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90년대(초)! 2탄
지난 글에서는 1992년 나나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으로 국내 만화 잡지의 전성기를 지나며 나와 만화의 첫 토대를 어떻게 다졌는지를 훑어보았다. 씨앗 받아 흙으로 토닥토닥 덮어주는 작업이라고나 할까. 이번글은 씨앗 위에 덮어준 흙이 촉촉해지도록 물을 뿌리는 다음 단계라고 하겠다. 여전히 90년대 초에 머물러있지만 조금 다른 매체들을 둘러보려고 한다. 그건 바로 (해적판) 만화책과 추억의 VCR 비디오. 우리 애들한테 사진에 보이는 케이스에서 내용물을 꺼내서 보여주면 이거 대체 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ㅋ
두 매체를 관통하는 만화 스토리로 어떤 걸 뽑을까 고민해야 했다. 당시 내가 좋아했던 만화 중 종이책과 영상물이 모두 나온 작품들이 꽤 있었는데 코찔찔이 유치원/초등학교 1학년 즈음에는 '둘리'나 '영심이', '달려라 하니', '날아라 슈퍼보드'와 같은 한국 작품들을 주로 보다가 콧물을 흘리지 않게 될 즈음에 일본 작가님들의 작품으로 넘어가게 된 것 같다. 후자 중에서 드래곤볼, 닥터슬럼프, 슬램덩크와 경합을 펼치다가 (아마도 앞서 작품들은 남성향에 더 가까워서인지) 최종적으로 바로 타카하시 루미코 작가님의 러브 코미디 <란마 1/2>을 골랐다.
란마 1/2
커다란 징소리를 한번 울려주고, 중국 스타일로 란~마~ 하고 소개를 해야 할 듯 ㅋ 제목에는 야빠빠~야빠빠~라고 써놓았는데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이라면 중독성 강한 저 전주를 읽기만 해도 머릿속에 자동으로 음악이 재생되면서 아, 이 글은 란마에 대한 글이겠구나 눈치채셨을 것 같다.
중국으로 무술수련을 떠났다가 물웅덩이에 빠지고 마는 아빠와 아들. 아들인 란마에게는 약혼자, 란마의 아빠에게는 친구이자 사돈이 있는 집에 얹혀사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근데 가만 보니 커다란 덩치의 판다랑 웬 여자애가 찾아온다. 란마를 무술 도장을 이어받을 데릴사위로 데려온 이 집은 딸만 셋이건만 약혼'남'이어야 하는 란마를 두고 웬 여자애?! 알고 보니 두 사람이 무술 수련을 하던 중 빠졌던 곳이 신비의 물이라 그곳에 빠졌던 란마는 찬물을 끼얹으면 여자가 되고 다시 뜨거운 물을 끼얹으면 남자가 되는 기상천외한 저주(?)에 걸려버린 것이다. 아아아, 설정만으로도 이미 너어어어무 재밌어서 작가 지망생이 된 지금의 나는 감탄만 나온다 ㅋ
그때 초등학교 저학년이라서 어떻게 이 만화책이 우리 집에 들어온 건지 기억나지 않는데 나는 란마를 만화책으로 먼저 만났다. 아마도 나보다 5살 연상인 우리 언니가 어딘가에서 사 온 게 아닌가 싶다. (설마 엄마나 아빠가 사 온 건 아니겠지...... 근데 여전히 만화를 좋아하는 아줌마가 돼버린 나이기에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구나!) 그 만화책은 지난 글에서 내가 백과사전만큼 크고 두껍다고 느꼈던 만화잡지와는 완전 딴판으로 생긴, 손안에 쏙 들어오는 앙증맞은 사이즈의 만화책이었다. 아쉽게도 실물이 없어서 사진을 보여드릴 수가 없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단행본보다도 더 작은, 정말 작은 사이즈의 책이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내가 봤던 책은 아마도 500원짜리 미니 해적판인 것 같다. 여기에서는 제목이 '람마'로 나왔고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조금씩 달랐으니까 (하나,두나,세나는 진선미로 나오고 아기꽃돼지로 변하는 요가는 양재로 나왔던 게 기억난다.)
일본 대중문화 물문이 1998년도가 돼서야 공식적으로 열렸으니 그 직전인 90년대 초는 그야말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후 굳게 닫혀있던 문 뒤로 터질 듯이 포화 상태가 된 일본 문화들이 틈새를 통해 한국 시장으로 줄줄 흘러나오던 때였던 듯하다. 일본 문화를 단 하나의 이야기로 일반화해서는 안되지만 어린 시절 내가 너무 재밌게 보았고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만화 애호가들에게 사랑을 담뿍 받는 흡입력 있는 이 작품은 일본 특유의 문화색이 강한 작품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10대에 갓 들어선 그때, 유쾌하고 호쾌한 격투 일상물 란마의 중간중간 찬물에 홀딱 젖어 몸매가 드러난 여 주인공이 나오는 야리꾸리한 장면들이 모든(!!) 에피소드에 빠지지 않고 나왔다. 그런 장면을 몇 초간 뚫어지게 쳐다보게 만드는, 심지어 어른이 된 지금도 생각나게 하는 매력이 가득했으니 참으로 몰입의 힘이 강한 스토리라 하겠다.
지금 우리 첫째가 딱 그 나이 즈음인데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격투를 펼치는 피겨 스케이팅, 기계체조, 치어리딩 대회라던지, 여자가 수건 하나 걸치고 대중목욕탕에서 싸우는 결투를 재밌다고 보고 또 보고 있으면 옆에서 살짝 제재할지도.....? 그런 의미에서 알몸에다가 빤스만 입고 있는 남자 교장쌤이 나오는 캡틴 언더팬츠를 좋아하는 아들은 다행스러울 것인가. 아~ 지혜로운 육아를 하기란 참으로 어렵도다. (우연히도 캡틴 언더팬츠가 최면이 다시 풀려 교장쌤으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 물을 끼얹는 것이다.)
그즈음 엄마가 하시던 약국의 옆 집은 마침맞게 비디오 대여점이었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그 시절 VCR 비디오는 진정 최첨단 기술이 겸비된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기기였다. 공중파에서 해주는 방영시간을 지킬 필요 없이 집에서 만화가 보고 싶으면 비디오를 기계에 넣고 버튼만 눌러주면 모니터에 보고 싶은 작품이 척척 나왔다. 비디오 가게 밖에 덕지덕지 붙은 포스터들, 그 안에 진열장을 가득 채운 비디오, 감질나게 미리보기를 허락해 주던 케이스 뒷면, 내가 보고 싶은 작품을 누군가 이미 대여해 나간지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 그리고 기다림 끝에 그 작품이 손에 들어와 설레었던 순간들이 이제는 모두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일본 본토에서 워낙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고,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만화책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퀄리티가 잘 유지되었다. 반면 한국으로 작품이 소개되는 중 불법 경로를 이용한 만화책에서는 번역의 문제가 상당하여 골치가 아팠다고 한다. 미디엄이 종이에서 화면으로 옮겨진다던지, 대사가 일본어에서 다른 나라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세심한 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을 하는 것이 창작자의 수고에 대한 예의라 할 텐데 다행히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수입/배급된 한국판 비디오 애니메이션은 OST는 말할 것도 없고 대사 번역에서 성우 캐스팅에 이르기까지 그 퀄리티가 제대로 유지되었음이 참 감사하다. 나무위키 자료에도 당시 '대영 비디오판의 성우진은 강수진, 최덕희, 서혜정, 정미숙, 유지영, 백순철, 강구한, 김환진, 장정진을 포함한 온갖 레전드급 성우들이 주요 캐릭터 역으로 캐스팅된 초호화판 더빙'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잠시 언급되었던 슬램덩크 같은 경우에도 비디오 가게의 전성기에 힘입어 (노래를 부르는 아티스트는 다르지만) 원곡의 OST를 충실하게 구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래 링크를 걸어두었으니 노래 한번 듣고 가시죠~
* 이 글을 쓰느라 찾아보니까 드래곤볼은 일본 원곡이랑 한국판이 많이 다르네요. 하지만 한국판 OST도 상당히 좋은 곡으로 제작되었다고 생각해요! 찾아라~드래곤볼~세상에서 제일 스릴 있는 비밀~
개인적으로 나는 란마 덕분에 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을 다질 수 있던 것 같다. 중독성 있는 음악, 개그가 충만한 스토리, (집요함이 돋보이는) 장인 정신 넘치는 장기연재, 그리고 만화 여기저기에 나오는 음식들 덕분에 어른이 된 지금 일식을 자주 찾아먹고 일본어 공부도 계속 놓지 않게 된 게 아닐까. 란마를 떠올리면 인터넷을 서치하지 않고도 여전히 기억나는 이야기에는 일본 음식들이 있다. 세나를 좋아했던 선배가 언제나 락교를 챙겨먹었던 거라던지 (웃겨 ㅋㅋㅋ), 란마의 소꿉친구인 우경은 오코노미야키를 잘 만들었던 거, 그리고 빙상격투 에피소드에서 란마가 세나에게 찝쩍대는 남자를 제재할 때는 먹고있던 라면의 꽃어묵(카마보코)를 던져서 볼따구에다가 맞춰버린 것, 세세한 설정/장면들이 여전히 머리에 남아있는 게 참 신기하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유년시절의 추억,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 란마는 참 반갑다. 한편으로는 애장판 20권이 2021년 3월 31일, 아주 최근에까지 그들의 소식은 업데이트되고 있었는데 나는 나 살기가 바쁘다고 한 때 애정했던 인물들, 란마와 세나, 요가(꾸꾸), 샴푸와 무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끝까지 지켜봐 주지 못한 게 새삼 미안했다. 일단 단행본 구하기는 어려우니까 (아이들이 학교 가있을 때)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고 혼자서 낄낄 웃는 시간을 가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