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를 위해서다
동생과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낮에 소심하게 했던 행동 하나가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 사람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자꾸 맴돌았다.
“사람들이 날 찐따로 보면 어쩌지?”
내 소심한 행동이 나를 못나게 보이게 할 것 같아서, 사람들이 나를 찌질한 사람으로 볼 것 같아서, 내심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지 않을 것’이라는 답을 기대하고 한 물음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동생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언니는 그런 사람을 찐따로 봐?”
순간 벙쪄버린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이든 찐따로 보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동생은 담담하게,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언니가 소심한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찐따로 보니까, 언니가 소심한 행동을 했을 때 찐따로 보일까 봐 걱정하는 거야. 평소에 사람들을 찐따로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누군가가 언니를 찐따로 볼 거라고 생각할 수 있어?”
그러고는 덧붙였다. 자기는 소심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사람을 만만하게 보지도 않고, 그런 사람을 ‘찐따’로 본 적도 없다고. 애초에 내 고민 자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뜻이었다.
머리가 띵해졌다. 내가 소심한 사람을 찐따로 봐 왔다고? 그래서 누군가가 소심한 나를 찐따로 볼 거라 걱정하는 거라고?
*
타인에게 상처 주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속에서도 상처 주려는 의도를 찾는다. 자신이 말속에 의도를 숨겨서 말하니까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군가의 말투가 조금 차갑더라도 “바쁜가 보다.”, “컨디션이 안 좋나?” 하고 넘어간다. 자기가 남을 해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으니, 남도 굳이 자신을 해치려는 의도를 가진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만큼, 생각하는 만큼 남을 이해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악의를 품으면 세상은 그만큼 위험해지고, 선의를 품으면 세상은 그만큼 따뜻해진다.
그래서, 나는 소심한 사람을 찐따로 봐 왔나? 솔직하게 말하면 그랬던 것 같다.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거나 과하게 눈치 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을 대놓고 놀리거나 무시하진 않았지만, 은연중에 만만하게 봤던 것 같다. 어쩌면 무시하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태도로 새어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태도가 역으로 나를 찌른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날 찐따로 보면 어떡하지, 만만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걱정이라는 이름의 창이 되어.
*
“그러니까 쓸데없는 고민하지 말고, 언니나 남 무시하지 마.”
동생의 마지막 충고였다. 줄곧 맛이 느껴지지 않던 저녁 반찬의 맛이 그제야 느껴졌다. 달짝지근하고 새콤한. 그리고 하나의 다짐이 떠올랐다.
“나, 착하게 살아야겠다. 그래야 남들도 나에게 착해지는 거겠네.”
“좋은 생각이야.”
동생은 담담히 저녁을 마저 먹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살아있는 현자의 모습을 보았던 것도 같다.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사회적 균형이나 도덕적 가치와 같은 거창한 의미에만 있지 않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이상주의적 사상에만 있지도 않다. 그것은 의외로 ‘나의 행복’에도 있다. 내가 착하게 살아야, 내 생각이 세상이 되어 나를 괴롭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착해야, 내가 사는 세상이 착해지기 때문에. 오직 나를 위해서라도,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나 또한, 이제는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남을 위해’가 아니라, ‘나를 위해’. 내가 다른 사람을 존중함으로써, 나 역시 사람들에게 존중받기 위해. 나의 악의가 도리어 나를 공격하는 일이 없기 위해. 나의 선의로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살기 위해. 내가 착하면, 내가 사는 세상도 착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