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머리끈과 두 겹의 물결

감정은 내가 아니라, 나의 것. 자책의 화살표를 돌려 나를 지키는 연습

by 누리봄

회사 화장실에서 늘 무너진 뒤에야 울던 여자가,

감정세탁소에서 배운 숨 고르기와

‘수치심에서 분함으로’ 화살표 돌리기를 연습하며,

무너지기 전에 내 마음 신호를 알아차리고

여기까진 내 몫, 여기부턴 저 사람 몫”을

조금씩 가려 보기 시작하는 이야기.


1. 연두색 인형이 가르쳐준 용기


유리문이 조용히 열렸다.

젖은 운동화, 연두색 인형이 매달린 검은 백팩.

한 번 이곳을 다녀간 작은 손님,

하은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만 내밀었다.


경희가 먼저 일어섰다.

"어이구, 우리 하은이랴? 오늘은 무쟈게 일찍 왔네잉."

하은이는 세탁소 안으로 쏙- 들어오진 않고

문턱 근처에서 가방 끈만 꼭 쥐었다.


"선생님… 저, 그날 말했던 거요…

진짜로 큰맘 먹고 친구한테 한 번 더 얘기해 봤거든요."


경희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어이구, 그려? 그래서… 뭐라고 말해봤는디?

속 시원하니 다 뱉어냈어?“


하은이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나 요즘 사실 좀 힘들어'라고…

그렇게 말했어요."

하은이는 가방에 달린 인형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친구 앞에서…

저도 모르게 좀 울어버렸거든요."


경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오매, 그랬대? 그래도 말이여,

그 친구 앞에서 눈물 쏙 뺐다는 거는 이제

혼자서만 끙끙대지 않겄다고 맘먹었다는 거 아녀.

그거 아무나 못 허는 겨.

참말로 큰일 혔네, 우리 하은이가. 아주 잘 혔어."


하은이는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요… 진짜 집 가기 싫을 때 있잖아요.

그런 날엔 친구랑 편의점에서 라면 하나씩 먹고 가요.

집 들어가기 전에…

그냥 잠깐이라도 숨 좀 돌리고 싶어서요."


잠시 머뭇거리던 하은이는 연두색 인형을

한 번 꼭 쥐고 조용히 덧붙였다.


"그래도… 전에 이류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요.

엄마가 화내는 게 다 내 잘못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요즘은 가끔 그렇게 생각해 보려고 노력 중이에요."


이류는 세탁소 안쪽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생각만 해도,

오늘은 이미 절반은 잘 해낸 거예요."


하은이는 "네…" 하고 대답하곤 세탁소 안으로

더 들어오지 않고 연두색 인형을 가슴에 꼭 안은 채

다시 골목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문이 닫히자,

서라울시 골목 공기엔

잠깐,

작은 숨 하나가 살며시 더해진 듯했다.


파자루니스의 저녁 공기는 며칠 사이 조금 가벼워졌다.

비가 그친 골목 위로

습기 대신 묵은 먼지만 얇게 깔려 있었다.

대신, 이류 손끝엔 한 번 씻겼던 감정의 잔향이

다시 서라울시 골목 쪽으로 모여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감정세탁소 유리문 위에서

타자기 소리가 느린 속도로 울리고 있다.


감정 세탁소
감정은 내가 아니라, 나의 것이다.


달항아리 불빛은 전보다 한 톤 누그러져 있다.

바닥 가운데 청연 문양을 가르던 실금도

덩달아 진행 속도를 멈춘 듯

옅은 연보랏빛으로 얇게 덮여있다.


실금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으나,

손끝으로 그 표면을 훑어 내려가자

뇌를 자극하던 예리한 통증 대신

미미한 잔상 같은 저릿함만이 전해졌다.


이류는 문양 위에 손을 얹고, 그 너머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에너지 파동을 정교하게 리딩했다.


‘오늘 느껴지는 이 파동은… 새로운 상처가 아니야.

흩어지고 조각났던 마음의 에너지가

제자리를 찾아가며 일으키는 치유의 진동이겠군.'


이류는 세정부 옥패를 처음 받던 날을 떠올렸다.


“야야, 진짜 세탁이라는 거는 말여…

때만 한 번 빼는 게 아녀.

어디서 길을 잃고 헤매던 마음 한 조각이,

제 집 찾아 돌아올 수 있게시리 길을 터주는 게 진짜배기여.”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옥패와

낡은 반지를 손바닥에 꾹- 눌러 쥐여주었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이곳을 찾은 사람을 볼 때마다

이류는 그 말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해 가는 중이었다.


가운데 문양 안쪽에서 익숙한 파동이 조용히 몰려왔다.

경희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세탁소 문을 열었다.

걸레를 야무지게 한 번 더 헹궈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후,

바닥을 쓱쓱- 닦으며 중얼거렸다.


“어유, 오늘은 공기가…

어제보단 덜 서늘허네유."


손끝은 여전히 시렸지만, 며칠 전처럼 마디마디가

아릴 정도는 아니어서 손끝에 봄이 온 듯했다.


경희는 소파 옆 스티커 메모판 한쪽에 붙어있는

전에 그려둔 작은 꽃잎 하나와
‘내 마음에 햇살 한 줌 심기 – Day 4’

메모를 흘끗 훑어보고 짧게 ‘휴-’하고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기냥…

저 손님 하는 얘기나 가만히 들어줘야겄다.

내 속 억울한 거 까지 괜히 보태서

얘기에 껴넣지 말고 말이여.”


준호는 카운터 아래 서랍에서

과자 봉지를 쓰윽- 꺼내다 말고,

버릇처럼 스마트폰 화면을 툭 눌러 한 번 들여다봤다.


"아유, 말도 마세요.

어제 야간엔 택시 손님 세 분이 줄줄이 타가지고는,

각자 인생 드라마 한 편씩을 찍고 내리더라고요.

덕분에 남의 집 사연이 귓구멍까지

아주 찰랑찰랑하게 찼다니까요."


준호가 넉살 좋게 너스레를 떨며 농담을 던졌지만,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는 손끝 동작에는

어제부터 쌓인 묵직한 피로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랴도 요새는 좀 분간이 가나벼?

이게 내 팔자소관인지,

아니면 손님이 들고 온 고민보따리인지 말이여.”


경희가 슬쩍 떠보듯이 묻자,

준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 그래도 예전보다는 좀 낫죠.

오늘은 제 고민 보따리까지 세탁통에 같이 때려 넣고

돌리지 않게끔, 아주 이 악물고 연습 좀 해보려고요.”


유리문 옆에서 준호는 서라울시 골목길을 멍하니 내다보며,

가슴 깊이 공기를 한 모금 들이켰다.

넉살 좋게 대답은 했지만,

그 작은 숨결엔 왠지 모를 결연함이 묻어 있었다.


‘오늘… 기척이 하나.

근데, 처음은 아니다.’


서라울시 골목 공기 속에 한 번 씻긴 울컥 임의 잔향이

얇게 떠다니고 있었다.


“오늘… 곧 한 명이 올 거예요.”


지훈이 조심스럽게 천천히 말했다.


이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순간, 유리문 밖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또렷해졌다.


검은 코트, 단정하게 묶인 분홍 머리끈.

몇 달 전, 회사 화장실에 몰래 숨어

분홍 머리끈을 매만지며 울던 그 여자가,

이번엔 숨을 꾹 다문 얼굴로 세탁소 앞에 서 있었다.


유리문 위로 또박또박 생겨나는 문구를

따라 읽는 눈빛이 살며시 떨렸다.


감정은 내가 아니라, 나의 것이다.


여자는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맞아…

그때도 이 말 한마디가 참 이상할 만큼 힘이 됐었어.”


그녀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분해진 손길로,

푸른빛이 감도는 문고리를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스르륵- 유리문이 열렸다.

경희가 먼저 바짝 다가가 손사래까지 쳐가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이구, 어째 또 물먹은 솜뭉치 매냥

기운이 그냥 축~ 처져서 왔대유?

누가 보면 아주 세상 짐은 혼자 다 짊어진 줄 알겄어.

얼른 들어와유, 얼른!”


여자는 쑥스러운 듯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다시 발걸음이 여기로 닿았네요.

이번에는 마음이 무너져 내려

울음이 터져 나오기 전에 서둘러 들어와 봤어요.”


경희가 따뜻한 다행차를 건넸다.


여자는 조심스레 세탁소 안으로 들어와

컵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앉았다.

차의 온기가 손바닥에 스며들자,

가슴에 웅크린 긴장이

세탁소 한 켠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지난번 이후론,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류가 물었다.


여자는 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짧게 웃었다.


“솔직히…

그다음 날부터 또 회사 가기 싫었어요.

딱 하루만 멀쩡했고요.”


여자는 잠깐 숨을 골랐다.

“그래도

하나는 해봤어요.”


준호가 통 옆에 툭- 기대어 너스레를 떨며 물었다.


“오, 하나면 대성공이죠!

그게 대체 뭔데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요?”


2. 손끝으로 흘려보낸 푸른 눈물


“… 화장실 갔을 때요.

회의하다가 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길래…

예전 같았으면 바로 화장실 칸 안에 숨어 들어가서

한참 울었을 텐데, 이번엔 안 그랬거든요.”


여자는 지난 기억을 가라앉히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때 문득 여기서 배운 게 생각나서,

세면대를 붙잡고 숨을 세 번 깊게 들이마셨다 내뱉었어요.

가슴에 얹혀 있던 무거운 감정 덩이들이

어깨를 거쳐 손끝을 타고 흘러나가는 상상을 하니까,

신기하게도 조금 견딜 만해지더라고요.”

8화 세면대 손.jpeg 생성형 인공지능 제작 이미지


지그시 눈을 감으니 그녀의 머릿속으로 어렴풋하게

그 화장실 풍경이 현실처럼 떠올랐다.


하얀 타일,

타일 결을 따라 은은하게 번지는 LED등 아래

화장실 거울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세면대 앞, 여자는 두 손으로 세면대를 꽉 잡고 있었다.

손등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또 그 말이네.

넌 왜 이것밖에 안 되니…’

돌덩이 몇 개가 한꺼번에 가슴 한가운데로

쓱- 끌어내려지는 느낌.


그때 머리 한쪽 구석에서 감정 세탁소가 떠올랐다.

내 몸처럼 따스했던 물,

이류 원장님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제, 숨 한 번 크게 쉬고요.

가슴 돌덩이가

어깨, 팔, 손가락 끝으로 빠져나간다고 상상하면서

후- 계속 숨을 내십니다.”


여자는

거울 앞에서 숨을 들이켰다가

후- 길게 내쉬었다.


첫 번째 숨은,

가슴에서 어깨까지-.


두 번째 숨은,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세 번째 숨은,

팔꿈치에서 손끝까지-.


손을 떼고 보니 세면대 가장자리에

푸른 물이 한 줄기 떨어져 있었다.

눈물이 아니라 손에서 뚝뚝- 떨어진 감정이었다.


‘… 오늘은 여기까지만.’


그녀는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손만 한 번 씻고 손등의 물기를 털어냈다.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날 하루만큼은

‘오늘 내 기분 전부를 어디에 다 맡겨버리진 말자’고

스스로 마음을 붙들어 본 셈이었다.


세탁통 물 위로 그 화장실 장면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울지는 않았어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갈랐다.


“내내 그랬어요. ‘오늘 참 힘들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거든요.”


“그랬겠군요.”

이류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게, 마음의 찌꺼기를 깨끗이 치운 건 아니에요.

다만 가파른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던 마음을

겨우 멈춰 세운 상태죠.

재활 1단계, 감정 정화는 거창한 게 아니에요.

일단 더 나빠지지 않게 제자리에 멈춰 서는 것,

거기서부터 모든 회복이 시작되는 법이니까요.”


찰나의 순간,

세면대 가장자리에 맺혔던 푸른 물빛의 잔상이

그녀의 눈앞을 다시 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날, 화장실 칸까지 들어가지 않고

거기서 멈춘 자신의 발걸음도 함께.

여자는 살짝 눈을 살포시 내리깔았다.


“그래서 오늘도 여기까지 다시 와봤어요.”


“오늘은, 어디부터 빨아볼까요.”


이류가 감정 빨래통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통 앞에 섰다.

맑은 물이 발목을 감싸 올라오자

전처럼 숨부터 깊어졌다.


“그전엔 늘 불안했어요.

회사 화장실에만 있어도 남들이 내 욕을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정상이 아닌가 싶어 무서웠거든요.”


그녀의 눈동자에 흔들리는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요즘은 타깃이 확실해요. 우리 팀장님이요.”


감정 세탁통 속, 물결이

서서히 어두운 파동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제 밤샘 결과물을 홀랑 가로채서 자기 이름으로 올리는데,

정작 사고가 나면 다 제 탓으로 돌려버려요.

정말 뻔뻔하죠.”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을 이었다.


“머리로는 억울하다는 걸 다 알겠는데,

몸이 반응을 안 해줘요.

여전히 그 사람 앞에만 서면,

‘넌 왜 이것밖에 안 되니.’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예전처럼 한없이 쪼그라들고 말아요.”


준호의 엄지손가락이 또 슬슬 저려왔다.


‘아이고, 또 저 소리네.

어제 탔던 그 손님도 딱 저런 식으로 말하더니만.

사람 사는 게 참 다 거기서 거긴가 보네.’


이류가 여자의 숨결과 리듬을 맞추며 조용히 되물었다.


“천천히 숨 들여 마시고, 내쉬고-.

가슴속에 일어난 소란스러운 마음들을

잠시 가라앉혀 보세요.


당신을 가장 크게 흔들고 있는

그 감정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게 뭔지 한 단어로 이름 붙여줄 수 있을까요?”

호흡명상.png 생성형인공지능 제작 이미지

여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 수치심이었는데요.”

조금 뜸을 들였다.


“전에는 그냥 다 수치스러웠는데…”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요즘은 수치심보다는 ‘분한 마음’이 더 크게 느껴져요.”


지훈 눈썹이 절로 움찔움찔 올라갔다.

변화의 전조였다.


경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감정을 확인해 주었다.


“옳지, 잘 생각했슈. 맨날 지만 들들 볶더니,

이제야 세상 탓도 할 줄 아네.

화살표 방향이 바뀐 거니께 이제 맘 좀 놓으랴구.”


이류가 부드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수치심은 나 자신을 공격하는 화살이에요.

하지만 분함은 상대를, 혹은 환경을 겨냥하죠.

지금 그 화살표가 스스로를 겨누던 방향에서

조금 비껴간 겁니다.”

“비로소 내 문제와 상황의 문제를 구분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렇게 하나씩 정리해 나가면 됩니다.”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주었다가 폈다.

4번 코드 가슴 안쪽에서 무겁게 웅크리고 있던 돌덩어리가 아주 살짝,

가슴 바깥쪽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이제 나아진 거예요?”


“완전히 나은 건 아니고요.”


이류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음-, 전부 다 나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음의 시야가 넓어진 건 사실이에요.

예전엔 부정적인 화살표가

오직 본인의 안쪽만을 파고들었다면,

지금은 그 에너지가

바깥의 상황을 향해서도 흐르고 있거든요.

‘나는 왜 이럴까’라는 자책 옆에,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는 의문이 함께 떠오른다는 건

의식의 주도권을 서서히 되찾고 있다는 증거예요.”

화살표.png 생성형 인공지능 제작 이미지

여자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맞아요. 전에는 팀장님 얼굴만 떠올려도

‘다 내 잘못이지’ 싶어서 고개부터 숙여졌거든요.

그런데 요새는 좀 달라요.

‘남의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저 태도는 정말 문제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치밀어 오르거든요.”


세탁통 물이 짙은 회색에서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세탁소 안 공기가 조금씩 눅눅해지자,

지훈이 문가에서 입을 열었다.


“당그리님-.”


“응.”


“지금…

공기 기척이 좀 세졌어요.

아까보다 한 단계 올라간 느낌.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쪽까지 다 젖을 것 같아요.”


이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타이밍이야.

오늘 감정 경계 연습은 여기부터.”


그녀는 준호 쪽을 돌아봤다.


“준호 씨, 오늘은 ‘억울함’이라는 주파수만 받아줘.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책의 파동까지 여과 없이 받아들이면

준호 씨 필터가 금방 망가지니까.

그건 세탁통에 같이 섞이지 않게

입구에서부터 확실히 차단해요.”


준호가 뻐근한 어깨를 구겨진 종이를 펴듯

큼지막하게 돌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예이, 당그리님 말씀 받잡겠구만유.

오늘은 딱 그 양반 억울한 사정만 요 앞에

잠깐 통과시켜 줄라니까 걱정 마셔.


내 속에서 부글거리는 억울한 놈들은요?

에이, 걔들은 이따가 퇴근하고 집 화장실 가서

은밀하게 처리할라니까요.

아주 시원하게 '강제 이송' 조치해 버려야지, 뭐.”


경희는 자기도 모르게 손끝을 한 번 꽉 쥐었다 폈다.


“아유, 그 꼴 보기 싫은 옛날 상사 얼굴은

오늘은 아예 딱 가로막아버려야 쓰겄어.

저만치 치워버리고,

이 손님 얘기만 차분허니 들어줘야지. 암, 그래야구말구.”


가운데 청연 문양 아래 지하에서 작은 파장이

한 번 일렁이더니 가라앉았다.


“그 팀장이라는 분이 당신의 아이디어를

본인의 성과로 치환했던 그 결정적인 순간을

다시 한번 직면해 볼까요.”


이류가 세탁통 위에 손을 얹으며 깊은 공명을 준비했다.

여자의 미간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회의가 끝나고 적막이 흐를 때였어요.

팀장님이 그랬거든요.

‘요즘 애들 생각은 확실히 신선해’라고요.

처음엔 따뜻한 격려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 말이 제 목소리를 뺏어가겠다는

선전포고처럼 들려요.”


세탁통의 물줄기가 짙은 먹색으로 물들며,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거친 파도처럼 그려내기 시작했다.


3. 마음 창고에서 꺼낸 '용기'라는 도구


“이번엔 그 기억 속에 작은 균열을 내보죠.

수동적으로 듣기만 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속으로라도 당신의 에너지를 담은

마디를 던져보는 거예요.

자, 소리 내지 않아도 좋으니

마음을 다해 외쳐보세요.”


여자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내면의 공간을 조금 열었다.


“비릿한 칭찬 뒤에 숨은 가식적인 목소리가 들릴 때,

떨리지 않는 마음으로 대답하는 거예요.

‘팀장님, 그거, 사실 제 생각입니다.’라고 말이죠.”


“지금 당신의 뇌는 감정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어요.

그래서 몸이 쭈그러드는 겁니다.

하지만 감정은 당신이 부리는 도구여야지,

당신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어서는 안 돼요.

감정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에요.


‘넌 왜 이것밖에 안 되니’라는 말이 들릴 때,

그 말을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입하지 마세요.

대신 당신의 마음 창고에서

용기라는 도구를 꺼내어 대응하는 겁니다.

‘그 말은 당신의 판단일 뿐이고,

아이디어의 진짜 주인은 나다.’라고

명확히 선을 긋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여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소리 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깊은 내면에서만 울려 퍼지면 충분하니까요.

자, 다시 한번 그 진실의 목소리에 집중해 볼까요?”


여자는 조금 더 크게 입을 벌려 작은 소리를 냈다.


“그거…, 사실 제 생각인데요.”

그건 사실 내 생각.png 생성형 인공지능 제작 이미지

그녀의 말이 입술에서 떨어지는 순간,

통 안 물결이 한 번 ‘툭-’하고 방향을 틀었다.


바닥 한가운데 청연 문양에서

아주 얇은 보랏빛 줄기 하나가 빠르게

위로 올라왔다 내려앉았다.


준호의 엄지가 살짝 얼얼해졌다가 곧 풀렸다.

경희가 옆에서 “크아—” 하고 시원한 소리를 내더니,

입가에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었다.


“아이고, 속 시원하네! 겉으로 대놓고는 못 혀도

속구녕으로라도 그렇게 한마디 쏘아붙여 주니까 훨씬 낫쥬?

응어리진 게 쬐금은 내려가는 기분 아니랴구.”


여자가 예상치 못한 표정으로 같이 웃었다.


“진짜요. 그냥 생각만 한 거잖아요.

그런데도 매번 나만 탓하던 때보다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이제야 좀 살 것 같아요.”


통 안 물빛이 눈에 띄게 옅어졌다.

감정 세탁이 한 차례 지나가자,

여자는 발을 통에서 천천히 꺼냈다.


따뜻한 발바닥이 힘 있게 바닥을 밟았다.


“지금은 어때요?”

이류가 물었다.


여자는 후-하고 쉼 호흡을 한 뒤 말했다.


“팀장님 생각하면 여전히 짜증 나요.

근데… 예전처럼

‘내가 진짜 한심하다’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 것 같아요. 요즘은

‘저 사람, 사람들 아이디어 훔치는 버릇 좀 고치지’

이 생각이 먼저 들거든요.”


“이제는 그 기억을 다시 마주해도,

전보다 뇌파가 훨씬 안정적이라는 게 느껴지시나요?

외부의 충격에 속절없이 흔들리던 의식이

비로소 중심을 잡기 시작한 거예요.”


“…네. 조금은요.”

여자는 손목에 차고 있던 분홍 머리끈을 만지작거렸다.


“그려, 내 다 기억혀.

지난번엔 그 산발된 머리카락 죄다 끌어모아 갖고

야무지게 다시 묶고 나갔잖어.

암, 그래야지. 흐트러진 건 다시 딱 추스르면 되는 겨.”

경희가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지금 내 모습만으로도 괜찮다.’라는 느낌이

처음 생긴 날이었어요.”


이번엔 여자가 스스로 말을 이었다.

“이제는… 회사 갈 땐 머리 묶고,

집에 오면 풀 거예요.

회사 밖에서까지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진 않아서요.”


준호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크으, 역시 멋져요!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안팎 모드’.

확실하게 딱딱 끊어주는 거 아니겠습니까요.

그거 아시죠? 택시 하시는 형님들도요,

손님 태우는 ‘영업 모드’랑 집에 가는 ‘퇴근 모드’

칼같이 안 나누면 병나요, 병나.

우리도 살려면 이렇게 스위치 딱딱 꺼줘야 한다니까요, 허허!”


지훈도 조용히 한 줄을 보탰다.


“회사 밖에서까지

내 마음을 꽉 묶어둘 필요는 없으니까요.”


여자가 지훈을 물끄러미 봤다.

“… 고3이죠?


“네.”

지훈이 멋쩍게 웃었다.


“저도 요즘 그 연습하는 중이라서요.”


여자는 분홍 머리끈을 손목에 가볍게 감았다 풀었다.


“다음엔 우리, 좀 더 천천히 만나요.

이곳을 찾는 발걸음 사이의 여백이 길어진다는 건,

당신이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일상을 지탱해 내는

근육이 단단해졌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이류가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 성공이죠.”

분홍 머리끈 손님도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혼자서도 너끈히 웃으며 걸어갈 날이 올 거예요.

그때까지는 여기서 저와 함께 연습하면 돼요.

오늘 정말 잘하셨어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이류가 두 팔을 넓게 벌려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 품속에서 여자의 억눌렸던 숨이

비로소 평온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자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매번 고생 많으시죠, 정말 고마워요.

그래도 오늘은 저 스스로도

조금은 성장한 것 같아서 뿌듯해요.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했는데,

오늘은 제 몫을 다한 것 같아 다행이에요.”


4. 세정술사의 방패, 에너지의 경계선


문이 닫히자,

서라울시 골목 쪽 공기가 잠시 잔잔해졌다.


손목에 분홍 머리끈을 감은 손님이

조금 가벼운 움직임으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세탁소 안은 짧은 침묵을 머금었다.

준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기분 좋은 듯 너스레를 떨었다.


“어허, 이거 참 희한하네?

오늘은 손님의 그 억울하다는 소리를 한 바가지로 받아냈는데도 말이쥬,

이상하게 내 속이 텅 비어서 허한 느낌이 안 드네요?

원래 이쯤 되면 나도 같이 기운이 쏙 빠져서

축 늘어져야 정상인데... 허허,

이거 내 필터가 성능이 좋아진 건지,

아니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맷집이 좀 붙은 건가요?”


“준호 씨, 만약 오늘도 그 사람의 억울함에

당신의 에너지를 전이시켰다면,

지금쯤 명치끝이 타들어 가는 통증에

진통제부터 찾고 있었을 걸요.”


이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훌륭해요. 오늘은 타인의 고통을 관찰하되 잠식되지 않는

그 ‘에너지의 경계선’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냈어요.

그것이 세정술사의 가장 강력한 방패죠.”


경희가 투박한 손마디를 가만가만 만지작거리며,

자기 속이 어떤지 잠시 들여다보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아유, 신기허네. 나도 말이쥬,

아까 그 꼴 보기 싫은 옛날 상사 낯짝까진

안 떠오르더라고유.

그냥 내 속이 온통 저 손님 얘기로만 꽉 차 있었슈.

희한하게 손끝은 쬐금 시릿시릿헌디,

예전처럼 심장이 꽁꽁 얼어붙어 갖고 암 것조차 못 허겄는...

그런 건 아니네유. 살만해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경계 연습 2단계’ 예요.”

이류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타인의 감정을 수용하되, 내 안의 오래된 상처까지

무의식적으로 건드리지 않는 연습이죠.

상대의 에너지를 공감하는 것과

내 아픈 기억의 문을 열어젖혀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일이니까요.”


지훈은 바닥 한가운데 청연 문양 위에 시선을 두었다.

문양 틈 사이로 아까보다 옅어진 보랏빛이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오늘 저...아까 제가 먼저 말했잖아요.

분위기 확 세졌다고. 솔직히 예전 같았으면,

그냥 아득바득 혼자 참으면서 버텼을 거거든요.”


그는 자기가 한 말이 스스로도 생경한 듯

잠시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딱 여기까지만 듣자’라고...

마음속으로 선 그은 거, 저 오늘이 진짜 처음이에요.”


“그래, 아주 잘했어.”

이류가 깊은 호흡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이는 다른 사람들보다 뇌의 안테나가

예민하게 깨어 있는 사람이야.

남들보다 먼저 변화를 감지하는 건 아주 귀한 감각이지.

그러니 앞으로는 스스로 ‘경보를 울리는 역할’까지만 하자.”


이류의 시선이 달항아리의 은은한 빛을 따라 머물렀다.


“그 너머의 무거운 에너지는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돼.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함께 호흡하며

정화해 나가면 되니까.”


달항아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그의 목소리에 맞춰 한 번 은근하게 흔들렸다가,

이내 평온한 자리를 잡았다.


세탁통 밑바닥엔 옅은 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예전처럼 한데 뒤엉킨 거친 파도무늬가 아니라,

살짝 높낮이가 다른,

경계가 또렷한 두 겹의 물결 자국이었다.

상황의 탓과 자기 몫의 감정이

조금은 분리된 듯한 흔적이었다.

8화 감정세탁소.jpg 생성형 인공지능 제작 이미지

경희가 스티커 메모판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오늘 날짜 옆에 짧게 적었다.

> 수치심 → 분함 →

> 상황 보는 눈.

> 내 손끝 시림: 어제보다 한 톤 옅음.


준호는 컵에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시고는 툭- 내뱉었다.


“오늘은 들어가서 창문 열고 소리 지를까 말까…

반반이네요. 그래도 어제만큼은 안 터질 듯.”


준호는 컵에 물을 콸콸 따라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캬- 소리를 내며 툭 내뱉었다.


“아유, 오늘은 집에 들어가서 창문 확- 열고

소리 한번 시원하게 지를까 말까... 딱 반반이네, 반반.

양념 반 후라이드 반도 아니고 말이야, 허허.”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농담 섞인 진심을 덧붙였다.


“그래도 뭐, 어제처럼 뚜껑 열려가지고

폭발할 정도는 아니니까 다행이지.

오늘은 ‘안전 운전’도 가능할 것 같아요.”


지훈이 작게 웃었다.

“정 힘들면… 창문 열고 소리 지르기 전에

우리 단톡방에 먼저 톡 남겨요.”


그는 무심한 척 덧붙였다.


“원래 여기 사람들,

남의 얘기 들어주는 거 하나는 전교 1등이잖아요.”


준호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눈을 희번덕하게 뜨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오~ 우리 고3 형씨, 멘탈이 부장님 급인데? 든든하구먼!"

준호가 눈을 크게 뜨며 너스레를 떨었다.


경희도 피식 웃었다.

“아유, 우리도 그 거시기, 감정 세탁기 좀

단골손님마냥 서로서로 대끼리 하게 돌려줘야지유~.”


이류는 세 사람을 둘러보며 깊고 정갈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늘 우리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어요.

분홍 머리끈 손님뿐만 아니라 우리 세정술사들도 각자의

‘에너지 경계’를 명확히 인지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이류가 잠시 침묵하며

세탁소의 공기를 음미하듯 말을 이었다.


“세정의 핵심은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에요.

‘여기까지가 내가 정화할 몫이고,

저기부터는 손님이 감당해야 할 삶의 몫’이라는 걸

본능적인 감각으로 구분해 내는 것이죠.

그 선이 분명할 때 비로소 우리는 소진되지 않고 타인을 비출 수 있지요.”


이류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세탁통 밑바닥에 남은 옅은 물결 두 겹이

서로 섞이지 않은 채 각자의 궤도를 그리며

평온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달항아리 불빛이 조용히,

젖은 세탁소 안을 담담하게 비추고 있었다.


무너지기 직전까지 참고 버티던 숨들이,

오늘은 아주 조금 일찍

여기서 한 번 쉬어 간 듯했다.

다행차.png


# 오늘의 질문


오늘 하루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요즘 당신 마음속에서,

“내가 너무 부족해서 그런가…”

라는 생각이 잠깐이라도 스쳤던 장면이 있다면,

그 장면을 떠올렸을 때

이렇게만 살짝 바꿔 말해 보면 어떨까요?


“혹시 이 상황 자체에도

문제점이 조금은 있었을까?”


지금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면,

그냥 마음속으로만


나 때문이었을까?” 대신

상황도 좀 문제가 있을까?”라고

한 번만 바꿔 묻는다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오늘 여러분을 힘들게 한 상황이 있다면,

'내 탓' 대신 '상황의 탓'으로 문장을 바꿔 보세요.

댓글로 그 마음의 변화를 나눠주셔도 좋습니다.




#감정세탁소 #가스라이팅 #자존감 #직장인공감 #심리치유 #브레인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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