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풍경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가 내 안으로 조금씩 흡수되는 감각을 확인하는 일이다.
타 문화를 이해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내 중심을 다시 세우는 일.
세계가 얼마나 넓고, 복잡하고, 동시에 아름다운지 길 위에서 깨닫게 된다.
이라클리온 항구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요했다.
아침 햇살이 바다 위에 얇게 깔리자 물결은 금빛을 털어내듯 흔들린다.
그 앞에서 나는 이 여행의 마지막 페이지가 조용히 넘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이 순간의 정적은 카잔차키스가 말한 '영혼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같다.
여행은 결국 이런(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데 모든 것이 일어난 듯한) 순간을 남기고 끝난다.
이번 여행 에세이를 쓰는데 기준으로 삼은 책이 몇 권 있다.
하루키의 <먼 북소리>, 김훈의 <자전거 여행>,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하루키에게선 감정에 눌리지 않는 건조한 정직함을,
김훈에게선 몸과 오감에서 출발하는 견고한 문장을,
유홍준에게선 풍경과 역사를 한 장의 유물처럼 읽어내는 사유의 층위를 닮고 싶었다.
그리고 카잔차키스에게서는 온몸으로 땅을 기며 진리를 갈구하는 구도의 언어를 배우고자 했다.
그는 낯선 땅의 빛이나 돌, 사람의 주름까지도 기꺼이 자기 존재의 떨림으로 받아들였다.
시선을 흉내 내고 싶었다기보다, 결심과 행동으로 ‘길 위에서 영혼을 흔들고 깨우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며 여행 중 만난 도시들은 점차 한 장의 이미지로 압축된다.
이스탄불은 혼란과 질서가 비밀스레 얽혀 있는 거대한 생물 같았고,
카파도키아는 기괴함과 아름다움이 서로를 비추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안탈리아는 바람과 물빛이 먼저 말을 걸어오던 도시였고,
이즈미르는 습기를 머금었지만 가장 따뜻한 인간적 시선을 품고 있었다.
아테네는 걷기만 해도 사유가 따라붙는 곳, 발밑 돌들이 전부 질문이었던 도시였다.
하니아는 바람이 빛을 끌고 다니는 도시였고,
이라클리온은 땅 아래 묻힌 문명이 시간을 밀어 올리는 도시였다.
도시마다 다른 온도와 색, 질감이 내 안에서 뭉개지고 섞인다.
여행은 풍경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가 내 안으로 조금씩 흡수되는 감각을 확인하는 일이다.
타 문화를 이해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내 중심을 다시 세우는 일.
세계가 얼마나 넓고, 복잡하고, 동시에 아름다운지 길 위에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여정의 중심에는 J가 있다.
J와 함께 걷고, 보고, 먹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풍경을 바라보는 일 자체가 내 여행의 거의 모든 것이다.
어떤 순간은 J의 웃음 때문에 더 환해졌고,
어떤 순간은 J의 침착함 덕분에 안정되었고,
어떤 순간은 J의 호기심 때문에 더 깊어졌다.
우리가 걸어온 모든 길은 결국 서로의 내면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는 길이었다.
이라클리온 항구의 아침 빛은 마지막 순간까지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 고요한 물결을 바라보며 다음 여행의 작은 떨림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느꼈다.
이번 여행이 문명의 발상지로 떠나고 싶었던 오래된 충동 때문이었다면,
다음 여행은 또 어떤 북소리가 내 가슴을 울릴까.
아직 어디인지 모르는 그곳이, 벌써 미세하게 나를 부르고 있다.
흔히 창작은 가장 정확하고 고상하게 고백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과 고백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이었다. 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 그것은 새로운 땅과 바다들, 새로운 사람들과 사상들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마음껏 음미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오랫동안 머뭇거리며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시간이 그것들을 고운체로 걸러서 나의 모든 기쁨과 슬픔의 정수로 정제시킬 때까지, 내 안에서 고요하면서도 격렬한 결정화가 일어나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보기에 이런 마음의 연금술이야말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커다란 기쁨이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스페인 기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