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th. 하니아(2)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자기만의 시간 속에 머무는 모습.
여행의 목적은 어디까지 왔는지를 증명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멀리 와서야 비로소, 자기 삶을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에게해를 덮을 즈음, J와 나는 네아초라 해변으로 나선다. 오늘은 ‘노는 일’ 말고는 별다른 계획이 없다. 그래서 걸음도, 마음도 느리다. 하니아 시내 동쪽 끝, 키리아키(Saint Kyriaki) 정교회까지 다녀오기로 한다. 아침 조깅으로 도시를 훑어보는 '달리기 여행'이다.
해변은 이제 막 깨어나고 있다. 아직 밤의 한기를 품은 모래 위로 옅은 빛이 번진다. 파도는 소리를 낮춘 채 가장자리에서만 몸을 풀고 있다. 접힌 파라솔과 비어 있는 선베드에는 아직 새벽 이슬이 맺혀 있다. 해변은 본연의 얼굴로 아침 햇살을 맞고 있다.
모래사장을 따라 걷다가 끝자락에서 인도 위로 올라선다. 길은 자연스럽게 베네치아 항구 쪽으로 이어진다. 해변과 도시의 경계가 나뉘는 구간에서 우리는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숨이 차오르기 전, 몸이 리듬을 찾을 시간을 준다. 바다는 왼편에, 낮은 건물과 골목은 오른편에 나란히 놓인다. 우리는 느린 바람처럼 도시의 풍경을 통과한다.
아침의 베네치아 항구는 조용하다. 카페 의자는 아직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고, 항구 쪽 골목에는 청소차의 소리만 울린다. 발걸음이 바닥에 내딛는 소리가 리드미컬하다. 바다는 여전히 같은 속도로 숨 쉬고, 우리는 그 옆을 스쳐 지나간다. 아침의 도시는 가장 솔직한 얼굴을 드러낸다. 밤의 조명이 걷히고, 관광객의 소음이 아직 닿지 않는 시간이다. 방파제 성벽 위에 올라서자 해가 막 수평선을 넘는다. 물 위에 길게 늘어진 빛이 항구를 가르며 들어온다. 바다는 잔잔하고, 계류된 배들은 아직 잠에서 덜 깬 표정으로 가볍게 뒤척인다.
인기많은 항구 주변의 벤치도 비어 있다. 가게 앞을 정리하는 손길과 빗자루 쓰는 소리만 들린다. 이곳 항구는 베네치아인들이 남긴 성벽과 창고, 오스만의 흔적이 누적된 장소지만, 이 시간만큼은 역사도 숨을 고른다. 우리는 그 사이를 물고기처럼 빠져 나간다.
성벽 끝에서 방향을 틀어 항구 동쪽으로 향한다. 길은 넓어지고, 햇살은 더 선명해진다. 해양박물관을 지나며 속도를 조금 늦춘다. 물결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또렷하다. 곧이어 코움카피 해변이 열린다.
이곳은 화려하지 않다. 모래는 얇고, 해변의 폭도 넉넉하지 않다. 대신 바다는 투명하다. 발목 아래까지 바닥이 훤히 보인다. 흰 벽과 파란 의자,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차양. 해변을 따라 늘어선 카페와 식당은 전형적인 그리스풍이다. 아직 손님을 부르기 전의 시간이라 테이블들은 가지런히 비어 있고, 그 빈자리에 햇빛이 먼저 앉아 있다. 해변 한쪽에는 오래된 시멘트 풀이 남아 있다.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기 딱 좋은 크기다.
조금 더 달려 탐파카리아 동네에 들어선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건물 사이로 울린다. 한때 가죽 공장이었던 건물들이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어떤 것은 복원되어 카페가 되었고, 어떤 것은 여전히 허름한 집으로 남아있다. 새로 꾸민 공간과 벗겨진 외벽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약간의 경사와 불규칙한 바닥이라 속도를 늦춘다. 느릴수록 풍경은 눈에 더 잘 들어온다. 바다쪽 담장 위에는 고양이들이 아침을 먹고 있다. 누군가 고양이 사료를 한줌씩 담장에 얹어 놓았다. 따뜻한 인정이다. 터키만큼은 아니어도 그리스에도 고양이가 많다. 탐파카리아는 있는 그대로의 어촌 마을의 자연스움을 보여준다.
탐파카리아를 지나 동쪽으로 더 나아가자, 키리아키 정교회의 하얀 외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작고 단정한 교회.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다시 돌아설 준비를 한다. 해가 조금 더 올라가자 건물의 색이 달라진다. 흰색이었던 벽이 엷은 베이지색으로 바뀌고, 바다의 빛깔은 더 푸르러진다.
왔던 길을 되돌아 베네치아 항구로 들어선다. 그 사이 항구에 사람이 눈에 띄게 늘었다. 우리처럼 조깅을 하는 커플, 아침의 항구 표정을 사진에 담는 사람들, 비어있던 벤치도 아침 바다를 감상하는 사람들로 다 찼다. 항구는 이제 완전히 깨어 났다. J와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항구를 통과한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파도 소리와 발걸음이 대화를 대신한다. 달리기는 목적을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목적을 지워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뛰면, 도시는 지도 위의 점이 아니라 몸의 기억으로 치환된다.
바다와 맞닿은 해변에는 어김없이 타마리스크(Tamarisk)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키가 훤칠하고 수관이 넉넉한 타마리스크들은 바다와 도시 사이에 조용한 경계를 세운다. 염분 섞인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서 있는 그 나무들 덕분에, 하니아의 해변 풍경은 한층 단정하고 기품을 띤다.
이곳의 타마리스크는 해안에서 자라기 위해 스스로 몸을 바꾼 나무다. 염분 많은 바람을 맞아도 잎을 쉽게 떨구지 않고, 뿌리는 모래 아래 깊숙이 내려가 물기를 붙잡는다. 잎은 가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바닷바람을 흘려보내듯 견뎌낸다. 빠르게 크지 않고, 대신 오래 버틴다.
우리네 팽나무나 녹나무를 떠올리게도 한다. 굵고 뒤틀린 줄기에는 바람의 방향과 계절의 반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가지 끝에는 연한 초록빛 잎이 달려 햇빛을 잘게 부순다. 예부터 타마리스크는 그늘을 만들고,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나무로 심겨져 왔다고 한다. 항구 근처 길과 해변 산책로에 이 나무가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크레타 사람들에게 타마리스크는 장식용 식재가 아니라, 생활을 오래 지탱해 온 동반자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이 나무들은 해변의 수호자처럼 보인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이 늠름하다. 길게 뻗은 크레타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오래된 타마리스크들은 이 섬이 쌓아온 시간과 기억을 붙잡고 있는 뿌리처럼 느껴진다.
출발했던 네아초라 해변으로 돌아왔다. 러닝 앱에 표시된 거리는 11km를 조금 넘는다. 해변을 천천히 걸으며 숨을 고른다. 숙소로 이어지는 길에서 소년 하나와 소녀 하나가 내 쪽으로 걸어온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남매라는 걸 알 수 있다. 아침 해변을 따라, 오빠와 여동생이 나란히 산책을 나선 모양이다. 말없이 걷는 뒷모습이 다정하다. 그 장면은 사진처럼 마음에 찍힌다.
그들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며, 어릴 적 여동생이 떠오른다. 나에게 형제는 여동생 하나뿐이고, 우리는 유난히 가까웠다. 형편상 농촌의 밭과 과수원으로 일을 나가던 엄마는 늘 먹을 것을 챙겨두고 "동생 잘 돌보라"는 당부를 남기셨다. 집에 남은 우리는 둘이서도 잘 놀았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릴 때도 나는 늘 동생을 우리 팀에 데려왔다. 우리는 떨어지지 않는 콤보 세트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우리는 처음으로 오전 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다.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은 그 무섭고 심심한 시간을 견디지 못했고, 어느 순간부터 내 옷자락을 붙잡고 학교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수업도 함께 들었다. 오래전 시골이었기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40대 중반의 여선생님은 정이 많은 분이셨다. 다섯 살짜리를 교실에 같이 앉혀두고, 함께 수업을 듣게 해주었다. 가르치는 일에 앞서 아이들을 품는 어른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던 선생님이었다. 동생과 나는 교실 맨 뒤에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듣고, 하교할 때도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다. 저수지를 지나고, 포도밭을 돌아, 어른들이 ‘신작로’라고 부르던 흙길을 따라 집까지 왔다. 동생이 보채면 업고 오기도 했다.
어느 날은 동생이 수업 중에 교실을 나가 화단의 사루비아를 모조리 ‘초토화’시킨 사건이 벌어졌다. 사루비아꽃 끝을 따 입으로 빨면 달콤한 맛이 난다는 걸 알려준 게 화근이었다. 수업 열외자였던 동생은 밖으로 나가 오전 내내, 지치지도 않고 사루비아 꽃을 따서 빨아댔다. 화단에는 알량한 꿀을 빨린 채 '죽어 나자빠진' 사루비아 꽃 시체들이 즐비했다. 오전 수업이 끝날 즈음, 그 참혹한 현장을 본 선생님은 화들짝 놀라며, 정지 화면이 되었다. 하지만 끝내 혼내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이 사실은 결국 하교 학생들을 보러 나오신 교장 선생님께 들켰고, 그 이후로 동생은 학교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날 집에 돌아오면서 동생은 내내 시무룩했고, 나는 괜히 동생 손을 더 꼭 잡았던 것 같다.
그 업보와 은혜를 함께 갚는 것인지, 동생은 지금 초등학교 교단에 서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마도 마음 한켠에 사루비아 꽃밭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들어오는 길에 숙소 주인이 추천해 준 동네 빵집에 들른다. 유리 진열장 안에는 갓 구운 빵들이 줄지어 놓여 있고,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공기 속에 남아 있다. 고소한 냄새가 코 끝을 잡아당긴다. 치즈가 듬뿍 든 파이, 올리브와 허브가 박힌 빵, 겹겹이 결이 살아 있는 페스트리들이 저마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카운터 앞에는 동네 노부부와 장을 보러 나온 주민, 배낭을 멘 여행자가 뒤섞여 서 있다. 주인은 손짓과 짧은 말로 빵을 설명하고,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몫의 빵 고른다. 나는 조그만 파운드 케잌과 페타 치즈가 들어간 빵 두 개를 지목한다. 아테네에서도 먹어봤던 피로스키(유사 고로케)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부풀어 있다. 종이봉투에 담긴 빵을 들고 가게를 나오니, 손끝과 옷자락에 고소한 냄새가 배었다. 기분마저 고소해진다.
숙소로 걸어오며 빵 냄새와 허기를 못 이기고 피로스키 하나를 꺼내 반으로 가른다. 하얀 페타 치즈가 아낌없이 채워져 있다. 첫 입에 치즈의 향이 강하게 올라온다. 이어 짠맛이 뒤따른다. 치즈의 풍미는 진하지만, 전체적으로 짠 편이다. 달리기로 몸의 수분이 빠져나간 후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유와 함께 먹으면 맛있을 것 같다.
오늘 하루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살기로 한다. 조르바처럼 욕망에 솔직하고 순간에 집중하며 하루를 보내리라.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 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조르바가 한 말을 생각하며 천천히 브런치를 준비한다. 발코니 문을 열어두니 크레타의 바람이 주방까지 닿는다. 익숙한 음식을 차려 놓고, 와인도 딴다. 욕망이 부르면 대답하기로 한 '자유의 날'이니, 한낮의 와인도 문제 될 것 없다. 와인은 마트에서 구입한 크레타 산이다. 잔에 따르니 루비색과 자줏빛이 겹겹이 번진다. 햇살이 와인의 표면을 통과하며 잔 안쪽에 얇은 막을 만들고, 그 흔적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조르바가 와인을 마시며 떠벌이는 장면이 떠오른다.
"늙은 가지에 새 가지가 뻗으면 처음엔 아무것도 없지요. 그리고 거기 처음에 달리는 건 쓰디쓴 열매뿐이지요. 이 시간이 지나고 태양이 열매를 익히면 마침내 꿀처럼 달콤한 물건이 되지요. 이게 포도라고 하는 겁니다. 이 포도를 짓이겨, 우리가 술고래 성요한의 날에 열어 보면, 아! 포도주가 되어 있지 뭡니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나는 크레타에 와서 비로소 그 기적을 실감하고 있다. 조르바가 말한 ‘기적’은 단순한 발효의 과정이 아니다. 카잔차키스는 포도주를 예로 들어 메토이소노(성체 변화)를 말했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육체의 변화에서 의미의 변화로 건너가는 기적의 순간을. 포도즙이 포도주가 되는 것은 과학이 설명하지만,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기쁨이 되고 삶의 노래가 되는 과정은 설명되지 않는다. 조르바의 거침없고 솔직하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태도, 그것이 바로 ‘삶의 메토이소노’다.
조르바에게 건배하며 와인을 한 잔 더 머금자, 크레타의 햇빛과 바람과 시간이 뭉개지며 내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내친김에, 바다 앞으로 나가 본격적으로 놀기로 한다. 해변이 코 앞인데, 바라만 볼 소냐.
“좋지!”
J의 맞장구가 흥을 붙인다. 남은 음식은 용기에 담고, 와인잔과 견과류를 챙긴다. 조금 아쉬운 것 같아 크림 파스타 하나만 새로 만들기로 한다. 숙소 벽장 안쪽에 있던 돗자리와 허름한 파라솔을 꺼내 들고 해변으로 나선다.
물은 맑고 수심도 얕다. 이미 바다로 들어가 수영을 하거나 파도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수온이 찬 편이다. 대신 파도와 햇빛, 물속에 몸을 맡긴 사람들을 구경보며 쉬기로 한다. 유튜브에서 로맨틱 재즈를 틀자 엘라 피츠제럴드의 Misty, 쳇 베이커의 I Fall in Love Too Easily 같은, 느리고 편안한 올드 재즈가 흐른다. 와인은 조금씩 줄어들고, 파도는 그 멜로디에 맞춰 고개를 끄덕인다. 햇빛과 그늘의 경계에 누워 있는 내 주변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내린다. 녹아든 시럽을 몸 위에 붓는 것 같다. 달콤하게, 저항 없이 익사당하는 느낌이다.
얼마나 흘렀을까. 나와 바다 사이, 모래 위에서 누군가가 춤을 추고 있다. 박자에 맞춘 춤이 아니다. 리듬을 따라가기보다는 몸이 먼저 움직이고, 음악이 뒤늦게 따라오는 춤이다. 팔은 과장되게 벌어지고, 어깨는 자유롭게 흔들린다. 얼굴에는 자신감과 웃음이 함께 어려 있다. 동작마다 여유와 호방함이 묻어난다. 조르바다.
그는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인다. 이리 와서 나와 같이 춤추자는 신호다. 나는 망설인다. 춤을 추기엔 아직 술기운이 부족하다는 듯, 빈 와인 병을 가볍게 흔들어 보인다. 조르바는 고개를 젖힌다.
‘남들 신경쓰는 눈치가 만들어낸 핑계 아니고?’
그는 껄껄 웃으며 다시 춤을 춘다. 동작은 더 커지고, 웃음은 바람을 타고 해변으로 흩어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J가 해변을 따라 산책하자고 한다. 우리는 서쪽 해변을 벗어나 사람들이 조금 더 붐비는 해변 중심으로 천천히 걷는다. 조그만 호텔과 식당들이 내어놓은 파라솔과 선베드 아래,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식을 즐기고 있다. 어떤 여성은 가슴을 드러낸 채 태닝을 하고 있고, 누군가는 의자에 편히 기대거나 모래 위에 모로 누워 책을 읽는다. 모래성을 쌓으며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청량하다. 먼바다로 헤엄쳐 나간 사람들은 점점 작아진다. 사람의 형체가 수평선 쪽으로 서서히 녹아든다.
"지중해의 거대한 바다는 고통과 슬픔을 씻어내는 목욕탕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부조리를 포옹하며 침묵한다."
카뮈의 말을 이곳에서 실감한다. 이들에게 지중해는 인간의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삶, 그리고 존재의 부조리함마저도 중립적으로 감싸 안는 자연의 상징이다. 나도 이곳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모순과, 결국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잠시 해방된다. 사람들은 바다 앞에서 그들의 불안과 걱정을 씻어내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 태양 아래 존재하는 육체의 기쁨을 만끽한다.
오후의 해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햇볕 아래 거의 무방비한 자세로 책을 읽는 모습이다. 바다는 바로 옆에서 반짝이고, 아이들의 소리와 파도 소음이 뒤섞이는데도, 그들은 좀처럼 책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이런 장면을 자주 만나게 된다. 지중해의 해변이든, 이탈리아 내륙 산속의 호숫가든, 도심 공원의 잔디밭이든, 심지어 동남아의 휴양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여행지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이 많다. 왜 그럴까, 자연스럽게 물음표가 생긴다.
아마도 그들의 휴식 문화와 관계가 있을 것같다. 유럽인들에게 휴가는 무언가를 ‘해내는 시간’이기보다, 속도를 늦추고 자신에게 돌아가는 시간에 가깝다. 일정표를 채우기보다 비워두려 하고, 경험을 수집하기보다 생각이 고일 여백을 남겨둔다. 그 시간 속에서 책은 가장 조용하고도 충실한 동반자가 된다. 그들은 휴가지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종이책을 펼친다. 시끄러운 해변에서도, 사람들이 오가는 산책로 옆에서도, 책은 그들만의 작은 방이 되어준다. 여행지에서 책을 읽는 행위는 단순한 시간 때우기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자기만의 중심을 되찾으려는 '느린 집중'의 시간이다.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자기만의 시간 속에 머무는 모습. 그 장면은 낯선 곳에서도 삶을 가볍게 소비하지 않고, 순간을 음미하려는 습관으로 보인다. 여행의 목적은 어디까지 왔는지를 증명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멀리 와서야 비로소, 자기 삶을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