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한창 일궈가는 중이었다.
암은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진료실을 나와 차에 타자마자
담담한 척 꾹꾹 눌렀던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주차장에서 한참을 울었다.
삶이 무겁고 힘들게만 느껴졌을 때
'죽고 싶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진짜 죽음은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조용히, 너무도 가까이 다가왔다.
'왜 하필 나인지.
왜 하필 지금인지...'
나는 언제나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은 불편하고, 불안했다.
그런 나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암’은
내 삶의 통제권을 빼앗아 갔고,
계획했던 일, 하고 싶었던 일들을 기약 없이 미뤄야만 했다.
그 우울함과 무기력함은 ‘암’이라는 단어가 주는 충격보다
더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그제야, 정말 그제서야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이
비로소 와닿았다.
진단 직후는 가장 막막하고 두려운 시기였지만
병원을 고르고, 의사를 결정하고, 치료 방침을 하나씩 정하면서,
불안했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시간 동안 남편은 불안정한 나를 다독이며
‘사랑한다’ 더 많이 말해주었다.
그때 남편의 지지는 나의 절대적인 힘이 되었다.
차분히 마음을 다 잡은 뒤로는 치료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치료가 끝난 뒤에, 예전과 같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후유증이나 장애가 남지 않게 제발 치료가 무사히 끝났으면 좋겠다’ 싶었다.
유방암 관련 책을 읽고, 환우 카페에 가입해 환자들의 후기도 찾아보고, 대학 교재를 펼쳐 유방암 치료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공부했다. 어떤 약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부작용은 어느 정도일지, 평소 공부해 왔던 의약 지식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조금씩 세워나갔다.
암은 나를 멈춰 세웠지만,
나는 멈춘 그 자리에서 다시 길을 찾기 시작했다.
후회하며 자책하지 않기로
나는 뭐든 다 잘하고 싶은 욕심에,
나에게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자 항상 긴장하며 살았다.
나태한 나, 부족한 나를 채찍질하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나를 가장 구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가끔은 몸이 너무 피곤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30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 여겼다.
생리는 불규칙했고, 신경을 많이 쓰는 날엔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 건강을 챙기기 위해 했던 일이라고는
고작 영양제 몇 알 챙겨 먹는 게 전부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은 늘 뒷전이었고,
병원은 1년에 한두 번 감기 때문에 가는 정도가 다였기에
‘나는 건강하다’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약사로 일하면서도 정작 내 건강, 내 생활 습관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건강을 이야기하면서도 나는 나를 전혀 돌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암이 생긴 원인은 어느 시점의 어떤 행동 한 두 가지로 특정할 수 없다.
설령 특정할 수 있다 해도 바뀌는 건 없다.
암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후회하며 자책하지 말자.
누군가 무얼 잘못해서 생긴 병이 아니라,
교통사고처럼 그냥 벌어진 일이다.
암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
암 진단은 사망 선고가 아니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최근 암환자의 5년 생존율은 70퍼센트를 넘어섰다.
암환자 10명 중 7명은 5년 이상 생존한다는 뜻이다.
조기에 발견된 암은 대부분 완치되는 추세이고, 어느 정도 진행된 암이라도
환자가 치료에 성실히 임하면 병원에서 통계적으로 말하는
‘평균 예상 생존 기간’보다는 더 오래 살 수 있다.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생각해 보니
아무런 자각증상도 없었는데
암이 더 커지고 전이되기 전에 빨리 발견했다는 것,
곁에 있어 줄 든든한 남편이 있다는 것,
일을 그만두더라도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전문직이라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앞만 보고 달리던 나에게,
‘잠시 쉬어가라’고, ‘나를 좀 보살피라’고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낸 건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모든 습관을 바꾸려 하지 말자.
하나씩, 천천히.
기존의 생활 습관과 식습관을 돌아보며
나쁜 것은 조금씩 덜어내고,
좋은 습관을 새롭게 들일 기회이다.
이 시간을 발판 삼아
남은 인생을 더 건강하게 살아가면 된다.
충분히 쉬고 일어나서
더 단단하게 잘 걸어 나가야지.
힘든 시간이 지나, 추억처럼 대화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