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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무 Nov 15. 2022

나는 바다와 결혼했다

원주댁 일기 1


우리는 1년 반 정도 주말 연애를 했다. 나는 서울 내 집에서 출퇴근을 했고, 그는 원주에서 일하며 회사 숙소에서 지내다 금요일에 경기권 그의 집으로 퇴근하고 주말에만 만났다. 내 휴무 요일이 계속 바터라 주말에 잠깐밖에 못 본적도 많다. 토/일요일에 외식을 하고 문화생활을 즐기다 곧 또 바이바이. 주중 평일의 피곤한 모습 보지 못한 채 전화 통화만 했었다.

결혼식을 올리고도 집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4주간은 연애 패턴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니까 신혼여행을 다녀와서도 각자의 집으로 갔던 것. 그리고 드디어 원주로 신혼집을 결정하며 집 계약과 이사가 착착 진행되었다.


우리가 한 집에서 먹고 자며 전에 없던 평일을 쭉 보낸 지 2주가 넘어가고 있다. 출퇴근하던  일상과 서울의 편리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단숨에 이동을 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더구나 남편과 '함께'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매 순간 다양한 질량의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그의 아침 출근 이후에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집에서 이삿짐 정리만 했다. 좀 더 저렴한 식재료로 매 끼니 어찌 잘해 먹을까 궁리를 했다. 해도 티도 나지 않는 집안 구석구석을 치우고 닦았다. 데이트할 때처럼 마냥 하하호호만 할 수는 없었다. 같이 살고있는데, 이상하게 나만 점점 희미해져 소멸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엄마가 그러했듯, 남편의 뒷바라지에 올인하며 주부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착각에 빠졌던 것 같다.


일찍 자고 일어난 어느 날 새벽 4시쯤이었다. 책을 보다가 신랑이 이미 예전에 밑줄 그었던 부분에서 눈물이 났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다. 그냥 내가 살아있다는,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훌쩍거리며 거실 창밖을 올려다봤을 때 깜깜한 하늘 속에 건너편 교회 십자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아침 산책을 나갔고 한 번도 변경된 적 없던 그의 카톡 프로필 '퀘렌시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에게는 직장을 벗어난 집이 퀘렌시아라고. 그것이 아내인 나를 포함인지 아닌지는 아직 묻지 못하겠다. 그 또한 당연하게도 동거인인 나의 어떤 면들을 참아내고 있을 테니까.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가장 신났던 순간은 오랫동안 버킷리스트였던 서핑 체험이었다. 강습을 들은 뒤 한 시간이 넘게 바닷속에서 파도를 만끽했다.(실은 제주 중문 해변의 짜디짠 바닷물을 들이마셨다;;) 주기적으로 파도는 몰려오고 적당한 타이밍에 보드를 띄워 그 위에 납작 엎드렸다가 몸을 일으켜 세운다. 대부분은 균형이 깨져 물에 풍덩 빠지고  짠물을 하도 먹어 코도 입도 따가울 정도였다. 그래도 두세 번 정도 보드에 서서 모래사장 근처까지 도달했고, 그 재미로 계속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파도의 때를 기다렸다. 보드 위에서 완벽하게 서지 못하더라도 물결을 따라 바닷속을 마냥 즐긴 시간이었다.  


철썩, 철썩...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도 수없이 출렁거리게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바다 그 자체를 느꼈던 것처럼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충만한 바다 그 자체이다.

오늘 여기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그와, 나는 결혼했다.




강은 지나가지만 바다는 지나가고도 머문다. 바로 이렇게 변함없으면서도 덧없이 사랑해야 한다. 나는 바다와 결혼한다.

-알베르 까뮈, <결혼, 여름>




*사진 출처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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