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마음만 씻어주느라 정작 곪아버린 우리들에게
타인의 감정을 걸러내느라 정작 자신들의 밑바닥이
갈라지는 줄도 몰랐던 준호와 세정술사들.
그들이 이제 손님의 흔적 대신
자신의 지친 발을 세탁통에 담근다.
평생 삼켜왔던 피로와 짜증, 외로움과 답답함에
처음으로 이름을 붙여 불러보며, 오염된 필터였던
스스로를 비로소 씻어내기 시작하는 이야기.
감정세탁소의 밤은 오래도록 물기를 머금는다.
어젯밤, 처음으로 가운데 문양 한쪽에 실금이 생겼고
네 사람 모두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어둠이 걷혀도, 바닥 청연가 문양 깊은 곳엔
전날 감정의 잔향이 완벽히 사라지지 않는다.
어젯밤, 바닥 가운데 문양 한쪽을 따라 번지던 실금과
좀처럼 잠들지 못하던 네 사람의 숨이
아직 공기 속에 옅게 남아 있었다.
아침,
창밖에는 간밤의 비가 햇살과 뒤섞여
골목 보도블록 위로 얼룩을 남겼다.
세탁소 안엔 조용히,
밤새 내려가지 못한 감정의 보푸라기가 어른거린다.
경희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손끝의 시림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소파에 앉아 어제의 메모를 바라보곤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리 닦아내도 내 안에
새로 고이는 감정이 있다…
오늘은 꼭 티 내지 않고 버텨야지."
어젯밤 이불 끝까지 따라왔던 그림자 기운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준호는 출입문 근처에서 한참 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밤새 잠을 설친 탓인지 손발이 축축하게 무거웠다.
무거운 기운을 떨치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어제는 농담 한 줄 꺼내기도 버겁더라구요.
칙칙한 감정 손님들을 너무 태웠더니
이젠 내 몸에 뭐가 실려 있는 건지 헷갈려요.
내 짐인지, 손님 짐인지.”
지훈은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유리문 그림자를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오늘, 또 누구의 기척이 내 안에 스며들까.
나는 단순한 관찰자인가,
이제는 어쩌면,
이 세탁소 드라마의 한 장면에 던져진 배우인가.’
아침 모임.
이류는 평소와 달리
바닥 가운데 청연가 문양 위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어젯밤부터 문양 한쪽을 따라
생긴 실금이 더 깊어진 걸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 내 마음의 결은 평소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는데.”
그녀가 나지막하게 운을 뗐다.
경희는 손끝을 자꾸 주무르며 물었다.
“저 문양 옆으로 난 가느다란 금이...
정말 사람 마음까지 흔들어놓을 수도 있는 걸까유?”
이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청소하지 않으면,
서로의 마음 안에도 틈이 생기고
곪을 수밖에 없지.”
준호가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어제, 솔직히 내가 필터 역할 하다 보니
아직도 남의 감정 찌꺼기가 내 속에서 빠져나가지 않아요.
괜히 짜증만 늘고, 어제는 소리도 좀 질렀어요, 방에서…”
지훈은 말했다.
“요즘엔, 세탁 끝나고도 찌꺼기 같은 게 남아요.
제 거랑 남 거랑… 그냥 다 섞인 느낌?
누구 얘기만 들으면 머리가 좀 멍해요.”
“갈라지는 건 우물의 밑바닥만이 아니야.
우리 마음의 지반도 같이 금이 가기 시작했어.”
이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결심하듯 세탁통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류는 팀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탁-, 세탁통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오늘은 손님들 말고, 우리 속부터 씻어내자.
남의 감정을 닦아내는 세정술사도
가끔은 물에 들어가야 버틸 수 있어.”
이류는 말끝을 삼키며
바닥 가운데 문양 아래 감춰진
오래된 우물을 떠올렸다.
청연가 사람은 늘 남의 감정만 받는 우물이라고 믿어왔지만,
할머니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우물지기라고 맨날 퍼주기만 하면 쓰나.
가끔은 저 깊은 데 고인 네 속마음부터
길어 올려야 산단다.”
늘 다른 이의 감정을 받아주던 사람들이
자기 속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는 날,
세탁소 공기는 겉으로는 더 조용했지만,
사실 그날이야말로 우물이
제일 크게 흔들리는 날이기도 했다.
이제 세정술사들은 남몰래 각자 깊이 숨겨왔던
감정과 마주할 차례였다.
한동안 순서를 정하지 않은 채 침묵이 흘렀다.
가장 먼저, 준호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이번만큼은 씻겨주는 사람 말고,
씻김을 받는 사람이 되어봐도 될까요.”
경희와 지훈은 서로를 바라보며 작은 고갯짓을 했다.
준호는 두 발을 세탁통에 넣으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이게 정말 내 마음일까,
아니면 남들에게서 옮겨온 마음일까.
오늘만큼은 그 경계를 분명히 하고 싶다.’
이류와 경희가 조용히 옆을 지켰다.
“준호 씨, 지금 마음속에서
가장 먼저 만져지는 감정은 어떤 건가요?”
잠깐의 정적.
준호는 흐릿한 눈으로 어젯밤 쓸쓸하게 돌아눕던 어두운 방,
남의 울음이 내 등골까지 젖던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섰던 현관문,
모두를 천천히 떠올렸다.
“… 피로, 짜증, 외로움,
그리고
목구멍에 걸린 답답함.”
그의 두 발이 세탁통 아래로 쓰윽- 가라앉는 순간,
맑았던 물이 천천히 회색과 어두운 남색 사이
어딘가로 물들기 시작했다.
늘 농담으로 넘기던 말들 뒤에 사실은
이런 색깔이 숨어 있었다는 걸,
그는 오늘 처음으로 자기 입으로 정확히 확인했다.
경희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 감정에
나도 어느새 젖어드는 건가.’
지훈은 준호의 어깨너머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매일 보던 모습인 데...
오늘따라 마음이 좀 이상하네요.
속에서 뭔가 자꾸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류는 세탁통 주위를 따라 천천히 손끝을 움직였다.
세탁소 바닥, 가운데 문양 아래에서 알 수 없는
작은 울림이 점점 크게 전달되었다.
준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물 위로 작은 거품과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조각들이
갯벌을 기어 나오는 게처럼 자꾸 스며 나왔다.
준호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와-, 이거 보세요.
맨날 남들 감정 걸러내는 필터 노릇만 하느라
정작 제 속은 청소를 한 번도 못 했거든요.
필터 갈 때 지난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준호가 피식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근데 이렇게 다 쏟아내고 보니까 좀 알겠네요.
‘아-, 내가 진짜 용케도 버텼구나’ 싶어서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라니까요.
이제야 좀 살 것 같아요.”
오늘은 감정 세탁통이 돌아가는 날이 아니었다.
그 통을 돌리기 위해 묵묵히 제 몸을 깎아내던
'준호'라는 필터를 먼저 씻어낸 날이었다.
잠시, 준호와 지훈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물렸다.
입 밖으로 낸 말은 없었지만,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방금 쏟아낸 것들 말고도,
마음속 깊은 곳엔 아직 채 풀리지 않은
묵직한 덩어리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그 짧은 침묵 사이로,
아직 다 씻기지 못한 마음의 잔상들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공간을 채워갔다.
경희가 젖은 수건을 정리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원래 매일매일 닦어내도,
꼭 구석탱이에 남는 때가 있는 법이여.
그럴 땐 말이여...
혼자 애쓰지 말구, 서로 나눠서 닦는 겨.”
지훈은 평소처럼 장난 섞인 침묵으로 넘기거나,
괜히 먼 곳을 보며 말을 돌리는 대신
준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삼촌... 필요하면 그냥 말해요.
제가 공부는 몰라도, 남 얘기 들어주는 건
전교 1등 할 자신 있거든요.”
지훈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진심이 한 뼘 보태졌다.
세탁통이 경쾌한 알림음을 내며 멈췄다.
준호는 깨끗해진 세탁통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내 평소의 그 장난기 어린 얼굴로 툭-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거 필터 청소 제대로 했는데요.
오늘은 집에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소리 한 번 시원하게 지르고 나면,
진짜 기절하듯 꿀잠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준호의 너스레에 경희는 못 말린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었고, 지훈도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빼며
한결 가뿐한 숨을 내뱉었다.
경희는 감정 세탁이 끝난 뒤에도 어딘가 불안한 듯
자기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남들 옷은 박박 문질러 빨면 그만이여. 근디 말이여...
내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
이 시커먼 앙금들은 어디다 풀 데도 없슈.
가만 놔두자니 속이 다 짓물러 터질 것 같구...
가끔은 나도 모르는 내 마음들한테
잡아먹히는 건 아닝가 싶어 참말로 무서워유.”
경희의 목소리가 잠시 허공에 아지랑이처럼 흩어졌다.
세정술사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한 그 밤,
세탁소 가운데 바닥 문양에 남은 실선이 조금은 옅어졌다.
이류는 잠시 손을 들어 세탁소 안의 모든 빛을
한 번 끌어모았다가 다시 흩뿌린 뒤,
세정술사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마음, 너무 혼자서만 꽁꽁 싸매려고 애쓰지 말자.
그게 애초부터 혼자서만 다 짊어지고 버티라고
설계된 게 아니란 뜻이야.
그러니까 마음이 더 무거워져서 주저앉기 전에,
우리 그냥 이렇게 같이 나누자.”
세 사람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고백과 온기가 오간 뒤에도,
세탁소 구석진 곳엔 아직 말로 다 뱉지 못한 마음의 파편들이
실타래처럼 엉킨 채 희미하게 머물러 있었다.
집으로 향하던 지훈은 골목 끝에 멈춰 서서
세탁소 쪽을 무심히 바라봤다.
멀리서 깜빡이는 그 불빛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그는 밤공기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불빛마저 어둠 속으로 녹아들자,
지훈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가로등 불빛 아래 길게 늘어진 자기 그림자를
발끝으로 툭툭 차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내 마음을 얼마나 비워내고 또 뭘 채웠는지,
제대로 말 한마디 못 하고 그냥 와버린 것 같네.
왜 이렇게 마음이 묵직하지.
덜어내러 갔다가 오히려 더 큰걸 잔뜩 들고 온 기분이야."
지훈의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세탁소 안에는 다시 낮게 가라앉는 고요만이 남았다.
이류는 카운터 뒤에 잠시 멈춰 서 있다가, 바닥 한가운데
새겨진 청연 문양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몸을 숙여, 희미해진 실금을
오른손 검지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겉은 닦아냈으니, 이제 그 아래를 들여다볼 차례인가.’
그녀의 손길이 닿자 문양의 틈새가 아주 미세하게 벌어지며
보랏빛 선이 일렁였다.
빛은 마치 깊은숨을 들이마시듯,
순식간에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이류는 크게 숨을 한 번 고르고는
문양의 한복판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바닥이 아주 서서히, 발밑에서부터
아래로 꺼져 내려가는 느낌이 전해졌다.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길게 이어졌다.
어떤 날엔 그 끝까지 가보는 게 죽기보다 싫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피하지 말고
끝내 내려가야만 하는 밤인 것 같았다.
이류가 눈을 감았다 뜨자,
몸은 여전히 세탁소 한가운데 서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만큼은 이미 문양 아래
깊숙한 곳을 향해 고요히 침잠하고 있었다.
지하 감정창고.
첫발을 내디딘 그곳엔 맑은 물 대신,
안개처럼 뿌연 감정들이 끈적하게 엉겨
층층이 떠다니고 있었다.
어제 다녀간 손님에게서 빠져나온 눅진한 피로,
오늘 준호의 발밑에서 번져 나온 남색의 혼탁한 감정들,
그리고,
경희의 손끝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던 시린 기억까지….
그 모든 것들이 가느다란 실타래처럼 뒤섞여
공중에 위태롭게 머물러 있었다.
이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름이 등을 타고
길게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매일 세탁통은 비워왔는데,
여기... 생각보다 오래 고여 있었구나.’
창고 벽면 곳곳에는 얇게 눌린 주름 같은 흔적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처음엔 아주 미세했던 문양의 실금이,
이제는 지하 벽면까지 타고 내려와
가느다란 먹빛 주름으로 이어져 있었다.
최근 이 도시를 휩쓸고 간 울음과 분노들이,
손님들의 몸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이 아래 어딘가에 얇게 눌어붙어 있는 모양새였다.
이류가 손끝으로 벽 가장자리를 살며시 짚자,
보랏빛 물결이 잔잔하게 번져 나갔다가
이내 고요히 가라앉았다.
어디선가 할머니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했다.
“얘야, 마음의 물도 괴어만 있으면 저 우물 밑바닥부터
쩍쩍 갈라지는 법이여. 겉만 봐서는 도통 모르는 일이니께,
가끔은 저 깊은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봐야 혀.”
이류는 감정 창고 한가운데, 마치 멍이 든 채 일렁이는 듯한
연보랏빛 웅덩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오늘 세탁소 위에서 나누었던 짧은 울음과 고백들이
방금 막 가라앉아 자리 잡은 곳이었다.
‘이곳이 버텨주는 동안에는 다들 위에서 웃을 수 있겠지.
언젠가는 우리들의 울음도
이 깊은 곳까지 내려와야 하겠지만….’
손끝에 전해지는 저릿한 감각에 이류는
서둘러 손을 털어내듯 떼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지상을 향해 깊게 숨을 들이켰다.
문양을 타고 그녀의 마음이 천천히 위로 되올라왔다.
다시 세탁소 바닥을 딛자, 달항아리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조금 전보다 한결 부드럽게 느껴졌다.
이류는 마지막으로
바닥 한가운데 새겨진 문양을 소중히 어루만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요즘 당신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되감기 되는 말 한 줄이 있나요?
누군가에게 무심코 들었던 날카로운 한마디일 수도,
혹은 스스로를 다그치며 반복해서 내뱉던
무거운 혼잣말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가장 어지럽히고 있는 그 문장을
가만히 떠올려 보세요. 그 문장을 있는 그대로 적어본다면,
어떤 글자들이 그려지나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에,
마음속에 고여 있던 그 문장을
종이나 휴대폰 메모장에 가감 없이 적어 보세요.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
다음의 문장을 한 줄 더 덧붙여 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괴롭히던
그 첫 번째 문장 위에 작게 X표를 하거나
가느다란 밑줄을 그어 보세요.
오늘 당장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이건 언젠가 떼어낼 수 있는 얼룩이다’라고
표시해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저 당신의 마음이 숨 쉴 자리를
조금 만드는 과정이니까요.
지하 창고의 보랏빛 웅덩이가
당신의 말을 대신 받아줄 준비를 마쳤습니다.
#위로 #에세이 #판타지소설 #마음건강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