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불행을 초월한 클래식 음악 플레이리스트
그런 시기가 있다. 삶이 내 뜻과는 전혀 다르게 갑자기 방향을 틀거나 나를 주저앉힐 때. 무력하게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때. 인생의 방향키가 내 손에 있지 않다는 걸 실감했을 때의 당혹감과 절망 앞에서 나는 백 마디 문장을 읽느니 한 줄기 음악을 튼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음악을 듣는 것밖에 없다는 듯이.
올해 여름,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저앉아 있어야 했던 시기에 나에게 무언의 힘을 주었던 클래식 음악을 소개한다.
https://youtu.be/WjC7BhHmQW0?si=Jzhong7cBoZcC8JB
도입부터 끊어질 듯 말 듯, 절뚝거리며 힘겹게 지속되는 왼손 리듬 위로 절망적인 선율이 가라앉는다. 살아야 할 이유 없이 어거지로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는 비극적인 인생 같다. 고통의 선율이 크레센도로 점차 커지더니 이내 단조였던 선율이 장조로 전환하는 순간(0:55)이 온다. 극대화된 고통이 순간 풀어지면서 따뜻한 온기가 찾아온다. 모든 것이 이제 괜찮아졌다는 듯이 편안해진다. 다시금 고통이 시작되는 듯하지만 이내 장조로 풀어진다. 음악은 잠시 여정을 떠났다가, 도입부가 또다시 몇 번 되풀이된다.
실제로 슈베르트의 유작이 되어버린 이 곡은 슈베르트가 죽음 앞에서 마주한 초월적인 감정을 담은 곡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곡은 시련을 이겨내는 승리와 성공의 서사라기보다는 시간의 순환이 마침내 절망을 초월해 내는 서사에 가깝다. ‘너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낙관적인 응원이 아니라, ‘결국 다 괜찮아질 날이 올 것이다’라는, 어쩌면 다소 수동적인 태도다. 하지만 삶을 지속하고 견뎌내는 것에도 적극적인 용기와 의지가 필요한 사람도 있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너무 유명하다 못해 닳아빠진 격언이 삶을 지속하는 유일한 동아줄일 때가 있다. 이 음악은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을 음악적으로 설득시킨다. 언젠가 우리는 고통을 초월하여 평안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https://youtu.be/LA9PLRsQAto?si=z4sNu5s00tA3Vazs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 3곡(30번, 31번, 32번)은 모두 어떤 불굴의 의지와 초월적인 삶이 깃든 곡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31번 3악장은 ‘레치타티보 - 아리오소 돌렌테 - 푸가 - 아리오소 돌렌테 - 푸가’의 구조로 되어있는데, 곡이 끝난 것 같으면서도 지속되는 구간이 두세 번 등장함으로써 반복적인 고통과 그에 맞선 인간의 의지를 그려낸다.
도입부 ‘레치타티보’는 ‘사람이 말하듯이’ 연주하라는 뜻이다. 실제로 사람이 대사를 읊조리듯이 나지막한 선율로 시작된 곡은 ‘탄식의 노래’라는 뜻을 가진 ‘아리오소 돌렌테’로 이어진다. 서정적이면서도 어딘가 구슬픈 선율이 마치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듯하다. 터널의 끝에 다다른 것처럼 조용하고 어둑하게 곡이 마무리되는가 싶은데, 이내 새로운 곡처럼 ‘푸가’가 시작된다(3:57). ‘푸가’는 처음 소개된 주제 선율을 여러 성부에서 돌림노래처럼 모방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끝없이 산을 오르고 또 오르는 상승 음형이 겹쳐지고 겹쳐진다. 불굴의 의지로 이상과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처럼. 중간에 강렬한 저음으로 떨어졌다가도(5:33) 포기하지 않고 다시 상승해 나간다. 돌림노래는 점차 오케스트라처럼 풍부한 음향을 만들어내며 화려하게 막을 내리는 듯하다.
하지만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산의 정상 바로 앞에서 낭떠러지로 미끄러지며 침잠하고(7:03) ‘아리오소 돌렌테’, 즉 ‘탄식의 노래’가 다시 시작된다. 또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이다. 결국 인생은 반복되는 고통일 뿐인가? 이 음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절망적인 삶일까? 그렇게 곡은 장엄한 화성(9:05)의 크레센도로 마무리되는 듯하다.
그런데 장엄한 비극의 끝에서 다시 좀전의 ‘푸가’가 나지막이 시작된다(9:33). 상승 음형들이 한 발짝씩 내디디며 또 산을 오른다. 첫 번째 푸가보다도 더 화려하게 상승하던 음악은 마침내 진정한 정상에 다다르고, 하늘로 승천한 듯한 초월적 찬란함으로 끝난다.
두 번씩 반복되는 고통과 의지의 서사 끝에 결국 의지의 승리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이 곡은 순환하는 고통과 환희의 굴레 안에서 끝내 인간의 의지가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되리라 말하는 것 같다.
https://youtu.be/QkQapdgAa7o?si=0QBhc0nkBV89Li8W
뜨거운 나날이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올여름, 나에겐 언젠가 기다리면 찾아올 겨울을 상징하는 음악이 필요했다. 차가운 겨울 바람만큼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확신시켜 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음악은 기억을 저장한다. 나에게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입김이 솔솔 나오는 겨울의 찬 공기가 저장되어 있는 곡이다. 연말이 되면 여기저기서 이 곡이 연주되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에도 이 곡을 실연으로 들었던 날을 기억한다. 울림이 좋은 홀에서 들어서인지 음압과 음량이 상상보다도 더 압도적이었다. 온몸에 음악을 가득 담은 채로 귀가하던 그날 밤의 충만함. 대중교통에서 음악을 듣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도 그날만은 더 이상 새로운 다른 음악이 들어갈 공간이 없어서 아무것도 듣지 않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4악장의 환희의 송가를 듣다 보면 이보다 더 평화와 사랑을 찬양할 수 있을까 싶다. 합창단원들의 모든 입에서 입김이 나올 것만 같을 정도로 춥디추운 곡. 그럼에도 더없이 따뜻하고 희망찬 곡.
올해도 기어이 찾아올 겨울을 상상하며, 그때쯤 되면 건강하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연말에 합창 공연을 다시 보게 되는 그날이 오면 다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되뇌며 녹아내릴 것 같았던 여름에 이 곡을 듣고 또 들었다.
음악은 흘러가는 시간에 의미와 감정을 채워주는 시간예술이다.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음악만큼 위로가 되어주는 게 있을까.
내가 무슨 상황에 있어도, 어떤 모습이어도,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있어 주는 클래식 음악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내 삶에서 최후의 보루가 있다면 그건 클래식 음악이 아닐까.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1884)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