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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discovers Mar 19. 2023

커피 한잔, 기네스 한잔

2023년 3월 17일의 기록

10:00 AM
남자친구 집 발코니


3개월 넘게  비타민D 부족으로 살다 보면, 파란 하늘과 햇빛이 비치기만 해도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 오랜만에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간다. 저렇게 아름답게 파랗다가도 순식간에 하얘지는 회색 하늘의 독일이기 때문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둘기에게 점령당해 있어서 위생을 위해 자주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사용하지 않기에는 너무 아쉬운 발코니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정주행 중인 더 글로리> 조금 보고, 밖에 껄렁껄렁 걸어 다니는 사람들, 공사자재 옮기는 아저씨들을 구경하다가 들어왔다. 아직은 바람에 약간의 쌀쌀함이 있어 오래 앉아있지는 못했다.


13:00 PM
Impala Coffee (Charlottenburg Berlin)
Elephant Chai Latte(Vanilla), Cafe Latte, Chocolate Fudge, Marmorkranz(Total 14,30€)


과제도 다 끝냈겠다, 미니잡도 구했겠다, 수강 희망하던 세미나에도 붙었겠다, 하늘도 파랗다, 들뜰 이유가 너무 많다. 그래서 텅장에 잔고가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공부하러 온 카페에서 음료와 디저트를 질-렀다. 중간고사 준비 중인 남자친구 퀴즈도 내주고, 오랜만에 여유롭게 내 글도 쓰고 하니 기분이 좋다.


독일에서 카페에 오면, 혼자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하는 사람들 외에도, 정말 사람구경하며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다. 가끔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건가 싶어서, 눈은 내 앞의 랩탑을 보면서도 마음의 눈은 그들을 살피며 간질간질 신경을 곧두세운다. 하지만 철학자의 나라답게, 레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하다. 나도 어렸을 때는 정말 ‘생각’이라는 활동 하나로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요즘은 글쓰기든 책 읽기든 뭔가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18:00 PM
Curry


“일요일은 내가 요리사~”는 짜파게티 CM송이었지만, 우리 집은 아빠가 일요일마다 카레라이스를 해줬었다. 일본식 카레처럼 달고 고급진 느낌도, 인도식 카레처럼 진하고 향기로운 느낌도 아니지만, 듬성듬성 썰어 넣은 당근, 돼지고기와 감자와 묽은 맛의 강황을 한입 떠서 먹으면, 그땐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아빠는 아직도 아빠가 해주는 일요일 카레가 그립지 않냐고 물어보신다. 하지만 나는 지금 독일에 있으니까, 내가 직접 해 먹었다. 오X기에서 파는 강황가루를 구하기는 쉽지 않지만, 아시안마켓에서 구해놓은 카레소스가 있어서, 감자랑 당근이랑 고기 구해다가 해 먹었다. 뭔가 심심해서 매콤하게 스카치보넷 파우더도 살짝 치고, 넘나 그리운 압력밥솥 대신 냄비에 재스민라이스를 끓여서 밥도 지었다. 요즘 시도해 보고 있는 이런저런 요리 중에서도 어린 시절 먹던 음식(아빠가 해준 건 아니지만)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23:00 PM
Berliner Pub (Zoologischer Garten Berlin)
Guiness on Tab (Total 9,60€)


아이리시 룸메이트가 3월 17일 St. Patricks Day에 꼭 아이리시 펍을 가라고 했던 게 퍼뜩 기억이 나서, 근처에 있는 아이리시 펍을 찾아봤다. 베를린 가장 오래된 아이리시 펍이라는 The Harp는 코로나 직격탄을 맞았는지 영업정지 했길래 베를린 최대 크기라는 Europa Center안의 Irish Pub으로 향했다. 누가 Zoologischer Garten이 위험한 동네라고 그랬어서 괜히 긴장하면서 갔는데, 어두운 밤이라 한국과 헷갈릴 정도로 커다란 백화점과 LED 간판들이 달린 번화가였다. 점점 초록색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하더니, 펍 근처에 가자 줄이 한세월만세월 길게 서있었다. 초록색 옷을 입지 않으면 꼬집힘 당한다는 전통에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귀엽게도 꼭 한 가지씩 초록색을 두르고 있었는데, 모자, 핸드백, 구두, 심지어 초록색 메이크업까지 다양하고 창의적이었다. 

라이브로 아이리시 포크뮤직에 춤추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줄이 너무 길어서 기네스 마시는 데 의의를 두자고 하며 근처에 있는 다른 곳으로 갔다. 베를린 풍경을 판타지스러운 화풍으로 재해석한 그림들로 벽을 장식한, 시끌시끌 웃고 떠들며 술 마시는 아저씨들과 욕설 담긴 농담을 주고받는 바텐더들이 거칠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그런 로컬 펍이었다. 기네스가 진하게 잔에 담겼으니, 내 녹색 모자를 분위기 삼아 우리끼리의 가짜 St. Patricks Day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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