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
초여름 소녀들 사이에선 새로운 패션이 유행한다
소나무 냄새가 나는 바이올린 핸드백
각자의 머리카락으로 현을 감고
가장 진한 눈물로는 몸통을 닦고
아무 것도 엿보이지 않는
벌어진 검은 홀
새끼손가락만은 지판 아래에 숨긴다
무엇도 흘리지 않으려는 듯 꼭 잡은 손바닥 자국이 남는다 선명하게 질린 채로 다시 점묘되어 부서지는 우아함과 관능 그리고 수천 가지의 운지법을 믹서기에 함께 넣고 돌리면 교음 어린 현기증이 연주된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소녀들은 이것을 묵음 처리하여 손톱 끝에 물들인다 영원을 다 사용할 것처럼 감아 올려 팽팽하게 조율되는 머리카락들의 무덤 앞에는 번쩍이는 지조의 브릿지가 다물려있다 밝아오는 새벽에는 모두 흰 드레스를 입고 모두 바이올린 핸드백을 갖고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채 도착해있다 장식처럼 이목구비가 없는 얼굴로
탄력을 잃은 늙은 손목들이 소녀들의 손톱을 활로 다듬는다
무릎을 꿇고 벌어진 검은 홀을 엿듣는 혀들
숨겨져있던 새끼손가락이 발각되고
소녀들은 더 이상 핸드백을 움켜잡지 않는다
망연한 계절이 한 뼘 씩 천천히 무너져내린다
첫눈이 내리기도 전에 손톱은 다 닳는다
유행은 일방적인 축제이다
내리깔린 드레스에 태생이 깃드는 밤 보면대 위를 마약처럼 걷는 흰 발들이 첫눈 속에 박힌다 새로운 계절이 오기 전에 똑같은 유행이 먼저 올 것이다 소녀들은 구름을 입에 물고 앵무가 부푼 하나의 방이 되어간다
바이올린이 열리고 솔방울들이 분수처럼 솟아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