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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윤 Sep 17. 2015

유행

유행




초여름 소녀들 사이에선 새로운 패션이 유행한다

소나무 냄새가 나는 바이올린 핸드백

각자의 머리카락으로 현을 감고

가장 진한 눈물로는 몸통을 닦고

아무 것도 엿보이지 않는

벌어진 검은 홀

새끼손가락만은 지판 아래에 숨긴다


무엇도 흘리지 않으려는 듯 꼭 잡은 손바닥 자국이 남는다 선명하게 질린 채로 다시 점묘되어 부서지는 우아함과 관능 그리고 수천 가지의 운지법을 믹서기에 함께 넣고 돌리면 교음 어린 현기증이 연주된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소녀들은 이것을 묵음 처리하여 손톱 끝에 물들인다 영원을 다 사용할 것처럼 감아 올려 팽팽하게 조율되는 머리카락들의 무덤 앞에는 번쩍이는 지조의 브릿지가 다물려있다 밝아오는 새벽에는 모두 흰 드레스를 입고 모두 바이올린 핸드백을 갖고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채 도착해있다 장식처럼 이목구비가 없는 얼굴로


탄력을 잃은 늙은 손목들이 소녀들의 손톱을 활로 다듬는다

무릎을 꿇고 벌어진 검은 홀을 엿듣는 혀들

숨겨져있던 새끼손가락이 발각되고

소녀들은 더 이상 핸드백을 움켜잡지 않는다

망연한 계절이 한 뼘 씩 천천히 무너져내린다

첫눈이 내리기도 전에 손톱은 다 닳는다

유행은 일방적인 축제이다


내리깔린 드레스에 태생이 깃드는 밤 보면대 위를 마약처럼 걷는 흰 발들이 첫눈 속에 박힌다 새로운 계절이 오기 전에 똑같은 유행이 먼저 올 것이다 소녀들은 구름을 입에 물고 앵무가 부푼 하나의 방이 되어간다


바이올린이 열리고 솔방울들이 분수처럼 솟아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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