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체로 아름답고 찬란하다.
에세이집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에는 '엄마의 기본값'이라는 글이 있다.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EBS <다큐프라임-마더쇼크>에서 100명의 엄마들에게 '엄마라면'이라는 문장을 완성하라는 주문 했는데, 내용이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엄마의 헌신을 말한다.
'엄마라면 항상 아이 옆에 있어야 한다.'
'엄마라면 맛있는 건 자식에게 줘야 한다.'
'엄마라면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
'엄마라면 항상 참아야 한다'
작가는 이 글을 인용하고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내야 하는 이상적 존재가 '엄마의 기본값'으로 되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엄마는 그래야 한다는 시선은 우리를 힘들게 하니까.
글을 읽으며 하나의 생각이 빠르게 번진다. 나도 그 속박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헌신과 자율 욕구에서 갈등하며 지내는 수많은 여성 중 하나였다.
엄마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자 생각했지만 생각만큼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호기롭게 시작한 글이 벽에 부딪친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아차렸다.
나도 엄마의 기본값을 희생의 범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라는 호칭으로 부러 거리를 두고 회상했지만, 대게가 내 감정으로 왜곡되어 있었다.
엄마의 헌신들은 감성 넘치는 일화로 기억했지만, 엄마의 평범한 개인 일상은 좀처럼 기억에 없다.
즐겨 입던 옷, 좋아하는 색이나 친구 이름, 기분 좋아지면 부르던 애창곡 등 떠오르는 게 별로 없다.
가족과 함께 한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단. 평번한 여성의 모습도 많을 텐데 그런 일상의 모습은 내 기억엔 지워져 있다. 함께 한 시간이 그토록 많은데도 지워져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 다른 자각이 깨운다.
'엄마는 헌신해야 한다.'는 프레임으로 엄마뿐 아니라 나도 가두어 버린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가 쉽지 않았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애증의 찌꺼기가 남아 묘하게 불편했다. 믿고 의지하는 친정엄마지만, 엄마의 시선이 부담이었다.
왜 그런지 이제야 알았다.
엄마는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살아내셨다.
그게 싫었다. 엄마를 보며 나도 그렇게 살까 봐 겁이 났다. 나는 엄마처럼 할 수 없었다. 엄마니까 가능한 거고 나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아예 모른 척 거세게 거부하지도 못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보며 그랬을 테다. 시간이 흘렀고 엄마가 된 지금 '여자라서', '엄마니까'라는 틀이 계속 깨지지만 이기적인 엄마라는 마음마저 버리지는 못했다. 희생적인 엄마가 되지 못한 나는 미안한 엄마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다.
싹수없을 정도로 엄마에게 막 했던 것은 엄마에 대한 반항이 아닌 나에게 내는 짜증이었다.
엄마의 희생을 인정하면 나도 그래야 되나? 엄마의 노력을 알아야 하는 의무감이 들지만,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무력감이 있었다. 모른 척도 해보고 어기 짱도 부렸다.
이 기묘한 마음을 털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글을 쓴다 했지만, 엄마와의 관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다 조금은 알게 되었다. 닮고 싶지 않은 부분을 어설프게 닮아서 갖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어정쩡함. 그것이 엄마와 나의 현재 모습인 게다. 아무리 모성애가 위대하다고 해도 나는 엄마처럼 할 수 없음에 아팠다.
그래도 나를 칭찬한다. 엄마에 대한 글쓰기는 '엄마라서 갖는' 과도한 책임감에 벗어나라는 일종의 주문이었다. 엄마로서만이 아니라 독립된 한 명의 인격체로 그녀를 말하고 싶었다.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는 걸, 찬란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그 과정은 다시 나에게 전이될 것이니까.
그런 마음에 시작했으나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텨낸 엄마였다. 어쩌면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부족한 게 당연할지 모른다. 단짝과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이웃집 할머니와 고스톱에서 지고 나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마침 통화를 하게 되어 엄마에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가장 매력적인데, 울 엄마의 장점이 너무 많은데. 근데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네.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줘."
"엄마의 이야기가 뭐가 궁금해. 나는 너나 더 챙기면 좋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셨다. 이야기 속에 건강은 좋은지, 경제적으로 편안한지 챙기고 싶어 하신다.
어쩔 수 없이 부모 자식은 서로의 울타리 안에 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헌신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렇게 희생하는 삶을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결되어 있는 가족이기에 각자가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하니까.
그러니 이번엔 반대로 주문해야겠다.
"엄마, 나를 위해 엄마의 행복을 먼저 챙겨주세요."
"아들! 딸! 엄마를 위해서라도 너희의 진짜 행복을 발견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