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 제우스가 태어난 섬

19th. '아테네'에서 '하니아'로

by 조르바와 춤을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자, 섬의 밤은 전혀 다른 얼굴이 된다.
하늘이 마지막 빛을 거두고, 바다는 검푸른 막으로 변한다.
이 고요한 어둠을 마주하니, 왜 신화가 이 섬에서 태어났는지 어렴풋이 이해된다.


1.

크레타 행 비행기는 오전 출발이다. 아테네에서, 마지막 아침 달리기만 남았다. 여명이 막 테라스에 번질 무렵 숙소를 나선다. 작별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익숙한 골목마다 아쉬움이 배인다.


골목을 벗어나 산책길에 들어서자마자 마음속으로 외친다. '달리기 시작!'

달릴 때마다 출발선에 선 자신에게 이렇게 출발 신호를 알린다. 나는 이 말이 좋다. 내게 중요한 것은 속도나 거리보다, 오늘도 ‘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암시를 준 것은 의사이자 러닝 철학가 조지 시핸(George Sheehan) 말이었다.

“기적은 내가 완주했다는 것이 아니다. 기적은 내가 시작할 용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달리기의 매력은 그 단순함에 있다. 단순한 전진 동작 속에서 심장이 점차 빠르게 박동하고, 그 박동이 살아 있다는 감각을 선명하게 깨운다. 뛰기 시작하면 불필요한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뒤로 떨어져 나간다. 마음이 단순해지고, 하루가 일정한 선 위에 정렬된다.


아테네 마지막 날이라서 그럴까. 발은 아테네 산책로를 달리지만, 마음은 마라톤 평원에 가 있다. 실제 풍경을 본 적은 없지만, 지도를 떠올리며 병사 페이디피데스가 달렸을 길을 그려본다. 풀과 자갈로 덮인 평야, 먼지 날리는 흙길, 전황을 듣고 술렁이는 도시를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뛰어가던 장면을 그려본다. 페이디피데스가 아테네에 승전보를 알린 때가 기원전 490년 9월 12일 경이다. 마라톤 전투가 발생한 직후의 날이다. 지금 시기와 큰 차이가 없을 듯하다. 길은 달라도 이 땅의 공기는 비슷했을 테니 난 지금 2,500년 전 페이디피데스가 호흡했던 공기를 마시며 뛰고 있는 것이다. 그 상상이 뛰는 내내 나를 미소를 짓게 한다.

고대 전쟁의 승전 소식이 시간의 층위를 건너 현대 스포츠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여러 번 생각해도 흥미롭다. 인간은 확실히 극적인 서사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서사가 몸을 움직이게 할 때, 역사는 기록을 넘어 울림이 된다.


달리는 동안, 해가 떠오른다. 길 위에서 보낸 아테네의 기억이 발바닥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이렇게 이 도시와 작별 인사를 한다.


스타브로스 니아르코스 문화센터를 돌아 나올 즈음 해가 뜬다
올리브 가로수 산책로를 따라 달리는 J


2.

공항으로 향하는 기차역 플랫폼에 서니 배낭을 멘 여행자들이 보인다. 바퀴 달린 캐리어가 아닌, 큰 배낭을 버겁게 걸친 모습은 늘 내 시선을 끈다. 자신의 몸통보다 큰 짐을 짊어진 채 묵묵히 이동하는 당당함이 빛난다. 그들의 뒷모습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는지 궁금증을 일으킨다.


이들 배낭족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같은 길 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지 같고, 서로 말을 섞지 않아도 같은 부류의 동질감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미세한 질투도 든다. 굳건하게 버티고 선 다리, 곧추세운 허리, 아무 계획이 없어도 길 위로 나설 수 있는 용기. 이들은 자신감으로 무장한 자유의 전사 같다. 이런 장면과 만나면 내 안의 여행 불씨가 커진다. 길 위에서 만난 배낭 여행자들은 언제나 즐거운 자극제다. 내 여행도 덩달아 젊어진다.


메트로에서 만난 배낭 여행자들
아테네 공항으로 외곽 메트로 내부. 영국에서 놀러 왔다는 학생들.


3.

이지언(Aegean) 항공은 이번에도 연착이다. 그러려니 한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 여행 후반부, 이제 여행지는 에게해를 떠받히는 섬 하나만 남았다. 제우스가 태어난 섬, 크레타(Crete).


배낭에서 <영혼의 자서전>을 꺼내 본다. 카잔차키스는 "크레타는 나의 피요, 아테네는 나의 정신"이라고 했다. 그는 크레타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대학을 다니고 청춘의 시절을 보냈다. 그 이력은 다음 말로 압축된다.

"크레타의 흙은 피와 땀으로 뭉쳐져 뜨겁게 고동치지만, 아테네의 대리석은 차갑고 영원하다. 나는 크레타에서 힘을 얻고, 아테네에서 형식을 얻었다."

아테네를 보았으니, 이제 크레타 차례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궁금했던 땅, 드디어 그곳으로 간다.


비행기에서 내려 하니아 공항의 바람을 맞는 순간, 아테네와는 다른 공기의 질감이 느껴진다. 건조하면서도 짧게 밀려오는 해풍이 섬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버스를 타고 공항을 나서자, 길 양쪽으로 렌터카 업장들이 이어진다. 제주도의 렌터카 업체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크레타는 규모가 다르다. 제주가 단일 화산섬의 형태라면, 크레타는 산악 지형과 수십 개의 계곡이 섬 전체를 갈라놓고 있어 이동 방식 자체가 다르다.


버스가 공항 주변지역을 벗어나자, 풍경이 변하기 시작한다. 황톳빛 흙 위에 낮은 올리브 나무가 이어지고, 멀리 능선이 겹겹이 솟아 있다. 이 섬은 에게해와 리비아해 사이에 길게 뻗어 있고, 동서 길이만 260킬로미터, 남북 폭은 가장 넓은 곳이 60킬로미터로, 면적이 제주도의 4.5배에 이른다. 중앙에는 레프카 오리 산맥이 등뼈처럼 놓여 있고, 그 정상에 제우스가 태어났다는 이다 산(2,456m)이 있다. 산맥에서 곧장 바다로 떨어지는 날 선 지형이다. 계곡과 평원이 번갈아 나타나고, 그 틈마다 마을과 포도밭, 올리브밭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 해안은 하니아–레팀논–이라클리온으로 이어지는 주요 도시가 연안 거점을 3등분 한다. 남쪽 해안은 절벽과 작은 만(灣)들이 이어져 훨씬 한산하다. 섬 하나에서 여러 얼굴을 품고 있는 곳이다. 크레타가 그리스 문명의 또 다른 기원으로 불리는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된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크레타 평원과 산
언덕길 아래로 하니아 시내가 보인다.


4.

창 밖으로 하니아(Χανιά) 시내가 보이자 J는 낮은 탄성을 낸다. 하니아는 그리스 여행을 준비하기 전까지만 해도 잘 알지 못했던 도시다. 카니아라고도 발음되는 이곳은 크레타 섬 북서부의 중심 도시로, 베네치아 식민지 시대의 항구와 오스만 양식의 건물이 공존하며 독특한 풍경을 만든다. 오래된 상점들이 드문드문 박힌 골목과 항만의 곡선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그리스 본토와 다른 결을 가진 섬의 도시라는 인상이 첫눈에 들어온다.


도심 터미널에 내려 숙소를 향해 걷다 보니, 오래된 상점의 그리스 문자들이 더 생경하게 느껴진다. 알파(Α, α), 베타(Β, β), 감마(Γ, γ), 델타(Δ, δ), 파이(Π, π), 시그마(Σ, σ, ς) 같은 글자들은 수학과 과학 책에서 익숙했지만, 막상 여행지에서 언어로 만나면 무척 낯설다. 페니키아 문자에 모음을 부여해 최초의 ‘완성된 알파벳’을 만든 민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간판을 읽으려 하면 외계어에 가깝다. 거기에 명사마다 남성·여성·중성의 문법적 성이 있고, 단어의 강세 위치가 의미를 바꿔버리는 언어라니, 단기 여행자로서는 그 문법의 질서를 온전히 체감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래도 여행을 재미있게 하려면 기본적인 현지어를 익혀야 한다. 튀르키예에서 그리스로 넘어올 때부터 틈나는 대로 반복하고 실험했던 '필수 여행 그리스어'를 다시 반복해 본다. 그리스어 발음은 의외로 리듬감이 있어 몇 번 따라 하면 입에 붙는다.


안녕하세요(아침/낮): Καλημέρα(칼리메라)

안녕하세요(저녁): Καλησπέρα(칼리스페라)

감사합니다: Ευχαριστώ(에프하리스토)

네: Ναι(네) / 아니요: Όχι(오히)

미안합니다(죄송합니다): Συγγνώμη(싱노미)

부탁합니다(천만에요): Παρακαλώ(파라칼로)

맛있어요: Νόστιμο(노스티모)

영어 할 줄 아세요?: Μιλάτε αγγλικά;(밀라테 앙글리카?)

얼마예요?: Πόσο κάνει;(포소 카니?)

화장실이 어디예요?: Πού είναι η τουαλέτα;(푸 이네 이 투알레타?)

한국에서 왔습니다: Είμαι από την Κορέα(이메 아포 틴 코레아)


이 짧은 말들이 내가 거느린 그리스 12 사도들이다. 이 정도만 외워도 여행지에서 대부분의 상황을 커버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네'가 그들에게도 '네'로 발음된다는 것이다. 완벽한 의사소통은 아니더라도, 마음의 첫 단추를 여는 힘이 이런 작은 말에 있다. 유명 관광지라서 대부분 영어 소통이 가능하지만, 이런 사소한 말이 현지인과 따뜻한 소통으로 이어진다.


에게해 바다가 바로 보이는 숙소 발코니 뷰


하니아에서는 계획을 의도적으로 느슨하게 풀어두었다. 해변이 좋으면 해변에 눌러앉고, 조금 심심하면 발로스 라군(Balos Lagoon)이나 사마리아 협곡(Samaria Gorge) 같은 명소를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숙소 문을 여는 순간, 플랜 B는 한꺼번에 사라진다. 숙소 발코니에서 네아초라(Nea Chora) 해변이 바로 눈앞이다. 창문 너머로 파도가 들고 나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고, 바닷바람이 실내까지 닿는다. 굳이 어디로 떠나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덕분에 이 도시에서의 일정은 단순해진다. 에게해가 하루 종일 열려 있는 이 집에서 쉬고, 심심하면 해변을 산책하거나 항구 쪽으로 마실을 나가고, 저녁에는 석양을 즐기면 될 일이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대 도시 압테라(Aptera) 정도만 여행 반경에 놓아두기로 한다.


숙소에서 몇 걸음이면 바다에 닿는다.


5.

숙소 앞으로 바다가 훤히 보이자, 해변이 궁금해진다. 짐을 간단히 정리하고 곧장 밖으로 나간다. 해변은 크지 않지만, 시내와 가깝고 바다가 맑아 여행자와 주민 모두에게 사랑받을 만한 곳이다. 모래사장은 잘 정돈되어 있고 파도는 잔잔하다. 수영복 차림의 가족, 햇볕을 즐기는 유럽 여행자들이 많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크레타는 일조량이 풍부하고 여름이 길며, 유럽 본토에서 항공편 접근성이 좋아 유럽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산책을 나온 주민까지 적당히 섞여 있어 ‘관광지’의 활기와 ‘생활 해변’의 편안함이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발끝에 닿는 모래도 부드럽고 바다는 완만하게 깊어지는 구조다. 에게해 바다의 아름다움이 눈부시다.


네아초라(Nea Chora Beach) 해변


해변을 따라 걷다 작은 선착장을 지나자 항구 풍경이 달라진다. 큰 나무로 둘러싸인 어린이 공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작은 공원이자 어린이 놀이터다. 지금까지 여행에서 본 놀이터 중 가장 멋진 곳이다. 아름드리 타마리스크 나무가 호위병사처럼 둘러싸 그늘을 만들고, 중심에는 놀이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군데군데 나무 벤치는 바다로 시야가 트여 있고, 에게해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온다. 천국의 시골 놀이터를 디자인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네아초라 해변에서 베네치아 항구로 이어지는 길


6.

16세기 베네치아 지배 시기에 건설된 베네치아 성벽(Venetian Walls)을 따라 베네치아 만으로 꺾어지는 지점에 이르자, 풍경이 바뀐다. 오래된 방파제 성벽이 항만을 감싸고 있고, 그 끝에서 하니아 등대가 바다 위로 곧게 서 있다. 항구 안쪽에는 기념품 가게와 카페, 식당이 줄지어 있고, 테라스에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바다를 향해 앉아 있다. 색색의 건물과 수평선이 한 프레임에 담기면서, 이곳이 왜 그리스에서 손꼽히는 관광지 중에 하나인지 단번에 이해된다. 식당마다 밝은 웃음과 식탁 위의 와인잔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바다 풍경이 도시의 오래된 질감과 어우러져 특유의 활기를 만든다.


하니아 베네치아 항구


베네치아 항구에 다가설수록 풍경은 한층 더 복잡한 시간을 품는다.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크레타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이 항구는 그 시절 지중해 교역의 관문이었다. 방파제 끝의 등대는 오스만 시대에 개조된 형태지만, 그 아래를 받치는 돌과 항구의 곡선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남긴 흔적이다. 전쟁과 교역, 망명과 귀환이 뒤엉켰던 도시의 긴 기억이 빛바랜 벽들에 새겨 있다.


지금의 항구는 더없이 밝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식당들의 테라스에는 늦은 오후를 즐기는 여행자들로 들썩이고, 골목 안쪽의 올드타운은 장난스러울 만큼 다채로운 색채로 가득하다. 오래된 창고와 조선소 건물은 카페와 갤러리로 바뀌었고, 과거의 권력이 사용하던 요새는 이제 누구나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가 되었다. 시간은 항구를 해체하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다시 써 내려가고 있다.


베네치아 항구를 중심으로 조성된 중심가
베네치아 항구에서 바라보는 등대


6.

나온 김에, 시내 슈퍼에서 장을 본다. 익숙한 저녁거리와 와인을 산 뒤, 일부러 바다 쪽 길로 다시 되돌아온다. 여행 중에 어떤 풍경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데, 네아초라 해변에서 베네치아 만으로 이어지는 이 길이 그렇다. 조용한 해변과 오래된 성벽, 아기자기한 항구가 경쾌한 멜로디를 만들어 낸다. 바다는 보는 순간마다 표정이 달리하며 재미를 준다. 물리지 않는 풍경이다.


마트의 올리브 반찬과 두부를 연상시키는 로컬 치즈
카페 안의 좌석을 놔두고 일부러 햇볕이 드는 바깥 자리에 앉은 여행객. 백인은 광합성을 하는 종족이다.
네오초라 해변 위, 바다가 바라보이는 작은 공원


바다를 끼고 돌아오는 길, 해변 풍경이 한층 활기차 있다. 가족의 단란한 풍경은 늘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한다. 해변 중간에서 아버지와 아이들이 럭비공을 주고받으며 모래 위를 뒹군다. 공이 예측 못 한 방향으로 튀어 오를 때마다 아이들은 깔깔 웃고, 아버지는 모래를 잔뜩 묻힌 채 일부러 과장된 동작으로 넘어져 아이들의 장난을 받아준다. 가족끼리 만들어내는 이 소리가 해변의 분위기를 더 밝게 만든다.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생동감이 넘친다. 파도 가까이에서 포즈를 잡았다가 물결이 발목을 적시면 깜짝 놀라 뛰어나오고, 그러다 다시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선다. 여행지에서만 가능한 가벼움과 들뜸이다.

해변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바다와 시간을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누군가는 수건을 깔고 책을 읽고, 누군가는 파도와 모래 사이에 가만히 멈춰 서서 수평선을 바라본다. 바다에 들어간 사람들은 가볍게 헤엄을 치고 나와 뜨거운 햇살 아래에 누워 물기를 말린다. 멀리서 보면 한 장의 그림처럼 고요한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사람들의 움직임이 해변 전체에 작은 맥박처럼 뛴다.


해변에서 노는 사람들


7.

이른 저녁을 먹고, 해가 기울 무렵 다시 해변으로 나간다. 내 손에는 맥주 한 캔이, J의 손에는 따뜻한 차가 담긴 텀블러가 들려 있다. 숙소 옆, 바다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니 자연스럽게 카페 입구로 이어진다. 큰 나무 아래로 등불을 밝힌 작은 테이블들이 눈에 들어온다. 전구 갓을 씌운 조명이 가지 사이에 매달려 있고, 불빛은 식탁 위 사람들의 어깨와 손을 조용히 비추고 있다. 온화한 풍경이다.



카페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모래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실루엣으로 바뀐다. 빛의 입자가 빠르게 사그라든다. 바다로 이어지는 작은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쪽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해가 바다와 낮은 산 사이로 넘어가며 하늘의 색채 마술이 시작된다. 붉은빛이 마지막으로 가라앉고, 그 위로 남은 색들은 파란빛에서 짙은 회색으로 서서히 이동한다. 색이 번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층이 하나씩 바뀌는 느낌이다.


어둠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해변의 소음은 잦아든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추고, 파도 소리만 일정하게 들린다. 정막에 가까운 고요함이 세상을 덮는다.


카파도키아의 석양은 지형을 드러내는 빛이었다. 안탈리아의 석양은 바다의 넓이를 강조하는 빛이었다. 하니아의 석양은 그 둘과 달리, 사람과 풍경을 같은 크기로 담아낸다. 오래 기억되는 장면은 대개 이런 여백이 있는 순간에서 나온다. 오늘도 잊지 못할 장면 하나가 마음 속에 저장된다. 바다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석양의 잔광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자, 섬의 밤은 전혀 다른 얼굴이 된다. 하늘이 마지막 빛을 거두고, 바다는 검푸른 막으로 변한다. 이 고요한 어둠을 마주하니, 왜 신화가 이 섬에서 태어났는지 어렴풋이 이해된다.

크레타의 산들은 갑자기 솟아오르고, 계곡은 깊고 날카롭게 파여 있다. 낮에는 평온한 바다가 밤이 되면 빛 한 점 없이 가라앉는다. 인간의 눈이 닿지 않는 틈과 굴이 많고, 그 너머에는 설명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믿기 쉬운 환경이다. 이런 지형과 기후, 그리고 자연의 극적인 명암은 오래전 사람들이 신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바로 이 섬에서 태어나 숨어 자란다. 아버지 크로노스의 두려움 때문에 형제들이 태어나자마자 삼켜졌고, 어머니 레아는 마지막 아이만큼은 지켜내기 위해 그를 크레타로 데려온다. 돌을 포대기에 싸서 남편에게 건네고, 아기는 동굴 속에 숨긴다. 크레타의 깊은 동굴은 낮에도 어둠이 가득하고, 절벽과 숲이 외부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한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이 어둠보다 짙었을 것이다. 제우스는 그 동굴에서 요정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고, 신성한 염소 아말테이아의 젖을 먹으며 힘을 얻는다. 이 섬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성장이다. 크레타의 지형은 숨기기 좋고, 인간의 세계와 신들의 세계 사이를 자연스럽게 가르는 무대였다.


석양이 지고 어둠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지금, 이 섬에서 신들의 운명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그저 신화처럼만 느껴지지 않는다. 자연 그대로의 드라마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상상이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 신화가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어둠 속의 크레타와 에게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오래전 여신이 아들을 감추던 풍경도 이와 비슷했을 것만 같다. 자연이 품은 깊이와 침묵, 그 속에서 태어난 이야기들이 이곳에 와서야 마음에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