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를 그릴 때 가장 먼저 손에 쥐게 되는 건 늘 먹이다. 색보다 먼저고, 꽃보다 먼저다. 그림의 시작은 언제나 가장 어두운 색에서 출발한다. 처음엔 이게 조금 낯설다. 보통은 밝은 데서 시작해서 점점 채워 나갈 것 같은데, 민화는 반대로 간다. 제일 검은 걸로 먼저 긋고, 그 위에 모든 걸 얹는다. 마치 처음부터 되돌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먹은 한 번 그으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연하게 그어도 흔적이 남고, 조심해서 그어도 결이 남는다. 그래서 먹선을 앞에 두면 손이 잠깐 멈춘다. 이 선은 지우개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정은 가능하지만,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먹은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재료라기보다는, 실수까지 포함해서 기록해버리는 재료에 가깝다.
그래서 민화의 먹선에는 늘 망설임이 함께 들어 있다. 확신에 찬 선도 있고, 머뭇거리다 그은 선도 있다. 어떤 선은 한 번에 나가고, 어떤 선은 중간에 살짝 멈췄다 이어진다. 먹은 그 모든 과정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다 남긴다. 그래서 먹선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어디서 주저했는지, 어디서 마음을 정했는지가 그대로 보인다.
처음에는 먹이 조금 무섭다. 제일 앞에 서 있는데, 가장 책임이 큰 재료처럼 느껴진다. 이 선이 그림 전체를 끌고 갈 것 같아서, 괜히 더 긴장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날은 먹을 갈아놓고도 한참을 붓에 묻히지 못한다.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걸, 먹이 먼저 알아채는 느낌이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