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볼 땐 제대로 바라보자.
以 : 써 이
心 : 마음 심
傳 : 전할 전
心 : 마음 심
송나라 승려 도언은 석가 이후 고승들의 법어를 기록한 《전등록》에서 “석가는 말이나 글이 아니라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라고 적었다. 불교의 진수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면서 고통받는 중생에게 ‘마음의 길’을 터줬다. 석가는 제자들의 물음을 늘 칭찬했고, 자신의 가르침을 강요하지 않았다.
석가가 영취산에 모인 제자들에게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 줄기를 살짝 비틀어 보였다. 제자들은 스승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오직 가섭만이 석가의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통한다는 염화미소(拈花微笑)는 이 영취산 설법에서 나왔다. 석가가 연꽃을 집어 드니(拈華), 제자 가섭이 그 뜻을 헤아려 미소를 지었다(微笑)는 의미다.
출처: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이심전심 (以 心 傳 心)
뜻을 헤아려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이심전심'의 출처 글을 읽어보니 알겠다.
언젠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이심전심(異心全心)
마음은 모두 다르다. 가깝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는 첫째 이유는 날 낳아준 부모님 뜻을 헤아리기 힘들 때가 많기 때문이다.
둘째는 20년을 함께 사는 남편이지만 알다가도 모르는 오리무중이라 그렇다.
셋째는 내가 낳은 아이들에 대해 남의 자식만큼이나 잘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어서이다.
마음을 전하는 것은 수행하는 불자나 가능한 걸까?
매일 같이 얼굴 마주 보는 사람일지라도 알듯 말 듯 도대체가 답답하다.
이 생각을 더 하게 된 계기는 코로나 19 때문이다.
딸과 세끼 집밥을 먹으며 대화시간이 늘었다. 지출이 늘어 절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 집 재무상태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딸에게 미안할 정도로 우리 집 재무상황은 꼬여있다. 남편의 사업 폭망이 원인인데 사춘기도 넘겼으니 이제는 알아야 것 같아 설명을 했다. 몇 년 동안 심각할 정도로 고생했기에 딸아이도 체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의도와 달리 사업의 문제점, 일이 꼬일 때 좀 더 빠른 결단을 하지 않았는지에 반문하며 한탄을 했다. 주변 친구들의 여유 있는 환경이 부럽다 못해 원망의 시선도 있었다.
딸의 말에 아차 싶었다. 남편에 대한 내 원망이 전달 되어 영향을 주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아내인 내가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딸은 더 할 것이다.
딸이 태어난 해 사업을 시작했으나 10년 만에 접었다. 이후 다른 일을 시작해도 번번이 풀리지 않아 힘들던 시간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그냥 버티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나도 모르게 삐딱한 시선과 뾰족한 말로 남편을 찔렀다. 지치면 희망도 사치라 느껴진다. 끝도 없는 반복이 이어지는 것 같아 웹소설에서 단골 소재인 회귀가 내게도 있었으면 했다.
그땐 힘들어 남편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남편은 본인의 선택이고 책임이라지만, 나는 결과만 떠안는다는 억울함도 컸다.
그럴 때마다 남편이 나보다 더 힘들 거라고 짐작했다. 원망은 상처만 남기긴다. 힘든 사람에게 생채기 내야 득이 될 게 없다는 생각으로 나를 품고 남편을 품으려 했다. 힘들 땐 돌아서고 싶었지만 그것도 뭐라도 있을 때 가능한 선택이었다. 흩어져봤자 더 어려운 현실이 계속될 것이기에 버티며 지금에 왔다.
시간은 약일 수도 독일 수도 있다. 체념하며 잊힌 것이 약이라면, 제대로 알지도 모른 채 지레짐작으로 버틴시간이 독이다.
그동안은 이심전심(異心全心)이었다.
내가 네 마음을 어떻게 알아?
나도 힘든데. 네 마음까지는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어 답답했지만 가족이기에 양보하며 그야말로 시간이 지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원망해야 나만 더 힘드니 생각을 멈추고 뒤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이심전심(以心傳心)도 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남편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어떤 마음이었을까?
힘들 땐 무슨 생각으로 버텼을까?
내가 힘들 땐 나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내 감정에 휘둘리면 안갯속이라 앞이 보이지 않는다. 힘들었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원망하는 마음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지나고 보니 몸은 서로 마주하고 고개는 돌린 영 이상한 포즈의 우리였다. 아프다고 힘들다고 함께 푸념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남편도 힘든지, 어떤 생각인지 알고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완벽히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까이 있는 게 힘들면 거리를 두어도 되고, 다른 곳을 바보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닐 테다. 그래도 마주할 땐 온전히 바라보았다면 좋았겠다 싶다.
결혼 20년 만에 이 생각을 했으니 오늘은 캔 맥주를 준비해두어야겠다.
안주는 지난 10년간의 폭망 스토리가 될 것이다.
딸에게 못다 한 말이 있다.
"엄마는 아빠가 가장 힘들거라 생각하며 지냈는데,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 다 힘들었어. 너도 그 상황에서 잘 버티며 자라주느라 애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