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여름 지나 가을이 깊어가던 10월 말, 6개월의 시간 끝에 한 권의 책이 내 품에 들어왔다. 13명의 공동 문집이고, ISBN도 없는 비매품이나, ‘작가님’이 되어 내 책이 나온 기분은 설레고 신기했다. 서울문화재단의 서울시민예술대학 프로그램 중 ‘언니네글방’을 통해 매주 글을 읽고 쓰는 경험을 했다. 전문 작가를 위한 기획은 아니었기에 세상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모였다. 단, 40대 이상의 여성! 모집 대상을 보고 마흔 넘어 나이 든 게 이렇게 신난 적은 없었다. 미혼, 임산부, 영유아부터 중고생의 어머니, 30대 자녀를 둔 내 엄마 또래 분까지 다양한 상황과 연령의 여자들이 만났다. 일주일에 딱 3시간,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보낸 그 시간만큼은 누군가를 위한 역할 말고, 온전히 내 이름 세 글자로 존재하고자 했다.
우리는 서로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또 지도 선생님 네 분의 진행을 따라 아이처럼 신나는 경험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풍경이다. 두 팀으로 나눠 각각의 전지에다 한 팀은 몸의 앞면, 다른 팀은 뒷면을 크게 그린다. 벽에 붙여 놓고 자유롭게 나가서 신체 각 부위를 그리고 명칭을 쓴다. 팔자주름부터 궁둥이까지, 자궁이나 성기 같은 단어들도 쏟아져 나온다. 시끌벅적 왁자지껄. 더 채울 게 없을 때까지 해보다 이내 차분해지면, 나의 몸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고 그걸 글로 쓰는 거다. 아픈 것이든 소중한 사연이든 서로의 경험과 글을 나누며, 우리는 점점 진짜 ‘언니들’이 되었다.
수업 초반에 함께 만든 급훈은 ‘( ) 쓰는 언니들’이었다. 괄호 안에 무엇이든 넣어보자 야심 차게 시작했고, 결국 그게 우리 책 제목이 되었다. 책을 만들기까지 기획/디자인/편집팀으로 나눠 각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마지막 수업이었던 출간 발표회 이름은 ‘(꽤) 쓰는 언니들’로 정했다. 돌아가며 앞에 나가 그날 처음 만져 본 책 속의 내 글 일부를 낭독하거나 작가로서의 소감을 이야기했다. 이상하게도 낭독 중에 눈물이 왈칵 올라와 다들 삼켜내기 바쁘고 결국엔 앉아있는 언니들도 휴지를 돌려가며 같이 울었다. 기교 없이 소박하게 써 내려간 진심이 서로에게 진정한 위로가 돼주었다.
글쓰기와 ‘글’이 주는 이 마법 같은 체험은 앞으로도 “계속 써 보겠습니다”라고 다짐한 내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춤을 배우고 싶었다. 두어 가지 장르를 고민하다 기본이 되는 게 ‘재즈 댄스’ 아닐까 싶어 결정했다. 지금 듣고 있는 수업명은 초급도 아닌 ‘Pre 초급반’. 그만큼 완전 초짜도 두려움을 내려놓고 도전했지만, 역시나 몸치인 나를 확인하는 시간들이다. 수업 내용은 몸의 각 부분을 섬세하게 늘리는 스트레칭이다. 필라테스는 거울이 있어도 동작을 하다 보면 나를 계속 쳐다보는 게 불가능했다. 반면 댄스 룸의 벽거울에 비친 나는 보고 싶지 않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어떤 날은 쫌 괜찮아 보이고, 대부분은 미치도록 부끄러운 날의 연속이다. 그래도 몸 구석구석을 살피고 팔 끝, 손가락 끝의 각도까지 신경 써야 한다.
신나는 팝송에 맞춘 간단 안무를 연습하면 선생님이 영상도 촬영하고 공유해 준다. 그 동영상이 또 가관이다. 전신 거울에 비친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객관적인 나, 3인칭으로 나를 관찰하는 기분. 엉망인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재생하고 있으면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손발이 사라지고 쥐구멍을 찾고 싶다. 그동안 무수히 돌려 본 아이돌 댄스와 공연장에서 훔쳐본 무용가의 춤이 거저 된 것은 하나도 없겠구나... 그들이 연습실에서 무수히 흘렸을 피땀 눈물, 독무든 군무든 라인과 합을 맞추기 위해 과연 얼마나 노력했던 걸까. 유튜브에서 아무렇게나 쉽게 보던 영상 속 춤 선이 이전과 달리 보인다. 오롯이 몸으로만 느낌을 표현한다는 게 경이롭기까지 하다.
춤도 글도, 미숙한 초보지만 그 두 가지의 닮은 점을 찾고 있다. 피하고 싶은 나를 직면해야 하고, 그런 나의 모든 것을 이용해 완성해야만 한다. 그 결과물 또한 반복해서 다듬는다. 전체를 보기도 하고, 디테일도 놓치면 안 된다. 흥이 나든 유혹 하든 쥐어 짜든 다양한 감정을 색다르게 표현해야 한다. 관객과 독자가 두렵지만, 그들에게 선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감상자를 만나기까지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은 계속된다.
좋은 춤과 좋은 글이 무엇일까. 나의 작가명이자, 2019년 개인 프로젝트인 ‘땐스어데이롸이터(dance-a day-writer)’를 다시 생각한다. 나는 춤추듯 신나게, 오늘 하루를 쓰는 작가가 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냥 버려진 날도 많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 봐 두렵기도 하다. 지금은 그저 작은 몸부림으로, 책장 속 잊힐 책으로 시작한다. 아무렴 어떤가. 무대 위에서, 행간 안에서 나는 자유롭게 춤추고,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