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집에 가기 싫어요"라고 처음 말한 날

'내 탓'이라는 오래된 문장을 지워가는 법

by 누리봄

파란 멍이 선명한 어린 하은이가

“내가 잘못해서 엄마가 화난 거라”라고 믿던 마음을

감정세탁소 물 위에 올려놓고

“누군가 화내고 휘두른 손은 그 사람의 선택”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순간,

‘내 탓’이라는 오래된 문장을 조금씩 지워내며

두려움의 그림자 속에서 비로소 혼자가 아닌 느낌을 배워가는 이야기



1. 손바닥 안, 땀에 젖은 연두색 실뜨개 인형

오후 내내 파자루니스 골목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감정세탁소 창가를 타고 흐르는 빗물은

멀리서 보면 꼭 눈물 자국 같았다.

창문 너머로 번지는 흐릿한 회색빛이

세탁소 안까지 조용히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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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류는 말없이 바닥 중앙,

청연 문양 위에 쭈그리고 앉아

손끝으로 깊어지는 실금을 천천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경희는 소파에 몸을 기대어

자신의 손끝을 조용히 만지작거렸다.

유난히 비 오는 날이면

손이 더 차가워지는 것만 같았다.


준호는 택시 모양 키링을 굴리다 말다 하며

어쩌다 한 번씩 시계를 올려다보았고,

지훈만이 세탁소 바깥의 낯선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곧 한 명이 올 거예요.

지훈이 조용히 말했을 때,

이류는 말없이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유리문 밖에 작은 실루엣 하나

비에 젖은 채 서 있었다.

소녀였다.


젖은 교복 자락,

닳을 대로 닳은 인형이 달린 허름한 검은색 백팩,

두 손을 불안하게 모으는 사이로

희미한 멍 자국이 드러났다.


소녀가 파란빛이 도는 문고리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자,

유리문이 스르륵— 부드럽게 열렸다.


어이구, 비를 요로코롬 맞고 다녀서 워쩐대...

얼른 들어와유. 이름이... 하은이라 그랬던가?


경희가 먼저 다가와 익숙한 듯,

그러나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네… 하은이요.”

하은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희는 얼른 노란 머그잔을 꺼내

따끈한 다행차를 내밀었다.


얼른 이거 좀 붙잡어 봐유.

손이 요러코롬 찬데 얼른 녹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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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이는 양손으로 컵을 감싸 쥐며

오랜만에 만져보는 ‘따뜻함’이라는 감각을

조심스럽게 더듬어보았다.


세탁소 한편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긴장이 얇은 안개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괜찮으면 오늘, 네 이야기 좀 해줄래?

이곳은 그냥 네 이야기를 들어주는 곳이야.


이류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빗소리를 살짝 밀어내고 닿았다.


하은이는 한동안 바닥만 바라보다가

가방에 매달린 인형을 살며시 떼어

손 안에서 만지작거렸다.


연한 연두색 실로 촘촘하게 짜인,

손바닥만 한 크기의 뜨개 인형.

언니가 직접 만들어 준,

세상에 딱 하나뿐인 선물이었다.

힘들 때마다 하은이는

이 인형을 꽉 쥐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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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집을 떠나던 그날 밤에도,

목 끝까지 차오르던 울음을 삼키며

이 인형만은 놓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연다는 건,

하은이에겐 아직도

온몸이 굳어질 만큼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작은 손끝에 매달려 비비 꼬이는 인형이

하은이 대신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은이는

세탁소 안에 있는 얼굴들을

차례로 한 번씩 훑어보았다.


경희 이모, 준호 삼촌, 이류 선생님, 지훈이.

지난번과 똑같은 얼굴들이라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어쩐지

조금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조용한 침묵이 한 겹- 흘러간 뒤,

하은이가 아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요…”

순간, 네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하은이에게로 향했다.


지난번에 여기 왔을 때,

경희 이모가

‘힘들면 힘들다 말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경희의 손끝이 아주 작게 떨렸다.




2. 회색 물결로 흩어진 "집에 가기 싫어요"

학교 친구한테…

아주 조금 말해 봤어요.

연두색 인형 다리를 만지작거리던

하은이의 손길이 살짝 느려졌다.


엄마 얘기는 아니고, 그냥…

‘요즘 집 가기 싫어’ 정도만.


하은이가

"집 가기 싫어요."

라고 말하는 순간,

이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누구에게도 말도 못 하고

혼자 골목 끝까지 달아나던

어린 날의 자기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이류는 그 한마디조차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데리러 와주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도망가는 거, 그거 아무 치도 않은 겨. 괜찮혀.
근디 말이여, 나중에는...
니 마음 우물도
니가 지켜야 할 때가 오는 법이여.”


사람들 앞에서

“나 요즘 좀 힘들어”라고 말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오늘 하은이는

그 어려운 말을 한 소절 꺼내는 용기

스스로 선택한 셈이었다.


"잉~ 그래서, 걔가 뭐라구 허디?"

경희의 눈매가 아까보다 훨씬 보드랍게 풀려 있었다.


하은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기억을 한 자락씩 끄집어내듯 입을 뗐다.


"그냥... '그래도 씻고 자'라고요.

근데 그 말이...

이상하게 되게 따뜻하게 들렸어요."


세탁통 안의 물결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연한 회색과 옅은 파랑이 층층이 섞였다가

다시 흩어지며 번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이류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 말 들었을 때 마음이 좀 어땠어요?"


하은이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거의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나쁘지 않았어요. 사실 엄마한테는...

절대 못 할 말이었거든요.

근데 그 친구한테는

조금은 털어놔도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경희가 손을 뻗어 하은이가 꼭 쥐고 있는 인형을

살포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 친구가 말이여.

입으로는 그렇게 얘길 했어도

그게 다 네 말을 들었다는 증거여.

속상허고 힘든 거 혼자 껴안고 있지 않고

밖으로 꺼낸 것만 해도

너는 참 장한 겨. 엄청 잘한 거여."


하은이는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때보다 더 힘들었나요?

아니면… 조금은 덜?"


이류의 질문에 하은이는

연두색 인형을 쥔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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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점점 더 자주 화를 내요."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전에는 시험 망치면 화내는 정도였거든요?

근데 요즘은 그냥…

자기 기분 좀만 나쁘면 갑자기 소리를 질러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진짜 내가 뭘 잘못했나 싶고


독서실 끝나고 집 들어갈 때 있잖아요,

현관문 열기 직전에

심장이 발끝까지 툭 떨어지는 기분이에요."

말끝이 떨리다 멈췄다.


인형을 움켜쥔 하은이의 손은

하얗게 질릴 만큼 떨리고 있었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이

금방이라도 넘칠 듯

눈망울을 가득 채워 올랐다.


경희가 천천히 다가와

하은이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야야~, 여긴 울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 없으니께 걱정 말어.

몸뚱아리든 마음이든,

힘들어 죽겄으면 그냥 힘들다 그려.

다 괜찮여~."

그 말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내려앉았다.


하은이는 숨을 한 번 꾹- 참았다가

천천히 내쉰 뒤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진짜 죽을 맛인데…

근데 힘들다고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엄마가 더 화낼 것 같아서 그냥 입 꾹 닫고 있어요.

다 나 때문이라고…

그렇게 말해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워요."


마지막 문장이 툭- 떨어지는 순간,

세탁통 속 물빛이 눈에 띄게 깊어졌다.

진한 파랑과 탁한 회색이 거칠게 부딪혔다가 섞이고,

다시 흩어지길 반복했다.


하은이 손에서 힘없이 빠져나간 연두색 인형이

바닥에 닿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경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몸을 낮추었다.


"어이구, 야야~!"


바닥에 닿은 인형을 재빨리 집어 든 경희는

정성스러운 손길로 인형을 털었다.

깨끗해진 인형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하은이에게 인형을 가만히 내밀었다.


"야야~, 이 인형 말여.

딴 사람 말고 니가 꼬옥 다시 쥐고 있었음 좋겄다.

?"


놀란 듯 동그래진 눈으로 경희를 살피던 하은이는

이내 안심하며 인형을 조심스레 다시 품에 안았다.


경희의 말이 떨어진 순간, 하은이 눈가에는

긴장이 풀린 자리에

따스한 안도감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네가 아픈 건,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이류의 목소리는 빗소리보다도 낮고 단단했다.


"오늘은 여기서

그냥 울어도,

아무도 널 나무라지 않아."


말이 끝나자 세탁통 안 물살이

돌아가는 결을 따라 조용히 흔들렸다.


하은이는 입술을 꽉 - 깨물었다가

조금씩 힘을 풀었다.


"진짜요…?

저 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 저 잘못한 거 아니에요?"


이류는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군가 화내고 휘두른 손은
그 사람의 선택이야.
그게 네 탓이 될 수는 없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하은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눈물 한 방울이 세탁통 안에 톡— 떨어져

잔잔한 물무늬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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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해졌던 회색 물결 사이로

연한 연둣빛이 희미하게 번졌다.

하은이가 품에 안은 인형과 비슷한 색이었다.


그와 함께 물빛이 아주 조금,

눈에 띄게 맑아졌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거칠게 뒤집히던 감정들이 세탁통을 한 바퀴를 돌아

조금씩 잔잔해지는 것처럼

세탁소 안 공기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은이는 감정 빨래통에서 천천히 발을 꺼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발가락이 말랑하게 풀리면서,

바닥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온기를

발바닥으로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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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기분은 좀 어때?"

이류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은이는 잠시 눈을 감고 자기 마음을 살피더니 대답했다.


"우리 엄마 생각하면…

솔직히 아직 좀 겁나거든요.

근데, 나만 혼자 남겨진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집에 가도… 아까만큼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 소리를 듣던 경희가

참았던 숨을 ‘후’ 하고 내뱉으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려~ 뭐

하루아침에 겁대가리가 싹 달아나겄냐?

그런 건 욕심이여. 그냥...

‘아이고, 나만 이렇게 속 시끄러운 게 아니었구나’ 하고

그거 하나만 깨닫고 가도 충분혀.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별거 있겄어?

혼자 끙끙 앓지 말어, 잉~."


하은이는 연두색 인형을 가슴께로 끌어안았다.


"저번에는 진짜...

집 가자마자 이불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거든요.

근데 오늘은... 언니 생각하면서

조금만 울고 자려고요.

그러고 나서 내일은...

친구한테 한 번 더 용기 내서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 요즘 사실 좀 많이 힘들다고."


이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마디가 진짜 큰 걸음이에요.
오늘도, 잘 해냈어요."


하은이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


"… 감사합니다."


세탁이 끝나고 난 뒤,

하은이는 인형을 새삼스레 내려다보며

손에 더욱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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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나서기 전, 하은이는

연두색 인형의 매듭을 한 번 더 단단히 고쳐 묶었다.

이번에는 풀어진 실밥을 조금 더 꼼꼼하게,

조금 더 세심하게 조였다.


비 내리는 골목으로 나서자

가방에 달린 인형이

걸음마다 살랑살랑 흔들렸다.


골목 입구쯤에서 하은이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한 손으로 연두색 인형을 꼭 쥔 채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내가 잘 해냈어.


하은이는 처음으로

그 말을 자기 자신에게 건넸다.

그리고 속으로 한 줄을 더 덧붙였다.


이제 집에 가도…

그전처럼 그렇게 겁나지는 않을 거 같아, 진짜.


짧게 숨을 고르고 나서야

또렷한 첫 발을 빗속으로 천천히 디뎠다.


인형의 작은 얼굴에도

봄비가 톡톡 떨어지며 젖어갔다.

그 작은 몸에도

하은이의 용기가 함께 실려가는 듯했다.




3. 유리문에 번지는 옅은 파란 잔향

하은이의 뒷모습이 골목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자,

세탁소 안은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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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하게 젖은 공기 사이로 비릿한 빗물 냄새와,

누군가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숨을

겨우 터뜨리는 소리만이 띄엄띄엄 들려올 뿐이었다.


가벼운 농담조차 건넬 수 없는 무게감이

모두의 입술을 짓눌렀다.


준호는 문득 자신의 집 도어록 소리를 상상했다.

오늘 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 짧은 순간에도

아까 하은이가 남긴 잔상이 발목을 잡을 것만 같았다.


"집에 가기 싫어요."


그 한마디가 마치 세탁기 속 빨래처럼

마음속에서 엉킨 채 풀어지지 않았다.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만은 하은이가 남기고 간 슬픔의 궤적을 따라

같은 곳을 향해 고요히 유영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 무거운 침묵을 가르며

경희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첨엔 저 아이가 아주 그냥 움츠러들더니,
인제는 제 발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구먼.

내 마음도 저렇게 볕에 말린 빨래마냥
보송보송하게 풀릴 날이 오긴 오겄지?
그래도 되는 거잖어, 안 그려?’

창밖으로 흩뿌리는 회색 빗줄기를 바라보며

경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나도 언젠가는...

저 아이처럼 용기를 내보고 싶네요.

우리가 되레 오늘 손님한테 한 수 배웠네요."


준호의 목소리에는 평소 장난기나 지친 기색이라곤 없었다.

그저 오늘 세탁소를 다녀간 어린 소녀가 보여준

그 단단한 마음씨에 대한 진심 어린 감동일 뿐이었다.


용기라는 것이 반드시

거창한 외침은 아니라는 걸,

오늘 다시금 깨닫네.


지훈은 세탁통 안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해묵은 감정들을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본 하은이의 뒷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였으면 저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

하- 진짜 대단하다, 쟤도.


"워매 놀라 죽는 줄 알았네! 그래도 뭐,

우리 다 같이 여기서 꿋꿋하게 가 보는 거쥬."


경희의 말에 준호와 지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이류는 그들을 향해 조용하지만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에휴, 나두 언젠가는 저 애매맹키로

속엣말을 그냥 툭 하니

꺼내놓을 날이 올랑가 모르겄네...


경희는 하은이가 골목 끝자락에서 안 보일 때까지

한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소파에 다시 앉아

자신의 시린 손끝을 꼭 감싸 쥐었다.


"감정 필터에 너무 오래 남아 있으면,

나도 내 감정을 못 알아볼 테니…

오늘 밤엔 ‘어이~’ 소리라도

콱— 시원하게 한번 질러봐야겄다!"


준호는 세탁통 바닥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훈은 유리문 위로 번지는

옅은 파란 잔향을 한동안 바라보며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이제 슬슬,

내 감정도 누군가한테 털어놓을 준비가

됐으면 좋겠다.’


유리문 색깔 묘하네.

에휴, 모르겠다.

나도 이제 슬슬, 누군가한테 내 고민도 좀…

그냥 다 말해버리고 싶다.’


세탁소 바닥 가운데 청연 문양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이류

실금 위에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살포시 올려두고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비가 내릴 때
모두가 우산을 같이 쓸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혼자서 다 맞을 이유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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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류는 이 말을 모진 비를 홀로 맞던

어린 날의 자기에게도 당당하게 들려주고 싶었다.

이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감정술사들의 얼굴을 차례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언제보다도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가

이류의 입가에 피어올랐다.


달항아리 등에서 토해내는 빛은

마른 듯, 그러나 어딘가 젖어 있는 세탁소 안으로

수묵화처럼 번져나갔다.


건조함과 눅눅함이 공존하는 기묘한 공기 속으로,

달항아리 고요한 빛 입자가

소리 없이 박혀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푸르스름한 멍이 남긴 감정의 여운이

또 하나의 자그마한 위로가 되어

세탁소 구석구석에 함박눈처럼

아주 천천히, 소복 소복하게 쌓여갔다.



# 오늘의 질문

요즘 당신에게도

다가가기가 조금 두려운 곳’이 있나요?

그곳에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잠깐이라도

나, 사실은 좀 힘들다.”라고

스스로에게 먼저 말해줄 수 있다면,

오늘 밤 그 문 앞에서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 오늘의 작은 미션

1.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살짝 굳어지는

정말 가기 두려운 곳’을 한 줄로 적어 보세요.

(예: 집, 회사, 학교, 병원, 단톡방…)


2. 그 아래에 이렇게 적어 주세요.

사실은 나, 거기 가기가 좀 무서웠어.


3.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의 나에게 한 줄을 더 건네 봅니다.

(예: “포기 안 하고 여기까지 온 나, 정말 잘 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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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종이 한 장, 휴대폰 메모장, 머릿속 어느 구석이라도 좋습니다.


오늘, 그 문 앞에 선 당신이

스스로에게만큼은

조금 더 다정해지기를 바라봅니다.




#심리소설 #위로 #가정폭력 #자존감 #감정세탁소 #공감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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