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사라지고 싶은 밤, 검은 돌덩이를 헹구다

그 말들이 당신이 된 건 아니에요

by 누리봄

회사 옥상 난간 위에서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았으면”을

떠올리던 남자가,

감정을 빨아주는 세탁소에서 숨 한 번 더 쉬는 연습을 하며

‘내가 사라지는 것’ 대신 ‘오늘 감정의 껍질만 벗겨내는 것’을 선택하는 밤.


파자루니스.

어떤 지도로도, 설명으로도 닿을 수 없는 도시.

혹자는 “언젠가 한 번쯤 머무른 적 있는 것 같기도 한,

꿈결 같은 곳”이라 말한다.

서라울에서 길을 잃은 마음들이, 가끔 이곳 파자루니스 골목으로 흘러들었다. 현실 도시는 그대로인데, 마음만 먼저 다른 지도로 빠져나오는 셈이었다. 여기선 오래 살아도 한순간 길을 잃는다. 길 찾기 앱의 화살표마저 언제나 살짝 잘못된 방향을 가리킨 채, 사람들은 종종 그럴싸한 핑계조차 잊고 배회한다. 이상한 건, 마음이 가라앉을수록 낯선 골목이 갑자기 생겨난다는 점이다.


해 질 무렵이면 낮과 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느슨해진다.

오늘, 파자루니스와 서라울시의 경계 골목 어귀.

뿌연 석양과 안개 사이로,

어제까진 없던 낡은 세탁소 하나가 불쑥 생겨났다.


세탁소 낡은 나무기둥에는 미래에서 온 듯 은빛 유리문이 달려 있다. 세탁소가 문을 여는 날이면, 파자루니스 중앙 우물 아래 어딘가에서 미세한 진동이 먼저 일었다.

마치 도시가 더 이상 혼자서 감정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바닥에서부터 먼저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도시는 눈에 보이는 길 대신,

마음이 무너지는 자리에 먼저 길을 낸다.


감정 세탁소는 그런 길 끝에, 아주 가끔 문을 연다.

누군가의 마음이 바닥까지 꺼지는 날이면, 도시 공기마저 함께 낮게 가라앉았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할 때, 세탁소가 잠시 대신 숨을 쉬어주는 셈이었다.


그 안쪽엔 보는 이마다 다르게 반사되는 유리-

누군가에겐 아주 오래된 공간, 누군가에겐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공간처럼 느껴진다. 유리문 위에서는 글귀가 오래된 타자기 소리를 내며 맴돈다.


감정은 내가 아니라, 나의 것이다.


문틈으로 푸른빛 온기가 번져 나온다.

겨울 저녁, 골목 공기는 서늘하게 가라앉았지만

이 세탁소 안은 방금 꺼낸 붕어빵처럼,

은근한 온기가 자리를 잡았다.

카운터 너머, 한 여자가 조용히 앉아 있다.

바람결에 조용히 나부끼는 머리,

흰 셔츠와 푸른 앞치마.

세탁소 주인처럼,

혹은 동화를 닮은 카페의 점장처럼 보이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다.

이름은 이류.

파자루니스에 ‘감정 세탁소’의 문이 열릴 때마다,

어딘가에서 두 도시의 경계를 따라와

이곳의 주인이 되는 사람.



오늘따라 이류는 카운터 곁 나무통을 바라보다 입을 다문다.

비어 있는 통, 묵직한 적막.

“…조용할 때가 제일 무서운 법이지.”

이류는 천천히 서랍을 열어 빛바랜 나무상자를 꺼낸다.

상자엔 낡은 네모 반지와 옥패가 들어 있다.

‘洗情符(세정부)’라고 새겨진 푸른 옥패 뒤에는 알 수 없는 27자의 오래된 글이 박혀 있다.


할머니가 물려준 청연(淸淵) 가문의 유산이다.

청연(淸淵) 가문사람을 힘들게 하는 감정을 세탁하는 사명을 가지며 도시 곳곳, 보이지 않는 골목의 어딘가에서 세상의 울음을 받아왔다. 이류는 그 오래된 문장들 속 ‘가문’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내가 맡아야 할 사명도, 남길 감정도,

바로 여기에 담아두는 거야…’


문득, 파자루니스 중앙 우물 앞에서 환영처럼 보였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맴돈다.


“이제 네 차례구나, 류야.”


이류는 언젠가 이 모든 짐을 거부하려 몸부림쳤고, 한동안 현실 세계 어귀를 전전하며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 구석구석에 스며든 부정적인 감정의 잔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냄새가, 결국 이류를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그때부터 이류는, 남의 울음을 씻어주면서도

정작 자기 마음은 어디에 걸어 말려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었다.

“류야, 이 우물은 넘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넘치게 해.

우물만 보지 말고, 니 마음이 언제 흔들리는지도 같이 봐야 한다.”


세탁소 안, 물 빠진 오후 햇살이 바닥 위로 느릿하게 흘렀다.

비어 있는 나무통, 말라붙은 고요. 이류는 카운터 안쪽에서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바닥 한가운데 문양 위로 보랏빛 선이 실핏줄처럼 가늘게 흔들렸다. 유리문 밖 골목은 아직 조용했다. 오늘 이곳을 찾아올 사람의 기척도, 아직은 또렷이 올라오지 않았다.


1. 명치끝에서 부서지는 검은 돌덩이

이류는 카운터 아래 나무 상자를 꺼냈다.

닳아 반들거리는 나무뚜껑, 그 안에 누워 있는 작은 옥패와

오른손 둘째 손가락의 낡은 반지. 손가락이 옥패를 스치자 짧고 낮은 떨림이 손등으로 번졌다.


‘오늘도 또 한 사람.’

‘하루치 감정.’

‘우물은, 어디까지 버텨줄까.’

문득, 파자루니스 중앙 우물가 석양빛이 눈앞에 겹쳐 떠올랐다. 돌 난간에 기대 서서 옥패를 만지작거리던 어린 날의 이류. 그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던 할머니의 주름진 손.

"류야, 감정의 물이 너무 오랫동안 고이면 먼저 우물 바닥부터 갈라진단다."


지금은 그때의 말이 너무 또렷해서, 가끔은 귀에 쐐기처럼 박혔다. 이류는 요즘 들어 할머니가 덧붙이던 한 줄을 자꾸 떠올렸다.


‘우물은 넘치기 전에 사람을 먼저 넘치게 해.

물만 보지 말고, 네 마음이 먼저 흔들리는지도 같이 봐야 한다.’

‘그래서 전부 씻어내야 한다고요? 그러면… 내 바닥은요.’

입술이 소리 나지 않는 질문을 흘렸다.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손끝으로 전해지는 옅은 진동만은 여전히 "오늘도 열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류는 손에 쥔 옥패를 잠시 힘주어 쥐었다가 툭, 나무 상자 안으로 떨어뜨렸다. 카운터 위, 유리문 옆에 걸린 작은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OPEN / CLOSE.


이류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팻말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CLOSE’ 쪽으로 절반쯤 돌아갔을 때,

문밖 골목 공기에서 아주 미세한 기척이 스쳤다.

목 끝 어딘가가 먼저 싸하게 조여들었다.

오늘은… 그냥 닫아버리면 안 될까.


팻말이 손 안에서 한 번 더 덜컥- 작게 흔들렸다.


"문을 닫으면, 저 골목 어디선가

누군가는 오늘 밤 끝까지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할머니 목소리인지, 이류 자신의 생각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한 줄이 머릿속에서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말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작은 투정이 자기 목소리로 새어 나왔다.

"근데… 내가 언제까지 이걸 맡고 있어야 하나요."


이 일은, 내가 골라 잡은 건지, 태어날 때부터 손에 쥐어져 있던 건지. 솔직히, 가끔은 그냥 오늘만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목까지 차올랐다.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있었다 한들 지금은 듣고 싶지도 않았다.


이류는 팻말을 든 손을 천천히 내렸다.

‘CLOSE’로 완전히 돌리기 직전, 손목이 딱 멈췄다.


‘오늘 금이 가는 건 바닥일까, 나일까.’

그 생각이 짧게 스쳐 갔다. 바닥 가운데 문양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어제도, 그제도 완전히 마르지 못한 보랏빛 자국이 실핏줄처럼 얇게 남아 있었다.


이류는 유리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한 번 숨을 들이쉬고, 한 번 더 내쉰 뒤에야 팻말을 다시 ‘OPEN’ 쪽으로 돌려 걸었다.

"그래도… 오늘도 한 명 정도는."


작게 중얼거리며 카운터로 돌아와 앉았다.

오른손 둘째 손가락의 반지를 한 번 만지작거리자,

차가웠던 금속이 손 온도에 천천히 데워졌다.


그때였다. 늦은 저녁, 골목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한 남자가 한 손엔 구겨진 종이, 다른 손엔 꺼진 스마트폰을 쥔 채 비틀거리듯 걸어왔다. 셔츠는 잔뜩 구겨져 있고, 넥타이는 모서리만 겨우 목에 걸려 있다. 잠시, 남자는 세탁소 앞 파란빛 둥근 문고리 앞에서 멈춰 섰다.


갈피 없는 시선,

굳게 다문 입.

그는 새하얗게 식은 손가락으로 문고리를 더듬었다.

— 딸깍.

안쪽에서 문이 조용히, 저절로 열렸다.


은빛 안개가 얇게 퍼졌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죠?”

남자의 목소리는 무너진 나무조각처럼 쓸쓸하게 갈라져 있다. 이류는 카운터 앞에서 조용히 눈을 맞춘다.

“세탁소예요. 그런데 옷은 받지 않아요.”


순간 남자는 작은 한숨을 토해내며 시선을 내린다.


“…그러면, 어떤 걸 세탁하나요?”

감정이요.

여기는 인생을 새롭게 리셋해 주는 곳은 아니에요.

다만, 오늘 손님이 숨을 한 번 더 여유롭게 쉴 수 있게

감정을 조금 씻어보는 연습을 하는 곳이죠.

혹시 오늘, 벗고 싶은 감정이 있으셨다면

안으로 들어올래요.”


딸랑-.

청아한 풍경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는 순간, 바깥세상은 뚝 끊겨 나갔다. 골목을 찌르던 날카로운 경적도, 재촉하던 발걸음 소리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남자는 마치 물속을 헤엄치듯, 묵직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헤치고 힘겹게 문턱을 넘어섰다. 세탁소 안은 밖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천장의 달항아리가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공기 중에는 오래된 나무 냄새와 라벤더, 프랑킨센스 향이 뒤섞인 오묘한 기운이 안개처럼 감돌았다. 그 고요한 바닥 한가운데, 동그라미와 네모, 세모가 기묘하게 어우러진 청연가의 문양이 홀로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류는 남자를 세탁 의자로 이끌었다.

의자가 저절로 남자의 체형에 맞춰 움직였다.

“오늘, 어디서 내려다본 적 있나요?”


남자가 고개를 툭 떨군다.

“… 옥상, 회사 건물이요. 야근을 마치고, 손에 있던 사직서를 막 구기고… 난간을 붙잡았죠.”


“거기서, 어떤 생각이 가장 선명했나요?”


남자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그냥, 편안해 보였어요. 저 아래가."

남자가 마른침을 삼키며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사라져도, 내일 아침 회사는 아무 일 없이 돌아갈 테니까. 나 하나 없어도 세상은 완벽할 테니까.

그 생각이 드니까……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이 풀리더라고요.

차라리 지금, 여기서 멈추는 게 모두를 위한 일인 것 같아서."

그의 손에 구겨진 종이와 흐릿한 눈동자에는

쉽게 털어낼 수 없는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가족도, 애인도, 요즘 연락이 끊긴 친구도… 다들 ‘괜찮다’ 고만해요. 정작, 진짜 내가 힘든 걸 누가 본 적 있나…

그 생각이 자꾸 쫓아와요.”


이류는 대답 대신, 남자의 약하게 떨리는 어깨를 눈짓으로 가만히 훑어 내렸다.

"그 무거운 거를…, 혼자 들고 계시느라 고생 많이 했어요. 이제 내려놓으세요."

이류의 손짓에 따라 남자의 두 발이 나무로 된 감정 빨래통 안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자신의 체온에 꼭 맞춘 듯한 따뜻한 물이 발목을 감싸자, 잔뜩 긴장해 있던 남자의 근육이 비로소 헐거워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쉴 때,

그 돌덩어리들이 어깨, 손끝을 타고 빠져나간다고 상상하세요."


이류가 남자의 등 뒤로 다가가 척추뼈를 따라 천천히 손바닥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남자의 명치끝에 꽉 막혀 있던 시커먼 돌덩이들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억지로 삼켰던 울음이었고, 짓눌린 자존심이었으며, 끝내 뱉지 못한 비명이었다.


"으으윽…."


남자가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이류의 손길이 어깨를 지나 팔꿈치, 그리고 손목으로 이어지자, 남자의 가슴속을 굴러다니던 검은 돌덩이들이 핏줄을 타고 꿀렁거리며 내려왔다.

툭, 투둑-.

남자의 손끝에서 검붉은 잉크처럼 진득한 액체가 물 위로 떨어졌다. 곧이어 딱딱하게 굳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조약돌처럼 풍덩 소리를 내며 나무통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맑았던 물이 순식간에 짙은 흙탕물로 변했다. 남자의 발이 담긴 물은 괴로움의 농도만큼이나 탁한 흙갈색으로, 때로는 멍든 것처럼 푸르뎅뎅한 색으로 소용돌이쳤다.


"뜨거워요… 가슴이, 너무 뜨거워요."

"괜찮아요. 곪았던 게 터져 나오는 중이니까."

이류는 묵묵히 물을 내려다보았다. 나무통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물살은 마치 세탁기가 돌아가듯 맹렬하게 회전하며, 남자에게서 떨어져 나온 검은 찌꺼기들을 잘게 부수고 희석시켰다. 독한 얼룩이 빠져나간 자리에, 비로소 희미한 숨길이 트이고 있었다.


이류의 눈에는 그 색이 더 분명하게 보였다. 답답한 회색, 누군가에게 억눌린 파란색, 자책하는 먹색이 실처럼 가늘게 빠져나와 물속 전체에 희미한 안개를 깔았다.

“오늘 들었던 말 있죠.” 이류가 말을 이었다.

“‘넌 왜 이것밖에 안 되니-’ ‘있으나 마나야…’

이런 말들이 진짜로 느껴지죠?”


남자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손가락과 발가락에서도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네.”

그 말이 당신이 된 건 아니에요. 지금부터 그걸, 당신 몸에서 떼어낼 겁니다.”


거짓말이에요.”

이류의 목소리가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그 말들이 진짜인 건,

그냥 그 사람들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 뿐이에요.

그때 묻은 감정이 당신이 된 게 아니라,

그냥 당신한테 들러붙어 있던 것뿐이에요.

옷에 묻은 때가 옷이 아니듯이요.”


남자의 입술 사이로 알 수 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근데 몸은 그걸 그대로 나라고 믿어버렸죠.”

이류가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지금 5번째 코드 자리에 있는 목이 조이고,

가슴이 눌린 거예요.

우리는 지금, 나라고 ‘믿어버린 감정’만 뽑아낼 거예요.

사실이 아닌데 사실처럼 내 몸에 박힌 것들.”


이류가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천천히 눈을 감고 가슴에 있는 돌덩이들이

어깨를 지나 팔을 타고 팔꿈치를 지나,

손끝으로 천천히 빠져나간다고 상상하세요.”


남자의 가슴에 똬리를 틀었던 돌덩이들이 꿈틀거리며 천천히 손끝으로 흘러내렸다. 남자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사람처럼 거친 숨을 연달아 짧게 토해냈다.

“뜨거워요…”


“괜찮아요. 당신 탓이 아니니까.”

물은 점점 더 탁해졌다. 남자의 발이 담긴 나무통 물이 짙은 흙갈색에 푸르뎅뎅한 덩어리들을 풀어놓으며 더 진해지고 있다. 그때, 남자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물 위로 떨어진 눈물방울이 동심원을 그리며 미세한 진동을 만들었다. 통 물결이 한 톤 옅어졌다.

“지금 어때요?” 이류가 물었다.

남자는 “… 숨이 조금은 쉬어지는 것 같다.” 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옥상 난간보다 지금은 이 나무통이 더 탈출구 같았다.


오늘 세탁소가 씻어낸 건 “넌 왜 이것밖에 안 되니”라는 말이 아니었다. 그 말에 덧칠돼 있던, “나 진짜 이것밖에 안 되나?”라는 그의 잘못된 믿음이었다.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대신 그 남자의 몸이 알아서 숨을 삼켰다 뱉었다.

“… 이상해요.” 드디어 남자가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옥상 장면이 떠오르면 난간에서 발이 저절로 넘어가는 것 같았는데…”

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눈빛이 완전히 생기를 찾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동태눈처럼, 먼 허공 어딘가를 맴도는 안개 같진 않았다.

“지금은…”

남자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 옥상 장면이, 오래전에 ‘지나간 일’처럼 느껴져요.”


이류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게 내가 입고 있던 감정이 한 겹 벗겨진 상태예요.”

이류가 설명했다.

나에게 일어난 사실 기억은 남아 있지만,

거기에 달라붙어 있던 독한 감정들만 빼낸 거죠.

이류는 남자의 어깨에서 손을 살포시 떼었다. 남자는 발바닥이 미지근하게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류가 덧붙였다.


오늘 감정 세탁을 한 번 했다고

내일부터 인생이 새하얗게 리셋되진 않습니다.

음… 조만간 또 무너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오늘 여기서 한 번 숨 쉬어본 사람은,

언젠가 자기 방이나 화장실에서도

그 숨을 다시 떠올릴 수 있어요.

그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제일 큰 세탁선물이에요.”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위로가… 되네요. 그게.”

“다행이에요.

진짜 위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쪽에 가깝거든요.”

이류는 통을 내려다보다 잠시 카운터 아래 빛바랜 나무상자를 떠올렸다.


세정부 옥패 뒷면,

‘本心本太陽…’으로 시작하던 오래된 글귀.

사람 마음은 원래 태양인데,

저 남자의 가슴속 햇빛이 이제야 조금 다시 비치는 것 같았다.

물결은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지만,

조금 전처럼 시커멓게 요동치지는 않았다.

“오늘은 응급수술이에요.” 이류가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이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까지만

가슴에 쌓인 감정을 닦았고요.”

이류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예요. 집에 가서,

스스로를 한 번이라도 더 안아주며 쉬세요.

계속 옥상 계단에 머물 필요 없어요. 그리고…

다시 ‘그 생각’이 일상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

그때는 다시 와요.

그땐, 오늘보단 당신이 더 많이 힘을 써야 할 겁니다.

오늘 닦은 건 손님 자체가 아니라, 손님이 들고 온 감정뿐이라는 걸, 우리부터 잊지 않으려고 해요.”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문이 열리는 순간 골목의 소음과 서늘한 밤공기가 다시 한번 실금처럼 세탁소 안으로 스며든다. 남자는 문을 나서 잠시 골목에 멈췄다. 밖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그는 작은 숨을 내쉬고 집이 있는 골목 방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뒤돌아본 세탁소의 불빛이 아른거리며 마치 또 다른 밤에도 그곳을 찾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류는 세탁통과 바닥의 파란 문양을 내려다보며 스스로에게 조심스레 다짐했다.

통에 담겼다 사라진 것은 사람의 생명 전자가 아니라,

오늘 그 사람이 둘러썼던 감정의 껍질.’


할머니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이것이 청연의 사명,

우리가 울음의 물줄기를 잇는 이유란다.’

감정 세탁소,

오늘 밤 첫 손님의 무게를 씻었다.

이류는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

감정 세탁통한 번, 강하게 물결을 울렸다. 그 진동이 조용히 골목 바닥을 따라 번졌다. 남자는 옥상 대신 골목길을 택해 천천히 집 쪽으로 발을 옮겼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조금 전 난간에서 한 발짝 물러난 발걸음이었다.

2. 씻기지 않는 손끝의 잔향

딸랑. 맑은 풍경 소리가 잦아들고, 남자의 뒷모습이 골목 어귀로 사라지자 세탁소 안에는 다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류는 텅 빈 의자를 잠시 응시하다가,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나무통 안에는 남자가 토해내고 간 감정의 찌꺼기들이 짙은 흙탕물이 되어 고여 있었다.

"후우……."

이류가 길게 숨을 내쉬며 배수구를 열었다. 바닥으로 검붉은 물이 소용돌이치며 빠져나가는 동안, 그녀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무심하게 닦아냈다. 물기는 닦였지만, 손끝을 타고 올라온 남자의 절망감은 찬 기운이 되어 뼈마디 사이에 눅눅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이류는 카운터 아래 나무 상자를 꺼내 그 안의 옥패를 가만히 쥐었다. 서늘한 옥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 미세하게 떨리던 손길이 그제야 잦아들었다.

'오늘도 한 사람분의 울음을 씻었다.'


하지만 씻겨 나간 물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 물을 만진 나의 손은, 어디서 말려야 하는가.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진 세탁소 바닥 위로,

청연가의 보랏빛 문양만이

아무런 대답 없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손끝이 다 갈라지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나 혼자서는 이 검은 물을 다 퍼낼 수 없다는 걸."


할머니의 말대로 우물보다 내 마음이

먼저 넘치기 직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수천 년간 굳게 닫혀 있던 청연가의 문빗장을,

헐거워진 내 손으로 먼저 열어두기로 한 것은.”

#오늘의 질문

요즘 당신 마음 안에도 어디까지가 ‘나의 일’이고, 어디부터가 ‘세상이 짊어진 일’인지

경계가 헷갈리는 지점이 있나요?

있다면, 지금 떠오르는 장면을

한 줄로 적어본다면 어떤 모습인가요?


# 오늘의 작은 미션

오늘 하루 동안,

이건 정말 내가 다 짊어져야 하는 일인가?”라는

질문이 스치는 순간이 있다면,

그때의 상황을 메모장이나 노트에

세 단어로만 적어 보세요.

(예: 회사 보고서 / 엄마 전화 / 단톡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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