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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서련 Nov 17. 2020

목욕 중독

2017년 12월 23일 일기

흔히들 중독이라고 하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서 개인의 의지로 쉽게 끊을 수 없는 무언가와 결합된다. 마약 중독, 섹스 중독, 게임 중독, 카페인 중독, 밀가루 중독에서 운동 중독 (아마도 운동의 경우에는 몸에 좋지 않을 정도로 과하게 하는 경우겠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수 만큼이나 이 세상에는 다양한 중독들이 있다. 나는 특별히 중독이라 부를 만큼 절제하지 못하고 과하게 욕심내는 것이 없는 편인데 굳이 한 가지를 꼽자면 바로 목욕 중독이라고 소심하게 밝혀본다. 물론 목욕 중독이라고 해서 내가 매일 목욕을 하며 깔끔을 떠는 건 절대! 아니다.


12월 초까지도 따뜻한 캘리포니아였건만, 이제는 더 이상 만만한 가을이 아님을 확인시켜주는 매서운 겨울 바람이 느껴지는 이번주였다. (껄껄껄. 확실히 겨울 바람이 시작되긴 했지만 확인해보니 여전히 최고 기온이 상온 10도를 웃도는 날씨네요. 죄송합니다.) 울 아이는 남자아이인지라 밖에서 뛰어노는 게 좋겠다는 나 나름의 강박관념이 있어서, 이번주 수요일에 프리스쿨을 마치고 또래 남자 아이를 한명 더 불러서 아이들을 놀이터에 신나게 뛰어 놀게 해주었다. 아이들은 플레이 데이트를 하고, 그 집 엄마와 나, 약간 마른 체구의 두 동양 여인들은 12월 중순이 지나가는데도 안일하게 가을 옷을 입은 덕분에 몸에 잔뜩 힘을 준 채로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한국의 겨울이 무지막지하게 춥긴 해도 뜨끈뜨끈한 온돌 바닥이 그립다, 맨발로 그 따끈한 방바닥을 밟고 싶다, 지금 당장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끈한 오뎅국물 한 컵 마시고 싶다, 소소하고 그리운 이야기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목욕 이야기로 넘어 오게 되었다. 이 때 나는 한번도 쓰지 않는 표현을 처음 듣게 되었는데, 온유 친구의 엄마가 쓴 이 것이 바로 내가 중독된 목욕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녹진녹진해지는 목욕.


다시 말하자면 나는 뜨거운 물에 하는 목욕이 좋다. 미지근하고 따뜻한 물이 아니라 뜨끈뜨끈해서 피부가 살짝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의 목욕이 좋다. 그리고 우리집 화장실이 좀 작긴 하지만, 내가 목욕을 하면 뜨거운 물에서 올라온 수증기가 그 안을 가득 채워서 내가 숨쉬는 공기까지 따뜻해지는 목욕이 좋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집이 실내온도가 유독 낮은 편이라 나의 중독 현상이 좀 더 심해지기도 했다. 안 그래도 겨울이면 심각한 수족냉증이 집에 있으면 (....밖이 아니랍니다. ㅠㅠ ㅋㅋㅋ)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내리는 처방전은 뜨거운 목욕. 뜨거운 물이 정수리에 쏟아져서 머리카락을 따라 부드럽게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나의 몸에 별 곡선은 없지만....-,.- ㅋㅋㅋ) 몸의 굴곡을 따라 온몸을 마사지하듯이 흝어내려오면 근육 사이 사이에 박혀있던 차가운 긴장감이 모두 빠져나와 녹아내리는 것 같다. 혈관의 넓어져서 평소의 나와 다르게 피가 엄청난 속도로 콸콸콸 돌고 있다는 게 몸 구석구석에서 생생하게 느껴진다. 특히 수족냉증으로 고생한 손끝 발끝에 엄청난 양의 피가 전달되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혈관들이 찌릿찌릿하게 느껴진다.


혈관이 확장되는 것 때문에 뜨거운 물로 장시간 목욕하는 게 피부에 그렇게 안 좋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녹진녹진한 그 유혹을 떨쳐낼 수가 없다. 내가 목욕할 때는 타이머로 작동하는 전열등을 켜놓는데, 내가 쓰는 화장실 쪽 타이머가 유독 빨리 움직여서 전열등이 금방 꺼지곤 한다. 집주인한테 말해서 타이머를 고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나의 목욕이 더 길어질 것만 같아 진심으로 꾹 참고 있는 중이다. 완벽한 금뜨목까진 못 하지만 그래도 중독의 강도가 더 깊어지지 않도록 나름 노력하며 양보하고 있다.


2014년에 나고야에 갔을 때 케이코와 마사노리의 신혼집에서 하루 머물렀었다. 그 때 케이코가 목욕물을 받아주어 욕조에서 목욕도 했었는데, 너무나 일본스러운 작은 소형 사이즈였지만 뜨거운 물의 온도를 유지시켜주는 엄청난 보일러 기능이 탑재된 그 욕조가 너무나도 갖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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