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90년대(초)! 1탄
지금은 일 혹은 육아로 피곤에 찌들어 땅바닥에 붙어사는 어른들이지만, 이들도 한 때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피터팬처럼 에너지가 넘쳐 흐르는 과거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요정 가루를 톡톡 뿌려주고 찬란했던 네버랜드로 다시금 날아가려면 마음에 품은 보석같은 기쁨을 떠올려야 한다. 웃을 일이 많지 않은 어른에게 결코 쉽지 않은 미션이라는 것을 안다. 입가에 미소가 베시시나오는 정도의 웃음도 괜찮다면 나의 보석을 참고해보는 건 어떨런지. 90년대에 감수성이 말랑말랑한 10대 시절을 보낸 분이라면 더욱 효과가 좋을 그것은 바로바로,
만화 잡지
나에게 만화 잡지는 2000년대의 싸이월드이고, 2010년대의 페이스북이고, 2020년대의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브런치 ㅎ)였다. 그것들이 없는 일상이 너무나 허전하지 않은지. 물론 종이와 온라인, 플랫폼의 형태가 완전 다르고 양방향 소통이라 하기에 무리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 나,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을 포함해서 우리들과 만화 잡지의 관계를 일방적 소비라고 말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지 않은지......그 관계는 소비자와 생산자보다는 친구와의 친밀한 소통에 가까웠다. 그녀가 나타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고, 종이에 새겨진 누군가의 모습을 눈여겨 보았고, 그 혹은 그녀, 주인공들의 말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누군가의 생각에 공감하기도 때로는 반(反)하기도 하였으며, 이야기를 다 읽고 책을 덮은 후에도 마음이 간질거려 연습장을 꺼내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슥슥 그려보기까지.
1990년대 초, 진실로 만화 잡지는 그 시절의 8할이었다. 만화 잡지의 전성 시대라 불리울 만큼 당시 만화 잡지를 판매하던 문방구나 서점의 벽면에는 만화 잡지 포스터들이 빽빽하게 메울 정도로 다양한 만화 잡지들이 출판되었다. 경쟁이 치열했던 만큼 잡지를 사면 따라오는 별책 부록의 재미도 쏠쏠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나는 당시 3500인가 4500원이었던 거 같은데, 초딩에게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그 돈이 아깝지 않을만한 부록이 책과 함께 딸려왔다. 보물섬, 소년챔프, 아이큐점프, 영챔프와 같은 남자 아이들을 위한 잡지부터 나나, 댕기, 밍크, 윙크처럼 여자 아이들을 위한 잡지도 가득했다. 후자의 경우 파티, 슈가, 해피, 칼라, 투유, 쥬티, 르네상스, 마인, 화이트, 나인, 비쥬, 오후, 허브, 이슈 등 내가 아는 잡지보다 알지 못한 잡지가 더 많다. 슬픈 사실은 현재 온라인 체제로 전환된 윙크와 파티를 제외하고 이 많은 만화 잡지들이 모두 폐간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사실.
온라인처럼 기록이 따박따박 남아있지 않지만 내가 가장 충성했던 원탑 만화 잡지, 예원문화사의 '나나'를 중심으로 머리에 남은 90년대 기억을 차근차근 꺼내어본다.
나는 초등학교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나나 창간호를 시작으로 만화 잡지에 입문하였다. 당시 인기 작가님이 심혈이 기울여 그린 커다란 책 표지는 물론이려니와, 계간지라 책등이 살짝 얇은 윙크나 댕기와 달리 월간지로 발행되던 나나의 사 모으는 재미는 도톰한 책등에도 있었다. 마치 패션 모델처럼 포즈를 취한 올컬러 전신 만화 캐릭터를 보면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3 (종종 좋아하는 캐릭터까지 얻어걸리면 대박!) 우리집은 나나를 침대 머리맡 선반에 꽂아두었는데 나란히 진열해 둔 책등을 보면 뿌뜻함이 가슴에 차오르곤 했다.
어느 날은 내가 문을 닫고 나갔는데 침대에서 낮잠을 자던 언니의 얼굴 위로 나나가 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 때 자다가 날벼락 맞은 언니가 불벼락처럼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언니의 화를 받아주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 나나는 백과사전처럼 두껍고 무거운 책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님들이 한달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수작업 만화들(스크린톤과 디테일이 살아있는 펜선들 그립다!), 인기 스타/작가와의 인터뷰, 예비 숙녀를 위한 미용 정보, 안 보고 넘어가기엔 섭섭한 별자리 운세와 점성술, 나와 같은 애독자들이 출판사에 보낸 애독자 엽서 코너 등이 한 권의 책에 다 모여 있었으니 두꺼울 수 밖에. 다른 만화 잡지들도 비슷한 포맷을 취했으리라 추측한다. 이 글을 쓰느라 검색을 해보다 유튜버 '진이의날자우리만화TV'님께서 나나 창간호를 한페이지씩 넘기며 구독자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작업해주신 영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만화 잡지들이 중고 서점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사료가 되어버린 이 시점, 특히 나나를 애정하는 나에게는 참으로 감사하고 소중한 영상이다. 옛 만화 잡지의 모습이 궁금하신 분들은 이 자료를 통해 시간여행을 떠나보시기를.
3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사진과 영상으로 다시 만난 나나를 보니 기분이 묘하다. 당시 그렇게 무겁고 크게 다가 온 나나였건만, 어른의 눈으로 보니 그렇지가 않다. 시간이 지나 도서대여점에게 자리를 빼앗긴 만화 잡지, 우리집에서는 괜히 자리만 차지한다는 이유로 애물단지 취급을 받다가 끝내 버림 받은 만화 잡지. 그닥 덩치도 크지 않은 녀석을 보니 아쉬움이 배로 밀려온다.
월간지 나나는 1988년 르네상스, 1991년 댕기에 이어 순정 만화 잡지의 3번째 주자로 1992년에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윙크가 1993년, 밍크가 1995년에 창간한 걸 감안하면 순정 만화 잡지의 최전성기에 물을 잘 탔던 잡지가 아닌가 싶다. 재밌는 것은 92년이라는 시기적 특성 덕분에 나나는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성격을 띄고 있다. 연재 작가 중에 김영하, 최신오 등 남성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유머러스한 소년 만화 성격을 띤 작품들도 눈에 띄고 있다.
만화 잡지라는 것이 원체 한권의 책에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고, 90년대 초라는 시대적 특성상 나나의 충성독자였던 나는 만화의 거대한 스펙트럼에서 순정 만화에만 내 취향을 가두지 않게 되었다. 가슴을 간질이는 사랑 이야기도 좋아하지만,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스포츠 만화(피구와 통키, 축구왕 슛돌이를 지나 슬램덩크로 넘어 온 우리 세대는 특히 더 공감하시죠)도 좋아하고, 가슴이 탁 틔인 남자 주인공(하하핫!)이 등장하는 모험 이야기도 좋아하고, 가슴이 풍만한(하하핫, 이건 내 가슴이 아니...ㅜㅜ)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만화도 좋아한다.
되돌아보건데, 대다수의 여성들이 선호하는 유려한 그림체가 나에겐 작품에 빠져들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다. 나나에서 선보인 작품들 중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은 한승원 작가님의 '빅토리 비키', 이은혜 작가님의 '금니는 싫어요', 이미라 작가님의 '은비가 내리는 나라'와 원수연 작가님의 '휴머노이드 이오'라는 데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첫번째 두 작품의 작화는 순정 만화의 교과서라 할 만큼 그림이 아름답고 섬세했지만 나는 그렇게 빠져들지 못했다.
- 물론 이미라 작가님과 원수연 작가님의 그림도 그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만큼 아름답다. 이미라 작가님의 '은비가 내리는 나라'는 작년 2022년 학산 문화사에서 하드커버양장본으로 재출간되기까지 하였으니 참조하세요!
어떤 이유에서 초딩인 나는 다양한 작품 중 두 작가님의 만화에 더 끌리게 되었을까? 내 취향의 토대가 되어준 만화, 이미라 작가님의 '은비가 내리는 나라'와 원수연 작가님의 '휴머노이드 이오'를 나란히 두고 살펴보니 이 두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판타지'가 아닌가 싶다. 선풍적 인기 작품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남은 작품들 (문계주 작가님의 엄마는 요술쟁이, 황미나 작가님의 맹걸이 소림사에 가다 등) 모두 판타지, 즉 일상에서의 일탈로 일관된 결을 보여주고 있다.
질풍 노도의 사춘기(Teenager)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린이(Child)도 아니었던, 트윈 세대였던 꼬마 숙녀에게 그런 욕구가 강하게 있었나보다. 발 붙이고 사는 현실이 아니라 저 멀리 신비의 세상으로 떠나는 이야기가 간절했나보다. 은비가 내리는 나라에서는 도깨비들의 나라로, 휴머노이드 이오에서는 목성과 지구를 왕래할 수 있는 먼 미래의 우주 세상으로 떠날 수 있었으니.
꿈같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중간중간 작품을 더더욱 맛깔나게 만드는 유머도 참 중요하다. 뭐랄까, 글밥만 있는 책에서는 쉽게 느껴지지 않는 재미라고나 할까. 유머는 만화를 정말 만화답게 만드는 매력의 요소로 다가왔고, 훗날 만화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접할 때, 그리고 심지어 현재 내가 어린이 독자들을 위한 스토리텔링을 고민할 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애정하는 아무튼 시리즈에서 '아무튼, 순정만화: 그 때는 그 특별함을 알아채지 못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왔을 때 2프로 부족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에게 있어 만화는 여성 서사의 돛을 달고 항해하는 돛단배가 아니라 여러가지 공간이 공존하는 거대한 크루즈 함선과도 같으니까.
작년 여름 한국에서 만화 잡지 창간호 전시회를 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흑! 놓쳤다 ㅜㅠ) 이번 여름에 한국을 방문할지도 모르는데 전시회가 열렸던 서울 애니메이션센터 만화의 집을 들려보고 싶다. 만화 잡지 전성시대, 그 시절을 지나왔던 사람으로 그 곳에서 이제는 나와 함께 나이가 들어버린 잡지 친구들을 만나 인사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