를 가리키며 벤에게 외쳤다. 터져 나온 목소리는 절박할 정도여서 누군가 내 성대를 훔쳐 가 대신 사용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낯설었다.
“거꾸로 되어 있다고 했지? 아냐. 지금 이 방향이야. 이게, 이게 이 사람의 세상이라고. 이 남자는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니야.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거지. 한 손으로 온몸을 지탱하면서, 허리랑 다리까지 가만 쉬게 두지 못하는 거야.”
“누구지?”
벤은 꼬챙이를 꿰듯 단번에 물었다. 이 남자가 누구냐고. 너는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거냐고.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었다.
“곡예사.”
누구냐, 는 질문에 내 답은 적절했는가. 그렇지만 이보다 나은 설명은 찾아지지 않았다. 그는 묘기를 부리는 사람이었다. 더 신랄하게 말하자면 살기 위해 몸을 뒤틀어야 하는 사람. 머리를 땅에 댄 채 세상을 거꾸로 봐야 하는 사람.
아니면, 발상의 전환이다. 관절이 비틀리는 고통을 지고도 살아남아야만 하는 사람일까. 거꾸로 뒤집힌 세상에서, 발 대신 손으로라도 디딜 곳을 찾으려는 사람일까? 그래, 이쪽이 훨씬 말이 된다. 난 이 남자를 알 것만 같았다. 그가 어떤 단어를 쓰고, 뭘 넣은 커피를 마시고, 얼마나 큰 보폭으로 걷는지. 무슨 향수를 뿌리고, 화날 때 짓는 표정은 어떤지. 누구를 사랑하고 어째서 그와 싸우는지. 무엇이 그를 그토록 불행하게 했는지.
철저하게 알아야만 했다.
“두통이 조금 가라앉았어.”
‘그 문제’가 닥쳐온 이후로 항상 어릿어릿했던 두개골이 한결 가벼웠다. 도저히 잠들지 못하게 괴롭히던 온 신경의 간질거림도, 정신을 멍하게 휘저었던 목덜미의 열감도, 명치를 저리게 찌르는 서늘한 공포도 견딜 만해졌다.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의 발생에 수반된 증상들은 어떤 짓을 해도 멈추지 않았고, 나는 지쳐 나가떨어졌다. 상냥한 벤이 진정 효과가 있는 찻잎을 날라다 주고 근육 이완에 효과적인 호흡법을 배워 왔지만, 애석하게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무명의 곡예사에게서 쥐구멍에 볕 들 날처럼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던 가능성이 발견된 것이다. 이 남자를 낱낱이 철저히 파헤치면, 그래서 그의 모든 감각과 온정, 냉담한 부분을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러면 ‘그 문제’의 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