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th. 아테네(4)
시간을 더 많이 견뎌낸 것은 돌기둥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파르테논의 기둥은 전쟁과 약탈로 부서졌지만, 소크라테스가 던진 물음은 제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어지며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하드웨어는 무너졌지만, 그들의 소프트웨어는 서양 문명의 OS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따갑고 콧물이 난다. 며칠 전부터 이어진 피로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J는 아침 조깅을 나가고, 나는 오늘만큼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지 않기로 했다. 원래 일정도 ‘여유일’로 비워 두었으니 부담은 없다. 아테네에서 놓친 부분을 보충하거나,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당일로 다녀오면 된다.
J가 조깅을 나서자, 숙소가 조용해진다. 소파에 아침 햇살이 사선으로 떨어진다. 그 빛 속에 들어앉아 지도를 펼친다. 아테네 외곽에 점처럼 찍어둔 이름들이 지도 위에 떠오른다. 남쪽 끝의 수니온 곶(Cape Sounion), 서쪽의 에기나 섬(Aegina), 코린트(Corinth)와 나플리오(Nafplio), 조금 더 멀리 올림피아(Olympia), 스파르타(Sparta), 그리고 북동쪽, 마라톤(Marathon).
'여기를 가볼까?' 생각하면 다른 지역들은 버스나 렌터카가 먼저 떠오르지만, 마라톤만은 '뛰는' 동작이 먼저 연상된다. 당연하다. '마라톤'이란 지명 앞에서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하겠는가.
아테네에서 북동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마라톤은 기원전 490년,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대군을 상대로 승리한 마라톤 전투의 현장이다. 전투가 끝나고 병사 페이디피데스가 이곳에서 아테네까지 달려가 “우리가 이겼다!”라고 외치고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여부보다 상징성이 더 크다. 도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정신, 공동체를 위해 몸을 던진 태도, ‘달린다’라는 행위가 가진 인간적 의지의 극한 같은 것들. 근대 올림픽의 마라톤 종목이 여기서 비롯되었고, 오늘날 아테네에서는 매년 11월, 페이디피데스가 실제로 달렸다는 그 길을 따라 마라톤 대회(Athens Classic Marathon)가 열린다. 여행 일정을 조정해라도 그 대회에 참여해 보고 싶었지만, 11월의 여행 일정은 도무지 무리였고 아쉬움을 삼켰었다.
마라톤을 생각할 때마다 거리 끝에 붙는 '.195'가 미심쩍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여기에도 그 '옘병할' 영국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대체 그놈의 나라는 세계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악당이라는 확신이 더 굳어졌다. 원래 근대 올림픽이 마라톤을 채택했을 때 그 거리는 고대 경로를 따라 약 40킬로미터 남짓이었다. 그런데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영국 왕실이 “출발은 윈저성 앞에서, 결승선은 귀빈석 바로 앞에서 보고 싶다”고 요청하는 바람에 42킬로미터 확정 거리를 195미터 덧붙였다.
이 나라에서 파르테논 신전의 외벽 프리즈(frieze, 벽화 조각), 메토프(metope, 부조), 그리고 신전 동쪽과 서쪽 박공(pediment)에 있던 조각상들 중 상당 부분 가져가더니, 고대 마라톤의 역사적 거리의 표준까지 자기 편의대로 비틀어 버렸다. 자기가 편하게 보기 위해서 남을 더 뛰게 만드는 횡포가 이후 세계 대전에서는 아무렇게나 남의 나라 국경을 그어버리는 만행으로 발전한 것이다. ('마라톤'에 와서 그곳을 달려보지 못한 아쉬움을 괜히 영국에게 화풀이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상관없다.)
나는 늘 여행이 ‘본다’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 장소가 품은 방식으로 몸을 움직여보고, 그 문화를 작은 단위로나마 살아보는 일을 가치있게 여긴다. 풍경은 눈에 남지만, 경험은 몸에 남는다. 낯선 도시에서 뛰어보는 일이 그 도시를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 중 하나라고 믿는 사람이 마라톤을 코 앞에 두고 달려보지 못하다니. 이 분함이 언젠가 아테네 재방문의 연료로 쓰이길 기대해 본다.
J가 돌아오고 나서야 소파에서 일어난다. 길이 낯설어 오래 뛰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그 말이 왠지 미안하게 들린다. 함께 나섰다면 오늘 아침은 또 다른 풍경 속에 있었겠지. 몸 상태를 고려해 오늘은 천천히 시작하기로 한다. 여행은 끝까지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멈춰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이 오래 버티니까.
아테네에서 며칠 머물다 보니 이 도시의 공기가 얼마나 건조한지 실감하게 된다. 설거지해 둔 식기는 금세 말라 있고, 피부도 빠르게 수분을 잃는다. 억지로라도 물을 자주 마시지 않으면 호흡기에 탈이 생기기 십상인 환경이다.
오전을 여유있게 보내고 난 뒤, 우리는 필로파포스 언덕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일요일의 거리는 조용했고, 햇빛을 받은 오렌지 가로수가 가볍게 살랑거린다.
언덕의 오르막은 완만했지만, 나무보다 바위와 자갈이 더 많이 보인다. 이곳의 토양이 얼마나 척박한지 한눈에 드러난다. 뜨거운 햇볕과 낮은 습도, 석회석 성분이 많은 땅을 이기고 자랄 나무는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땅을 견디고 자란 나무, 그것도 유실수가 바로 올리브다. 그러니 얼마나 대견하겠는가.
아테네에서는 올리브가 유난히 가까이에서 보인다. J가 아테네를 더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신화에 따르면, 도시의 수호신 자리를 두고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경쟁했을 때, 포세이돈은 삼지창으로 바위를 내리쳐 바닷물을 솟아오르게 했고, 아테나는 창끝으로 땅을 찔러 올리브 나무를 자라나게 했다. 사람들은 생명을 주는 나무를 택했고, 도시는 여신의 이름을 따 ‘아테나이’, 지금의 아테네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조깅길 옆, 시장 입구, 골목 담장 아래, 심지어 박물관 현관에 이르기까지 도시 어디에나 이 나무가 서 있다. 잎의 은색은 강한 햇빛을 반사하며 먼 거리에서도 부드럽게 빛난다. 바람이 불면 얇은 잎들이 두 가지 색을 번갈아 드러내며 움직인다. 어딜 가든 이 지역의 기후와 농업, 음식 문화 전체를 지탱해 온 나무의 존재감이 꿈틀댄다.
지중해 문명에서 올리브는 나무가 아니라 ‘생명의 동반자’다. 그리스는 유럽 올리브 생산량의 약 10%를 차지하고, 인구 대비 소비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고대에는 식용기름이자 연료였고, 종교의식과 왕권 상징, 체육 경기의 보상물로도 쓰였다. 기름 짜는 기술은 식품 산업을 넘어 무역과 해상 교류를 이끄는 기반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소규모 농가의 중요한 수입원이다. 가지치기, 수확(주로 수작업), 압착과 저장 방식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고, 그 차이가 곧 문화가 된다.
아테네인들의 일상에 올리브가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시장에는 수백 종류의 올리브 오일이 병에 담겨 있고, 카페 테라스에서는 올리브 그늘 아래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가정에서는 튀김보다 찜·샐러드·오븐 요리에 올리브 오일을 아낌없이 사용한다. 아테네 어디를 가든, 고대부터 이어진 문명의 흔적이 오늘 생활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J는 올리브에서 나는 부드러운 식물향이 좋다고 한다.
언덕 중턱을 오르는 길가에 작은 바위굴 하나가 보인다. 안내판에는 ‘소크라테스의 감옥(Socrates’ Prison)’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실제로 그가 이곳에 갇혔다는 직접적 증거는 없지만, 오래전부터 아테네 사람들은 이 굴을 그의 마지막 장소로 전해왔다. 어두운 바위 틈은 햇살이 거의 닿지 않고, 입구만 희미하게 빛난다.
왜 소크라테스는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을까?
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철학을 시작했고, 아테네의 광장에서 젊은이들과 끝없는 질문을 주고받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 방식은 어느 순간 도시의 불안을 건드렸다. 젊은 세대를 선동했다는 비난, 전통적 신을 경시했다는 고발, 패전 이후 흔들리던 공동체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누군가에게 소크라테스는 그 시대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불편한 시민’이었다.
변론에서 그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죽음을 피하는 방법이 있었음에도 그는 도시가 내린 판결을 받아들였다. 비극적이지만, 그 선택은 이후 세대에게 더 오래 전해졌다. 그가 남긴 방식은 ‘가르침’이 아니라 ‘문제 제기’였다. 제자 플라톤은 그 질문법을 철학 체계로 발전시켰고,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어받았다. 한 사람의 사유가 도시의 광장에서 태어나 서양 사상의 줄기를 만든 셈이다.
어두운 바위굴을 다시 바라본다. 특별한 형상도, 장식도 없는 공간이다. 그러나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한 시민의 생애가 이 언덕 어디쯤을 지나갔을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장소의 정적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잠시 후 시야가 넓게 열린다. 필로파포스 언덕 정상에 오르자, 아크로폴리스가 정면에 펼쳐진다. 하얀빛을 품은 파르테논이 언덕 위에서 조용히 서 있다. 어제는 그 구조물의 안쪽을 걸으며 ‘파르테논’이라는 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면, 오늘은 이 자리에서 ‘아크로폴리스’라는 숲 전체를 바라본다.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을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페리클레스다. 그는 정치가이자 전략가였고, 동시에 예술과 철학을 품은 인물이기도 했다. 페르시아 전쟁으로 도시가 폐허가 되었을 때, 그는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아테네의 정신을 다시 세우는 재건을 추진했다. 파르테논은 신전이면서도, 아테네 민주정의 자부심과 인간 이성의 힘을 돌로 번역해 낸 건축이었다. 신의 집을 짓는 일 같지만, 실은 인간의 능력과 세계관을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 새기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놀라울 만큼 짧았다. 페리클레스의 죽음 이후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휘말리며 급격히 쇠퇴한다. 해군력을 기반으로 번영을 누리던 도시가 스스로의 분열과 오만으로 흔들렸고, 민주정은 내홍을 견디지 못했다. 한때 지중해를 주도하던 도시가 역사의 주변으로 밀려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흥망성쇠라는 말이 아테네만큼 선명하게 보이는 곳도 드물다.
이곳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아크로폴리스의 풍경은 고요하지만, 그 고요가 역사의 파편을 품고 있어 어딘가 아득하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고 독배를 들었던 시기와 파르테논이 찬란하게 완성되던 시기가 거의 겹쳐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놀랍다. 도시가 가장 빛나던 시기에, 그 도시의 근본을 묻는 철학자는 감옥에 있었다. 근본을 파헤치는 사유는 금지되었고, 문명은 스스로의 방식으로 균열을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을 더 많이 견뎌낸 것은 돌기둥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파르테논의 기둥은 전쟁과 약탈로 부서졌지만, 소크라테스가 던진 물음은 제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어지며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하드웨어는 무너졌지만, 그들의 소프트웨어는 서양 문명의 OS가 되었다. 문명이 무엇으로 오래 살아남는가를 묻는다면, 아테네는 가장 분명한 사례를 남긴 도시다. 파르테논이 고대 아테네라는 실재를 상징하지만 그 시대가 품었던 문명과 철학을 힘을 반추해보지 않는다면, 저 멀리 세계문화유산 1호의 진정한 의미 모른 채 '커다랗고 오래된 돌기둥' 만을 보고 온 것이다.
그래서 이 도시를 이해하려면 세 곳이 다 가 보는 것이 좋다. 거대한 신전의 파르테논, 유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그리고 지금 여기, 필로파포스 언덕. 이 세 장소가 삼각형을 이룰 때 비로소 아테네라는 문명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찬란함과 쇠락, 사라진 건축과 살아 있는 사유가 한 프레임에 들어온다.
멀리 파르테논의 색이 변해간다. 오후가 기울고 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뇐다.
“문명은 돌로 세워지지만, 오래 남는 것은 질문이다.”
어쩌면 그 말이, 소크라테스가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던 진실이 아니었을까.
언덕 정상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맞는 햇볕은 더욱 강렬하다. 투명한 화살 같다. 비켜설 곳이 없다.
"아티키(아테네가 속한 주)의 빛은 부드럽지도, 몽롱하지도 않다. 그것은 잔인할 정도로 투명하다. 이곳의 빛은 사물에게 그림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벌거벗겨 진실을 드러낸다."
카잔차키스가 이곳의 햇빛을 두고 한 말이다.
"이곳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안개 속에 숨을 수 없다. 신조차도 윤곽이 뚜렷해진다. 아테네의 빛 아래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위대함을 동시에 직시하게 된다."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고 온 뒤라서 그런지, 이 말은 직선으로 날아와 꽃힌다.
걸어온 길을 되밟아 숙소로 향한다. 길가 옷가게 앞, 스파르타(Sparta) 글자와 투구가 그려진 티셔츠가 눈에 띈다. 영화 <300> 이후 '스파르타'는 ‘불굴의 전사’라는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테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스파르타를 꼭 가보자고 생각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깊숙한 남쪽, 아테네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품고 있을 것 같았다. 그곳까지 내려가 역사책의 뒤쪽 장을 직접 넘겨보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동 루트를 확인해 보니 200~250km 거리에 산악 지형이 험해, 당일 대중교통으로는 다녀올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스파르타 유적은 그 시대의 유적을 거의 볼 수 없다는 얘기에 마음을 내려놓았다.
스파르타의 유적이 적은 이유는 이 도시의 본질과도 연결된다. 아테네가 민주정과 건축, 예술을 도시의 자부심으로 삼았다면, 스파르타는 오직 군사 규율과 전사의 기개를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였다. 그들은 성벽조차 필요 없다고 믿었다. “진정한 방어는 시민의 용기에 있다”는 믿음이었다. 돌로 만든 건축물보다 훨씬 단단한 공동체를 꿈꿨지만, 그 체제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스파르타는 한때 그리스 전역이 두려워한 병력의 도시였고, 절제와 규율을 최고 가치로 삼았다. 아테네가 민주주의와 건축의 황금기를 대표한다면, 스파르타는 오직 철저한 군사 규율과 단결력에서 나온 압도적인 전투력을 핵심으로 삼았다. 두 거대 세력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격돌했다. 아테네의 해군력과 스파르타의 육군력이 맞선 이 전쟁은 장기적인 소모전 끝에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 승리는 스파르타의 몰락을 예고했다. 스파르타는 전쟁 승리 후 내부 체제의 와해와 노예(헬롯) 문제 심화, 그리고 기원전 371년 테베와의 레욱트라 전투에서의 결정적 패배로 빠르게 몰락했다.
나는 때때로 찬란한 문명의 흥성보다, 사라진 도시의 뒷면에 더 마음이 끌린다. 그 추락 속에는 인간의 본성과 욕망, 제도가 스스로를 갉아먹는 방식, 그리고 변화에 둔감한 공동체가 맞이하는 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멸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비극보다, 그 안에 담긴 구조적 원인과 공동체의 판단과 선택에서 배우는 바가 더 크다.
18일째 저녁, 마침내 두 번째 라면을 꺼낸다. 이름만 말해도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라면, 짜파게티.
한국인에게 짜장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기억의 맛’이다. 어린 시절 생일상 대신 먹었던 외식의 상징, 회식 자리의 중간 휴식, 주말 오후를 대강 정리해 주는 생활 음식의 요약본. 짜장면은 중국 음식점에서 시작됐지만, 한국인의 위 속에서 완전히 독립해 하나의 ‘국민 정서’가 되었다. 그러니 그 짜장을 건조 기술로 응축해 만든 짜장라면은 말하자면 고형화 된 향수, 즉석 조리된 고향의 축소판이다.
나는 짜파게티 봉지를 뜯는 순간부터 자세가 달라진다. 영화 <김씨 표류기>의 김씨가 짜장면을 만드는 장면과 겨뤄도 될 정도다. 스프는 분말 입자 하나도 새지 않게 털어 넣고, 건더기스프의 미세 조각까지 모아 투하한다. 물 조절은 거의 실험실 연구원 수준이다. 이건 요리가 아니라 정밀 과학이다.
다만 하나의 요소만 조정한다. 후첨 올리브오일. 여긴 그리스다. 마트에 가면 긴 진열대가 모두 올리브 오일로 채워진 곳이다. 굳이 작은 비닐에 담겨 생색이나 내는 기름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지역산 오뤼지널 엑스트라버진을 듬뿍 뿌린다. 순간, 풍미가 올라오며 라면은 극강의 요리로 변한다.
한입 넣는 순간 눈이 감긴다. 이건 의지가 아니라 반사다. 한국인의 유전자 어딘가에 짜장을 인식하는 스위치가 따로 있다. 라면은 싸고 빠르고 간단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단순함이 마음까지 정리해 준다. 그래서 나는 늘 농담처럼 말하지만 꽤 진심이다. 노벨평화상 후보에 라면을 올려야 한다고. 아니라면 ‘노벨군침상’을 신설해야 한다고.
제사를 지내 듯 신성한 탐닉을 하는 나를 쳐다보며 J가 말한다.
“나를 처음 탐한 날도… 눈빛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못 들은 척, 흘린다. 이 순간 나는 애처가도, 역사 애호가도, 문명 탐험자도 아니었다. 그저 짜장면 앞에 납죽 엎드린 소박한 미식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