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필명인 단서련은 나의 40년 인생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춤에서 유래했다. 예중에서 조금 일찍 전공했던 발레, 대학생의 청춘을 모조리 투자했던 힙합,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나 들썩거림의 끈을 놓치 못해 일주일에 한번씩 가뭄에 콩 나듯이 듣고 있는 여러 장르의 춤들. 내 삶과 춤은 씨실과 날줄이 되어 어느 부분은 촘촘하게 어느 부분은 얼기설기 엮어지며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 춤만큼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만화다
자고로 80년대생이라면, 오늘날의 유튜브나 넷플릭스만큼 우리들의 일상, 아니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만화 아닐까? 요즘 아이들은 클릭 한방으로 원하는 것을 바로바로 볼 수 있지만, 우리들은 엄청난 인내심을 가지고 책이 출간되는 시간 혹은 만화 영화가 방영되는 시간을 겸손하게(ㅋㅋㅋ) 기다려야만 했다. 아무때고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기다린 시간 만큼 만남이 허락된 이야기들이 모두 각별했고 소중했다.
인터넷에서 찾아온 나나 창간호 표지, 몽글몽글 추억 돋네요 >_<
만화와 나의 운명같은 만남은 바로 30년 전 이맘때였다. 크리스마스 시즌 커다란 빨간 양말 안에 묵직한 책을 하나 선물받게 되었고, 곧 국민학교 2학년이 될 내가 이건 산타 할아버지가 내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그것은 바로 월간지 '나나'의 창간호였다. 1월호면 보통 그 전달의 말에 나왔으니 크리스마스 선물로 타이밍이 딱이었겠죠. 인생 선물 주신 산타.....아니 우리 엄마, 아빠 칭찬해요. 다만 애써 수집한 책들을 나중에 몽땅 버리긴 했지만요. ㅜㅜ 하하하.
2차 성징이 발현하기 한참 전인 국딩이었지만 한달에 한번씩 나는 '나나'라는 마법에 걸렸다. 엄마는 동네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는 학교가 끝나면 약국으로 돌아와 엄마랑 같이 방과후 시간을 보낸곤 했다. 나나에서 처음 만난 단어들을 종종 엄마에게 물어보곤 했는데 그것들이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진에도 보이듯이 나나는 10대 소녀들을 위한 고급 순정지라는 컨셉을 가지고 있는데 약국의 조제실 안 따뜻한 석유 난로 곁에서 귤을 까먹으며 '예비숙녀'가 무엇인지 물어보았었고, 어느 날은 자양 강장제 한병(약국집 딸이라면 박카스보다는 영진 구론산!)을 따서 홀짝거리며 강모림 작가님의 '여왕님 여왕님'에 나온 요염한 표정의 발가벗은 아기 옆에 적혀있는 '섹시'가 무엇인지 물어보기도 했다. 당시 내 나이이 즈음이던 엄마는 뭐라고 대답해 주었을까 ㅋ
그 외에도 각 만화의 첫 페이지 하단에 작가님들 아주 작은 글씨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힘든) 쌩 집주소가 떡하니 적혀있었는데 이진주 작가님과 이보배 작가님이 우리 동네 주민이었다는데 한번 놀라고 그 주소가 똑같아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을 발견하며 한번 더 놀랐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인기가 엄청 많았던 두 작품, 한승원 작가님의 '빅토리 비키'를 보면서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파마 머리와 탐스러운 황금빛 머릿결을 표현해주는 방법을 배우고, 이은혜 작가님의 '금니는 싫어요'를 보면서 검은 홍채를 그린 뒤 옆에다가 하얀 동그라미를 겹쳐 그려주면 또렷한 눈처럼 보인다는 만화 기술을 터득했다. 그 당시 나는 만화를 읽고 그 뒤에는 몇시간이고 앉아서 만화를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다보니 학급마다 한두명씩은 꼭 있었던 만화 잘 그리는 친구 중 한명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예중 입시를 준비하면서 월간지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졌기도 했지만, 사회적으로도 월간지의 인기가 사그라들기도 했다. 나나를 비롯하여 밍크, 윙크, 소년 챔프, 보물섬 등 문방구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수 많은 광고 종이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한 시대가 저물었으니 새로운 시대, 책 대여점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한방울씩 똑똑 떨어지던 월간지를 지나 이제는 대여점에 진열된 콸콸콸 쏟아지는 단행본들과 함께 나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 많던 책 대여점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웹툰의 시대, 온라인 플랫폼에서 무수히 많은 만화가 매주 연재되고 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틈틈이 손 안의 핸드폰에서 만화를 찾아읽는 삶을 살고 있다. 웹툰에서 내가 봤던 만화들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께 직접 메시지를 보내고 댓글을 달며 소통할 수 있는 한국 만화의 또 다른 전성기가 펼쳐지는 중이다.
앞으로 또 어떤 시대가 열릴까? 미래가 궁금하지만 지금 나는 그 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자 한다. 만화와 내가 함께 - 때로는 각자 - 걸어왔던 길. 우리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에세이로 기록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매거진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만화와 나의 연대기
이 매거진에 들어갈 글들은 만화가 독자에게 닿는 유통 구조의 역사적인 변화를 다루는 만화의 연대기일 수도 있다. 동시에 40년을 살아온 나라는 인간을 되짚어보는 개인의 연대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를 거쳐 오늘날에 닿았고 이제 무슨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미래를 앞두고 있는 나에게 내가 사랑하는 것의 손을 한번 더 꾹 잡고 그 온기를 힘입어 앞으로 전진하고자 하는, 만화와 나의 연대기이기도 할 것이다. 마침 인터넷에서 참으로 좋아했던 천계영 작가님 '언플러그드 보이'의 한 장면(p.129)을 찾을 수 있었다. 매거진을 시작하는 내 마음이 딱 저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