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의 본질
웃음과 대화의 본질을 논함에 있어 뒷담화를 배제하는 것은 팥이 없는 찐빵을 논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대개 조롱의 대상이 담화로부터 철저히 배제(그러니까 그런 말이 오가는 줄 모른다는 대상의 무지로 인한)되었다는 가정 하에 성립된다. 그리하여 대화의 참여자들은 그네들보다 못한 존재의 결함을 들먹이며, 자신은 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일종의 우위 의식으로 하여 '웃음'을 이끌어가게 된다. 어쩌면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식의 활자화를 반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글자뭉치는 그런 웃음들을 담아내기에 매우 불완전한 매체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책의 광범위한 접근성에 있다. 좋은 종이와 나름의 명성을 갖춘 책은 일상적인 대화문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게 되는데, 200~300년 후에 그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돌대가리 독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조롱의 대상까지 이를 읽는다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발화자는 적어도 책에서는 그런 말을 삼가야 하고, 이로 인해 표현에 제약이 가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제자가 자기 말을 적는 것을 못마땅해 했을 것이다.
낙마사고를 감추려다가 자신의 찌질한 성품까지 모조리 실록에 기록 '당한' 불쌍한 왕의 이야기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대에는 이 '대화수단' 이라는 것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던 까닭에 그 이용자 모두에게 사관들이 따라붙게 된다. 예컨대 TV의 토크쇼에서는 더이상 유명 아이돌 L의 여성편력을 운운하며 웃음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당사자가 여론에 생업이 달린 연예인이라는 점은 차지하더라도, 그런 말은 tv만 틀면 바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요즘 시대에는 SNS를 통해 누굴 대상으로 뒷담화를 할 수가 없다. 만약 그랬다가는, 그 대화창을 당사자에게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를 막기 위해 카카오톡은 '메시지 삭제 기능'이라는 훌륭한 기능을 만들었지만 하나마나한 조치이다. '삭제메시지 보기'라는 훌륭한 어플이 플레이스토어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원활히 표현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정치인을 욕하면 취업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자기 친구를 욕하면 단톡방에 '박제'될 것이며, 사회 현안에 대해 비판하면 자신이 언급한 특정 문구들을 근거로 하여 일베충과 메갈충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무슨 말만 하면 그에 따라 기분이 나쁜 사람부터 자기 존재를 부정당했다는 사람들이 줄줄이 나타나 자기 피해를 호소하기도 한다.
현대에 유독 이런 인간들이 많아진 이유는 간단하다. 매체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소통의 반경이 매우 넓어졌던 관계로 사람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파급력은 tv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에 비해 보는 눈들이 많아지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현대인이 지켜야 하는 도덕 기준은 보다 엄격한 것이 되었다. 가치관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진 반면 그 중에서 중도적이고 보편적인 도덕률을 찾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 과잉으로 인해 개개인은 대부분 자신이 속할 법한 집단의 시각으로 사건들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그렇게 밀집한 집단의 논리에 따라 그 집단 외부의 시각을 더욱 효과적으로 배척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그 의견집단은 이전보다 더욱 극단적인 주장을 지지하게 되며, 그리하여 그곳의 개인은 자신의 의견 혹은 자신을 비하하는 발언에 대해 단순한 불편을 넘어서는 차원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염려한 자기검열과 집단검열이며, 우리의 현대인들은 이를 피해, 혹은 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행하기 위해 익명성이라는 가면 속으로 침잠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종래에 자기의 이름을 걸고는 절대 행하지 못했을 것들을 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역시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잘못이라는 말에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은 이들이 명예훼손과 모욕죄라는 훌륭한 제재수단을 사용하기 때문에, 종국에는 이 익명인들은 자기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1984에서 언급되는 '국가 주도'의 검열 시스템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용하다. 자본이 너무나도 풍부한 나머지 누구나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문자와 스마트폰)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이 되지만, 동시에 그것의 훌륭한 통제수단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결국 현대인들은 과거 조상들에 비해 더욱 우울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웃으면 장땡이라는 심리학자들의 조언은 그야말로 기만이다. 도대체 뭘 보고 웃으라는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희극은 '보통 이하의 인간을 모방하는 것' 으로 정의 내려지는데, 즉 자신의 위치보다 불행한 이들을 보며 주체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중세의 어릿광대들 처럼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많은 문물을 접하며 인권 및 물권 의식을 지나치게 발전시킨 나머지 그런 웃음에 불편함을 느끼며 그런 웃음에 대해 도덕률을 강요한다. 그리고 미국의 이름 모를 대학에서 심리학이나 사회학을 배워왔다는 이른바 '박사' 및 '교수'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 내린 웃음의 본질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릇된 것이라며, 무해와 비폭력대화 같은 자신들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개념들을 들먹인다. 그에 따라 사회에 남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조용한 세상 속에서 침묵해버리는 '정상인'들과, 그 이면에서 아우성치는 망령들 밖에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지식인들의 담론에서 잠시 벗어나 웃음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래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서 하는 대화가 우리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적어도 그 대화에서는 어떤 얘기가 나오든 그곳에서 그칠 것이기에 맘 놓고 웃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현대에는 이러한 직접적인 대화조차 방역이라는 취지 아래 제약받는다. 그러하다면 남는 것은 뭘까. 삶 그 자체를 사랑하라며 말같지도 않은 궤변에 체념하는 이들과, 그에 대해 염증은 느끼지만 별다른 반문은 못하고 이름같지도 않은 익 1 와 익 2를 들먹이며 분만 삭이는 이들만 남게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결국엔 웃음과 대화가 죽은 사회만이 남지 않을까.
참고저서: 미네르바 성냥갑(움베르토 에코), 시학(아리스토텔레스)