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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윤 Nov 03. 2015

지워낸 날들의 이야기

지워낸 날들의 이야기




2.


나는 대학에 딸린 학생 기숙사 중 한 곳에 머물기로 되어있었다. 기숙사는 도심과 약간 떨어진 휘태커 가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두 동짜리 건물이었는데, 노란 복도, 초록 복도, 붉은 복도로 구역을 나누고 있었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초록 복도 구역이 시작되는 첫 번째 방으로, 가구들이 약간 낡았지만 방 전체가 나무색과 벽돌색으로 꾸며져 조촐한 분위기를 내는 독방이었다. 기숙사에는 그 외에도 도서실, 피아노실, 식당, 운동장, 공동세면장, 공동거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안온하게 정착되어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적어도 첫인상만큼은 그랬던 기억이 난다.


도시는 항구가 인접한 곳이었다. 수도는 아니었지만 나라의 가장 큰 도시라고 했다. 첫 며칠간은 날마다 도시를 걸어다녔다. 커다란 배들이 정박해있는 항구, 아주 오래되어 검게 변색된 옛날식 법원 건물, 빛 한 가닥이 땅으로 떨어지는 모양의 네온으로 장식된 공과대학, 갈림길 사이에 서 있는 고전유럽풍의 음악회장, 게임장이 같이 있는 어둡고 파란 멀티플렉스 영화관, 가끔 장이 서거나 행사가 열리는 도심 광장, 모닥불이 있는 주점, 얇고 어두운 재질의 종이로 만들어진 저렴한 책을 파는 지하서점, 다갈색 피부에 하나같이 용맹한 표정으로 묘사된 원주민의 초상화가 가득 걸려있는 시립미술관, 나는 비행기에서 막 내렸을 때의 우울과 불안감은 잊어버리고 도시에 빠져들어갔다. 세계는 내가 좋아하는 곳과 아직 가보지 않은 곳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의도치 않게 태어났고, 언제부터인지도 모른 채 살아지고 있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다음 목적지에 도달해있었던 삶ㅡ즉, 미래를 향해 앞서 '가고만' 있던 삶ㅡ으로부터, 자취가 곧 하루가 되고, 모든 것은 그 순간을 위해서 오로지 유효하며, 시선과 걸음 닿는 곳이 전부 목적지가 되는 삶ㅡ즉, 고요하고 멈춘 시간에 나를 가득 길어넣은 후에야 비로소 만족하여 나아가는 삶ㅡ으로 떠나온 느낌이었다. 채워진 시간은 그 무게에 따라 스스로 가야만 하는 곳으로 제각기 출발하였으며, 나는 그 중심에서 변화하는 생과 감정을 인지하고 그것을 그대로 마음에 담았다. 도시에는 일기처럼 나의 자취들이 쌓여갔다. 무언가 이루어질 것 같았고, 아무 것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학기가 시작하려면 좀 멀었었기 때문에, 기숙사 안은 한적했다. 얼마간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나는 일상적인 것들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식당에서는 아침식사로 매일 빵과 버터, 샐러드를 주지만, 중국식 죽은 화요일에만, 삶은 달걀은 금요일에만 나온다. 매일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에는 사이먼이 도서실에 딸린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는다. 초록 복도 구역의 끝방에 사는 구역장 이세이는 금요일마다 소규모로 술파티를 연다. 기숙사에 처음 온 학생들을 안내하는 것은 언제나 방장 알렉스의 역할이다. 주말 오전에는 함께 영화를 보러 가거나 외식을 하러 가기 위해 시간을 낸 학생들이 로비에 무리지어 앉아있다.


이런 소소한 것들 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끌었던 것은, 피아노실에서 누군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의 1악장을 연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 또한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쳐왔고 더군다나 그 즈음에는 쇼팽의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와 발라드 1번을 연습하고 있었기 때문에, 떠나기 전 기숙사에 피아노가 구비되어 있다는 안내를 보고 기뻐했었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곡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피아노가 없어 그만둬야 했다면 무척 아쉬울 뻔했기 때문이었다. 피아노실은 벽면의 커다란 창으로 햇빛이 잘 드는 넓은 방이었고, 방 한가운데에 베이비 그랜드 한 대가 놓여있는 구조였다. 의자 위에 쌓여있는 악보 중에는 드물게 드뷔시나 스크리아빈의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팝송 편곡본이거나 영화음악이거나 했다. 그러나 피아노 악보대 위에 놓여있는 것은 언제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이었고 매일 조금씩 페이지가 바뀌어있었다. 나는 내심 궁금했지만 미지의 그 사람과 마주치는 일은 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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