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춤추는늘보 Oct 20. 2023

힘 빼기의 어려움

힘을 빼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요. 힘 좀 빼세요.”


피아노 레슨 때마다 듣는 소리다.


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나는 아직 ‘힘 빼고 치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뭔가 내 자세가 잘못된 건 알겠다. 고작 한 시간밖에 연습하지 않았는데도 팔과 손가락이 아픈 건 힘을 빼지 못한 탓이겠지.


피아노 칠 때 힘을 빼라는 건 어깨나 팔에 힘을 빼라는 소리다. 손가락 끝의 힘은 유지하되 팔의 중력을 이용하여 쳐야 한다. 초보자는 손가락의 힘과 독립성이 부족해서 팔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십상이다. 손가락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지겹게 하농을 치고, 스케일 연습을 하면서 고단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자세를 교정하고 힘을 제대로 빼기까지만 한세월 걸린다.




그러고 보면 힘 빼라는 얘기는 무용 선생님도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처음엔 ‘몸에 힘을 뺀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아니, 힘을 빼면 무슨 힘으로 춤을 추라는 거지? 거울 속에서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뻣뻣하게 움직이는 내 몸을 보고 있자면 뭔가 잘못된 것 같기는 했지만, 뭘 어떻게 힘을 빼야 한다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몇 년간의 훈련과 배움 끝에 알게 된 거지만, 무용에서 힘을 뺀다는 것은 정말 온몸에 힘을 빼라는 게 아니라 (당연하다. 몸에 힘이 다 빠진 채로 어떻게 춤을 추겠나)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힘을 빼라는 뜻이었다.  

예컨대 오른팔이 힘을 주고 앞으로 뻗어나가면 그 힘으로 나머지 몸뚱이는 힘이 빠진 채 이끌려 간다. 혹은 머리가 힘차게 뒤로 꺾이면 그 힘을 받아 나머지 몸뚱이가 이끌려 뒤로 젖혀진다. 그러니까 몸의 각 부위가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단 뜻이다.  


이때 복부 코어에는 언제나 힘이 있어야 한다. 사지에 온 힘이 빠진 채 널브러져 있어 보이는 자세에서도 코어 힘을 빼선 안 된다. 팔다리를 자유롭게 휘두르려면 그만큼 코어 힘이 강하게 단련되어 있어야 한다.  

무용에서도 제대로 힘 빼는 법을 터득하는 데만 한세월 걸렸다. 단단한 코어 힘을 기르고, 몸의 각 부위를 독립시키고, 내가 어느 정도 힘을 빼도 넘어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생기고 나서야 나는 정말로 힘을 뺄 수 있었다.  


피아노에서도 무용에서도 힘을 주는 것보다 힘을 빼기가 더 어렵다. 힘을 빼기 위해서는 힘을 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도록 받쳐주는 더 단단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피아노와 무용에서 진짜 '필요한 힘', 이를테면 손가락 힘 혹은 코어 힘을 기르려면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몸에 힘을 빼는 일은 다분히 의도적인 단련을 통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셈이다. 힘을 빼도 내가 무너지지 않을 거란 믿음이 생겼을 때 비로소 힘을 뺄 수 있다.




힘을 빼라는 얘기는 글 쓸 때도 듣는다. 힘을 뺀 글쓰기란 곧 진솔한 글쓰기를 의미한다.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글을 써왔지만 솔직하게 글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제일 어려운 일이다. 아직도 솔직하게 글 쓰는 좋은 방법 같은 것은 찾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조금 알 것 같다. 솔직한 글쓰기는 마치 투쟁하듯 치열하게 의식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 일상을 살아가며 다양한 종류의 겉멋과 가식을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다. 글을 쓸 때만 갑자기 그 습관들을 벗어던지기가 쉬울 리 없다. 솔직한 글쓰기는 나의 가식과 겉멋을 덜어내고 걸러내는 작업이다. 맨얼굴의 나를 마주하는 작업이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와 투쟁하며, 편안한 가면을 벗어 던지고 싶어 하지 않는 나에 치열하게 맞서며.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긍정하는 내면의 힘이 생기고 나서야 힘을 빼고 글 쓰는 것이 가능하다. 단단한 코어 힘을 믿어야 몸에 힘을 빼고 춤출 수 있는 것처럼. 손가락 힘을 믿어야 상체에 힘을 빼고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처럼.  


무용을 하든, 피아노를 치든, 글을 쓰든, 힘을 빼는 것은 의식적인 투쟁과 훈련을 거쳐 힘을 기른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인스타툰 버전 - https://brunch.co.kr/@dancingneulbo/20 


*위 글은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에 기고되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향유자, 참여자, 생산자로서의 예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