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의 잿빛 냉기를 녹이는 감정세탁소의 따뜻한 연대기
죽음과 어린 시절의 그림자에 갇혀 있던 경희가,
세탁소 세정술사들의 곁을 빌려 처음으로 자신의 울음을 꺼내고
“오늘은 그림자보다 햇살 쪽에 조금 더 서 있어 봐도 되겠다.”라고
스스로를 믿어보기 시작하는 날의 이야기.
파자루니스의 오후,
유난히 밝고도 따스한 햇살이
감정세탁소 바닥에 덧칠되어 있었다.
밖은 어느새 초록이 가득하고,
창문엔 바람이 스치며
잎이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경희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세탁소를 몇 번이고 밀고 닦았다.
손끝이 오늘따라 더 시렸다.
카운터에 앉아 스티커 메모를
붙였다 떼었다 반복하다,
불현듯 커튼 뒤에 비치는 어두운 그림자에
시선이 멈췄다.
‘오늘은 왜 이렇게 그림자가 많은지…’
응급실 복도 한 구석에서 마주치던
죽은 이의 잿빛 그림자,
차갑게 식은 손목,
과거에 자꾸 걸리는 발끝,
지난밤 내내 꿈에서 만난 잿빛 웅얼거림과
죽은 이의 차가운 손이 자꾸 맴돈다.
그리고 오래전 망가진 내 울음의 자리.
그 모든 잔상이
오늘은 세탁소 구석마다 스며 있었다.
경희는
며칠 전 소녀 손님이
연두색 인형을 꼭- 쥐고
세탁소를 나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응급실 복도에서 참아온 울음과
죽은 이들의 마지막 눈빛에 붙들려 있던 심장은
오늘따라 유난히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녀의 감정 세탁에
묘하게 용기와 안도를 느꼈었다.
‘나는 왜 아직
내 울음 하나 매듭짓지 못했나…’
문득 부끄럽고도 자조 섞인 생각이 스쳤다.
준호가 화분을 옮기다 말을 걸었다.
"아이고, 이모님! 어디 편찮으신 거예요?
손끝이 아주 서리 내린 것처럼 파랗게 질렸네.
누가 보면 손가락으로 얼음과자라도 만드신 줄 알겠어요!
괜찮으신 거죠?"
경희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뉴~ 뭘 그려.
오늘따라 맴이 좀 더 시린 것이...
그냥 그래서 그런 거여유."
지훈이 문가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어... 저기요.
아까 누가 문 앞까지 왔다가 바로 간 것 같거든요?
근데 기분 탓인가...
뭔가 좀 쎄한 느낌이 계속 남아서요."
경희는 순간
숨이 너무 무거워지는 느낌에
고개를 잠시 숙였다.
자신도
얼마나 오랫동안
세탁소 문 앞에서 망설였는지…
작게 숨을 삼켰다.
그때 이류가 다가왔다.
"경희 씨,
오늘은 우리끼리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각자의 슬픔을
투명하게 꺼내놓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때요?
그게 그림자든 무엇이든,
누구도 혼자서 온전히 감당하게 두고 싶지 않아서요."
경희는 망설이다 서서히, 세탁통 앞 의자에 앉았다.
햇살이 머리와 손끝에 번졌고,
등 뒤엔 여전히 오랜 그림자가 조용히 늘어져 있었다.
경희는 세탁통 앞에 앉은 채,
손등을 어루만지다 잠깐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어두운 방 한구석-
작은 몸을 이불에 파묻고,
밤마다 숨죽여 울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베갯잇을 적신 축축한 흔적과 문틈으로
새어 들던 낯선 실루엣이 망령처럼 되살아났다.
발바닥을 타고 오르던 그날의 서늘한 기운이
이 순간, 현재와 맞물리는 순간,
온몸의 혈관이 얼어붙는 듯한 전율이 손끝에 머물렀다.
“어릴 때…
내 옆에는 늘상 그 의붓아버지 닮은
낯선 그림자가 찰거머리처럼 붙어 댕겼어유.
숨도 못 쉬는 밤마다
제일로 무서웠던 게 뭔 줄 알아유?
내가 암만 소리 내서 울어도 세상천지에
날 알아줄 사람 하나 없을 거라는...
그 생각이었슈.
그러다 보니까 진짜 울음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이제는 나도 잘 몰러유.
응급실에서 그 시커먼 죽음의 그림자를 볼 때마다유,
내 속에서도 그놈의 그림자가 같이 쑥쑥 크는 거 같아서...
참말로 매일이 두렵고 불안해 죽는 줄 알았슈.”
끝내 버티지 못한 경희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세탁통 물을 가르던 다리가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고백이 공중에 흩어지기도 전,
발치에서부터 흐릿한 잿빛 파동이 느릿하게 번져나갔다.
경희가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할 때,
준호가 넉살 좋으면서도 진심 어린 말투로
핸들을 돌리는 듯한 손짓을 하며 말했다.
"에이 이모님,
나라고 뭐 맨날 핸들 잡고 웃기만 했겠어요?
나도 왕년에는 집구석 골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눈물 콧물 좀 뺐다니까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에도
와이퍼 딱- 켜고 달리다 보면,
우리 마음도 똑같아요.
아무리 깜깜한 밤 같아도, 가끔은 그렇게
햇살 한 줄기 품고 달리는 날이 오는 거거든요. "
지훈이 바닥을 툭툭 차며 쑥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뭐... 진짜 힘들 때는 답 안 나와서
맨날 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잠수 탔거든요.
누구한테 말하기도 좀 그렇고 해서
그냥 꽁꽁 숨어있기만 했어요."
준호가 조심스럽게
경희의 손등을 따뜻하게 감싸며 머그잔을 건넸다.
“아이고~ 이모님,
여기서 눈물 좀 찔끔한다고 누가 뭐라 하겠어요?
진짜루 울고 싶으면 그냥 시원하게 한 판 쏟아버려요!
남 눈치 볼 거 뭐 있어?
그리고 오늘은 제가 커피를 아주 까맣게 내려왔거든요?
원래 속이 시릴 땐 이렇게 뜨겁고 쓴 게 최고여~”
그 말에, 경희는 순간 피식 웃었다.
준호가 손가락 끝으로 잔을 딱 잡더니,
탈탈 흔들면서 말했다.
“자자, 여러분! 오늘은 말이야...
우리끼리라도 커피잔 하나씩 장전하고
‘짠’ 한 번 합시다!
뭐 입 아프게 ‘힘내라, 파이팅해라’
이런 뻔한 소리는 안 할게.
그냥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얼굴 보고 있는 게
나한테는 최고의 박카스고 보약이지,
안 그래요? 자, 다들 잔 들고!
지훈이 살그머니
초코파이를 탁자 위에 꺼내 놓았고,
네 사람 모두 각자 잔을 들어 살포시 부딪혔다.
커피 잔 속에서 작게 퍼지는 향과
간식의 달달함이 울음 위로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지훈이 쓱- 맞장구쳤다.
"나 진짜 진심인데,
나중에 준호 삼촌이 울면
나도 그냥 같이 울어버릴 거예요.
구라 아니고 진짜루요."
경희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마지며
따사로운 온기를 손끝부터 온몸으로 흘려보냈다.
"아유, 말도 마랴...
여기 앉어갖고 요렇게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쩌기 밖에서 마시는 거랑은 차원이 대간히 다르네유.
나는 뭐...
시방 세상에 요렇게 뜨끈하고 마음 편한 데가
또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잖어유.
아유, 참말로 좋다아~"
청연 문양 한가운데 잔잔한 실금 위로
연노랑 빛의 잔물결이 스르르- 번졌다.
조금 전까지 짙었던 실금들이
햇살에 부드럽게 녹아들어
연해지고 있었다.
얼굴을 잠깐 커피잔에 포개며,
천천히 고였던 울음을
세탁통 너머로 조용히 흘려보냈다.
작은 흐느낌이
실내 공기를 파랗게 울렸다.
준호가 컵으로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아이고, 여기 뭐 사는 게 별거 있나?
다 거기서 거기지, 안 그래요?
근데 말이야, 요 씁쓸한 커피 한 잔에다가
입에 착 달라붙는 달달한 당분 딱 보충해 주면 말이야...
머리 싸매고 있던 걱정거리들도
'어이구, 형님 먼저 가쇼~' 하고
슬쩍 도망가 버린다니까?
이게 바로 '당 충전'의 마법이지, 으허허-”
지훈이도 고개를 까딱하며 거들었다.
“에이~, 맞아요.
우리 다 같이 찐하게 한바탕 울고 나면,
분명히 다 같이 개 웃는 날도 올 거예요.
진짜라니까요?”
경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직접 따라 세정술사들에게 건넸다.
그리곤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며
빛이 번지는 창쪽에 서서 중얼거렸다.
“아유... 오늘은 말이여,
쬐깐이라도 그늘진 데 말고
볕 잘 드는 양지에 앉아서 엉덩이 좀 지지고 싶네유.
이제사 진짜루...
내 마음도 슬슬 뜨끈해지려나 봐유.
참말로 좋구먼.”
그 미소는,
오래도록 그녀의 속에 숨어 있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마음속에서 꺼내 온 선물이었다.
경희는 살짝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긴장이 풀리고
머릿속이 아주 가볍게 빈 느낌에,
괜히 웃음까지 배어났다.
'정말…
그림자가 조금은 줄어든 걸까?‘
옅은 햇살이 귓불까지 번지는 게
새삼 낯설고 기분 좋았다.
준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들 말어~
나중에 내가 진짜 눈물 콧물 쏙 뺀다 해도 말이야,
그거 싹 다 세탁통에 넣어가지고
탈수까지 쫙 돌려버릴 거니까!
내 잠자리인 이불에까지 눈물 자국 남겨서 축축하게 만들면,
그게 또 등짝 스매싱 각 아니겠어?
내 슬픔은 딱 세탁통 안에서만 '윙윙' 대다 끝나는 겨.
깔끔하게!"
세정술사들 한 명씩 경희 곁으로 다가와
저마다의 방식으로
손, 어깨, 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마음을 보탰다.
어깨 위에 머문 묵직한 손바닥과
등을 토닥이는 조심스러운 손길에는,
백 마디 말보다 깊은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그 짧은 접촉만으로도
오래된 혼잣말들이 조금은 덜 시리게 느껴졌다.
세탁통 물살 아래에서
경희만의 오래된 시린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잃어 갔다.
차갑게 얼어 있던 기운이
햇살에 데워진 물살에 섞이며
조금씩 풀려 내려가고 있었다.
경희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봤다.
햇살에 나뭇잎 그림자가
벽 위를 흔들었다.
경희는 세탁소 바닥 한가운데
청연 문양 위를 한참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아주 가볍게
문양을 쓸었다.
그런 바람을 처음으로,
스스로의 마음속에 또렷이 적어두었다.
문양 한복판에 고였던 감정의 찌꺼기가
햇빛에 더 옅어지며 조금 더 투명한
보랏빛 결을 그렸다.
경희는 잠시 잠깐 생각에 잠기다,
자신이 즐겨쓰는 탭 메모판을 꺼냈다.
펜 대신 손가락으로 하얀 메모지에
작은 꽃잎을 그렸다.
조금 전 세탁통 물살 아래로 흘러가던
경희만의 오래된 시린 그림자가
이류 눈엔,
이제 햇살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이류는 그 모습을 보며
세정부 옥패 뒷면에 새겨진
한 구절을 떠올렸다.
…
…
‘사람 마음은 원래 태양’이라는
할머니의 말씀이
오늘따라 더 또렷하게 와닿았다.
경희의 마음속 태양도,
아주 조금은 다시
고개를 드는 중인지 모른다.
경희는 조용히 속삭였고,
그 미소는 이제 머릿속이 아니라
얼굴 위에 환하게 번졌다.
완전히 환해지지 않아도, 오늘 내딘 한 걸음이
어제보다 반 발짝쯤 햇살 쪽이면
그걸로 충분한 날도 있다는 걸
경희는 처음으로
믿어보기로 했다.
그 순간 준호 휴대폰에서
생활감 넘치는 벨소리가
띠링-, 울렸다.
별 것 아닌 소음에
팀원 모두가 피식, 나직하게 웃었다.
네 명은 잠시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각자 자신만의 내일을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이류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이제,
각자의 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 정도는
서로에게 기꺼이 내보여도 괜찮지 않을까요.
서로의 등에 온기 어린 햇살 한 줄기
얹어준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거죠.
저는 내일도 이 자리에 머물며,
누군가 미처 뱉지 못한 마음의 울림에
조금 더 깊이 귀를 기울이고 싶어요."
준호가 너스레를 떨며 덧붙였다.
"아유, 오늘 밤엔 말이야...
거울 보면서 내 이름 석 자 딱 불러주고,
로또 번호 대신 꿈 한 줄 근사하게 적어봐야겠어.
맨날 남들 이름만 부르고 살았지,
정작 내 이름 불러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
오늘은 나 자신한테 ‘준호야, 고생했다!’ 한마디 해주고
폼 나게 꿈나라로 퇴근해야겠구먼. 으허허!”
지훈은 유리문 너머를 향해 말했다.
“아, 저 내일부터는요.
누가 먼저 웃어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제가 먼저 ‘하이’ 박으면서 인사 때리려고요.
그게 더 간지 나잖아요, 안 그래요?”
경희는 팀원들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다,
아주 조용히 말했다.
“내일부터는 말이여, 하루에 하나씩...
내 마음속 그늘진 데다가 해동 좀 시키게
햇살 한 쪼가리씩 딱딱 붙여놓으려고 그려유.
맨날 남들 뒤치다꺼리하느라
내 마음은 시커멓게 멍든 줄도 몰랐잖어.
이제사 나도 좀 훤하게 살아야지 않것슈?
참말로 그래유~”
세탁소 안으로 들어온 햇살이 공간을 말없이 깨끗하게 했다.
저마다 가슴속에 품어온 눅눅한 상처와
미처 지우지 못한 그늘진 기억들이
그 빛의 품 안에서 가늘게 떨리더니,
어느덧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하얗게 바래갔다.
유리문 밖 골목을 멍하니 바라보던
경희의 입술 사이로 낮은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뭐, 살다 보믄 그런 날도 오겄지.
내가 젤 먼저 이 문 열고 나가서,
그런 날이 얼른 왔으믄 좋겄구만."
요즘 문득문득, 마음 한 구석에
오래 눌러둔 ‘그림자 같은 기억’이 하나쯤 떠오르나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턱 막히고
온몸이 긴장되곤 하죠.
오늘 하루 중
그 그림자가 아주 조금이라도 흐려졌던
순간이 있었을까요?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라고 말해줄 수 있는 장면이 있다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시나요?
1.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서늘한 ‘그림자 같은 기억 조각’을
한 줄로 꺼내어 보세요
2. 숨 가쁜 하루 속에서,
그 기억이 조금 가볍게 느껴졌던 순간을
한 장면만 떠올려 보세요.
3. 그리고 그 장면 위에
이렇게 한 줄을 살짝 얹어 주세요.
“완전히 괜찮지 않아도,
이 순간만큼은
내 마음에도 햇살이 한 줌은 있었다.”
종이든, 휴대폰 메모장이든,
그냥 머릿속이든 상관없습니다.
오늘의 당신이
“그림자를 없애야 한다”가 아니라,
“여기까지 버텨온 나에게
햇살 한 줌은 붙여줘도 되겠다”는 마음을
한 번만 허락해 보는 날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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